어떤 사람의 ‘순간들’을 모아 놓은 것 같았던 책. 단편 소설은 사실 여러 번 인물들을 ‘알아가야’ 하는 수고스러움 때문에 장편에 비해 덜 선호하는 편이다. 한 인물에 대해 익숙해질 때쯤 벌어지는 사건들 속에 푹 파묻혀 읽다 보면 어느새 결말을 향해가는 장편소설의 문법에 더 익숙하다. 김금희 작가의 이 책은 여러 사람, 여러 장면이 나온다. 그들을 알아가는 일은 나에게 늘 그랬듯 역시 다소 버거운 일이었지만 짧은 단편이 마치 그네들 삶의 결정적 순간을 그림처럼 보여주는 듯해서 마음이 자꾸 울려 왔다.
각기 다른 이야기인데 슬픔이 자꾸 밀려온다. 인생에서 마주하는 재회와 헤어짐이 개개의 이야기를 관통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꼰대스러운 할아버지에게 싸구려 인공로봇을 선물하고, ‘소년’으로 이름붙여진 로봇에게서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누군가의 이야기는 참 감성적이지 않은데 감정선을 자극한다. 할아버지의 외로움과 현재 그의 부재, 그리고 로봇 ‘소년’ 또한 소멸된다. <그때마다 믿게 되는 건 그렇게 말없이 춤을 춰보는 어느 밤이 그래도 할아버지와 소년에게 있어르리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유년의 어느 날에 우리가 그랬을 것처럼, 햄버그스테이크가 있는 테이블처럼 너무나 당연하고 몹시도 그립게>(p.180)
인간의 기억을 리셋할 수 있다는 설정의 ‘오직 그 소년과 소녀만이’. 인간에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기억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억에 어느 정도 의식의 지분을 내어주고 있기 때문에 짐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상준과 주현은 모두 기억을 지우고 ‘리셋’한다. 다 지워 버리고 새로 시작하고 싶은 불가능한 가정이 소설로 가시화된 것을 보니 흥미로웠지만, 리셋 후 그들의 심경이 편안해 보이지는 않았기에 단순히 기억을 지운다는 것이 해답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책을 읽은 후, 꼭 담아두어야 할 “작가의 말”. 작가가 이 짧은 단편들을 어떠한 마음에서 묶어 놓았는지 알 수 있다.
당신들이 괜찮다면 나는 아주 오랫동안 당신들에 대해 생각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야기는 계속되고 우리는 그 안에서 자주 만났다가 헤어지면 그리워도 하겠지만 끝내 서로를 다 이해하지는 못할 거라고. 하지만 그렇게 거듭되는 재회와 헤어짐 속에서도 당신들이 처음 내 마음속에 들어와 헤이, 라고 스스로의 존재를 각인시켰던 그 눈부신 순간에 대한 감각은 잃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떠난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차마 가져가지 못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다정함을 주었던 사람이라면 마땅히 차지해야 할 오롯한 빛이니까.
작가는 책 속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서로가 연결되던 눈부신 순간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연결을 놓는 순간 그들의 마음에 생기는 파동도. 이 짧은 이야기들을 만나면서, 누군가의 인생을 잠시 들여다보면서 내 삶의 연결과 단절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