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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라시아 Jul 21. 2021

[서평]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음의 순간에도 인간은 '살아 있다'. 헤르타 뮐러 <숨그네>와 함께.


  얼마 전 본 영화 ‘우먼 인 골드’와 마찬가지로 이책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자행되었던 홀로코스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지냈던 저자는 인간이 내몰릴 수 있는 가장 비참한 현실 속에서 수감자들이 어떠한 정신적인 변화를 경험하는지, 어떠한 태도로 현실에 대응하는지를 목도하게 되고 훗날 이를 글로 담아 놓는다. 로고테라피 정신의학자인 저자는 프로이트의 범결정론적인 관점과는 다르게 인간의 자유 의지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며, 극단의 상황에서도 인간은 의지에 의해 선한 방향으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시련이 주는 감정 자체에 매몰되지 말고, 그 고통스러운 감정을 명확하게 바라보고 묘사할 때 고통을 멈출 수 있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비극 속에서 자신을 다잡는 게 가능할지, 내가 그러한 상황에 처한다고 상상해 보더라도 무척 어려운 일 같았다. 역사 속 있어왔던 수많은 비극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 자유의지를 기반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나의 내면이 어느 쪽으로 성장해야 하는지는 답이 나오는 것 같다. 인간의 존엄성이 상실되고 생명이 무가치해지던 그 순간에도 삶의 의지를 잃지 않고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를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준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 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인간의 정신적 자유
강제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인간의 영혼을 파헤치고, 그 영혼의 깊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인간성에서도 선과 악의 혼합이라는 인간 본연의 특성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모든 인간을 관통하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단층은 아주 심오한 곳까지 이르러 인간성의 바닥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강제 수용소라는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수용소의 여러 인간 군상
인간이 시련이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비극 속에서의 낙관



이 책을 읽은 후에는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읽으면 좋겠다. 레오라는 독일인 소년의 수용소 생활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고, 그 아이의 시점에서 소설이 전개된다. 소년이 바라본 수용소의 삶은 처참하다. 시멘트 반죽에 사람이 빠져 죽고, 사람이 죽으면 모두가 그의 유품을 노리는 모습. 굶주림에 지쳐 아내의 수프를 빼앗아 먹는 사람. 가혹한 노동과 비위생적인 환경까지. 최소한의 인간성도 보장받지 못한 채 그저 노동할 수 있는 인력으로 생존만 보장되는 수용소의 환경이 경악스러웠다. 레오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배고픈 천사’. 배고픈 천사가 사람들을 지배하고 움직이게 한다.


배고픔이 눈을 뜨고, 배고픈 천사는 나를 식당 뒤편의 음식 쓰레기 더미로 데려간다. 나는 배고픈 천사보다 한 걸음 뒤처져 비틀비틀 걷는다. 나는 내 입천장에 비스듬히 걸려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 발길을 뒤따라 걷는다 (98)


집을 떠날 때 가져갔던 측음기 상자를 그대로 가지고 오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고 모든 것이 자유로워지지만 레오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소년의 빼앗긴 젊은 시절이, 비단 5년이라는 시간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세월에 약탈당한 살은 아무도 다시 만들어줄 수 없었다. 전에는 어떤 대가가 있으리라 믿었다. 밤에 여섯 번, 일곱 번, 여덟 번까지도 수용소로 강제추방 당하도록 나를 그냥 내버려둔 데 대해. 나는 천천히 늙어감으로써 약탈당한 오 년을 돌려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몸은 내 계산과 달랐다. 속은 황폐해지고 얼굴에는 눈의 허기가 번득였다. (325)


  이 소설을 지배하는 언어는 시적이고 아름다운데, 처참한 현실과 대비되어 그게 오히려 더 낯설고 아팠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폭력의 역사를 볼 때마다 놀랍고 슬프다. 그러한 이유로 보고 싶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직시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반복되어서는 안 될 일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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