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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라시아 Jan 17. 2022

식물을 사랑하는 어느 과학자의 이야기

호프자런, 랩 걸 


이책은 식물을 사랑하는 어느 과학자의 이야기이다. 과학자로서, 여자로서 살아온 삶을 솔직하고 생생하게, 때로는 학문적으로 다루고 있다. 손으로 무엇이든 직접 만지고 느끼는 것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 돈을 벌기 위해 수액을 제조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던 젊은 시절의 경험, '빌'이라는 인생의 동료를 만나고 자신만의 작은 실험실을 처음 꾸리고 기뻐했던 일, 넓은 미국땅을 자동차로 누비고 캠핑하며 식물과 흙은 연구한 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된 일, 점점 학계에서 인정을 받고 어느새 노년을 바라보는 과학자가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내면에 존재하는 광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을 자양분삼아 '과학'을 한다. 하지만 과학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늘 연구 자금을 따내기위해 애쓰는 장면은 매우 현실적이어서 마음이 아팠다. 아마 돈에 대한 과학자들의 갈증은 지금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나무와 흙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몸소 구덩이를 파고 눈으로 직접 그것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기록하는 그녀의 모습은 광기의 올바른 구현같다. 또한 그녀의 글을 보면 연구대상인 식물에 대한 참된 애정이 느껴진다.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이동할 수 없고 처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식물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살아내는지' 그녀는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한 연구를 꾸준히 해나갈 수 있었던 것은 동료 '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와 빌의 관계는 사실은 단순한 동료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정서적으로 자런의 깊은 곳까지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에 훗날 연인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하지만 두 사람은 친구이자, 동료이자, 가족이었고, 그녀의 모든 생각과 말을 이해하는 거울같은 존재였다. 과학자로서의 그녀의 성취도 물론이지만 빌과 같은 인물과 오랜 세월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 정말 부러웠다.


  내 말을 이해한 사람, 그 모든 것을 이해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나는 그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를 마침내 완전히 깨달았다. (333p)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임신하고 낳는 그녀의 모습이 아프게 다가온다. 임신한 여인이 실험실에 들어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는 당시의 보수적인 학계 분위기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임신 초중기까지 자신을 지탱해오던 여러 약물에서 벗어나 고통스럽게 스스로를 견디는 장면까지. 그리고 여느 어머니와 달리 아이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결심하는 모습은 지금 이 시대 수많은 여성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회고하며 자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또 어린아이같은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556p)고. 어린아이와 같은 그녀의 순수한 광기와 열정은 삶을 이끈 원동력이 되었고 수많은 식물들의 삶에 '이야기'를 부여해 주었다. 식량, 의약품, 목재로 재단되는 삶이 아닌, 그들이 '살아내는' 이야기를.

  
   초록 표지의 이 책에서 한 여인을 만났고 그녀의 긴 시간을 같이 들여다 보았다. 녹색 식물들의 이야기와 그녀의 삶이 병치되어, 과학자의 삶이 참으로 문학적으로 다가왔다. 올해를 시작하며 이 책을 만나 행복하다.
  




아래는 '랩걸'에서 인상적인 구절들을 추린 것이다. 힘이 들 때 한번씩 꺼내어 보고 싶은 문장들이다. 


과학자로서 나는 정말 개미에 불과하다. 다른 개미들과 전혀 다르지 않고, 미흡하지만 보기보다 강하고, 나보다 훨씬 큰 무엇인가의 일부라는 점에서 말이다. 우리는 함께 우리의 손주들의 손주들이 경외감을 느낄 무엇인가를 건설하고 있고, 그것을 건설하는 동안 할아버지들의 할아버지들이 남긴 투박한 지시사항을 날마다 들여다본다. 과학계를 이루는 작지만 살아 있는 부품으로서 나는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수없는 밤들을 지새웠다. 내 금속 촛불을 태우면서, 그리고 어린 가슴으로 낯선 세상을 지켜보면서 말이다. 오랜 세월을 탐색하며 빚어진 소중한 비밀을 가슴에 품은 사람은 누구나 그렇듯 나도 누구에겐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염원을 품고 있었다. (559p)

아이는 자라고 있고, 나는 날마다 아이를 조금씩 놓아줘야 한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아이를 놓아주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을 배우게 됐다. (518p)

나는 이 아이의 어머니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다. 대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460p)

우리의 목표는 세차게 흐르는 강물로 그가 던진 돌을 내가 딛고 서서 몸을 굽혀 바닥에서 또 하나의 돌을 집어서 좀더 멀리 던지고, 그 돌이 징검다리가 되어 신의 섭리에 의해 나와 인연이 있는 누군가가 내딛을 다음 발자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384p)

내 제한된 경험에 따르면 성차별은 굉장히 단순하다. 지금 네가 절대 진짜 너일 리가 없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그 경험이 축적되어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 성차별이다. (370p)

흙은 생물의 영역과 지질학의 영역 사이에 생긴 긴장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나타난 낙서같은 것이다.(215p)

금요일 밤의 공기 속에는 과학의 정직하고 겸손한 심장이 고동을 치고, 과학적 발견과 장난기는 같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무엇인가가 있다. (203p)




마지막으로, 책을 읽은 후 떠오르는 질문들을 정리해 보았다. 

1) 유시민이 딸에게 추천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 과학자로서 살아가며 겪은 고난, 고난의 순간마다 했던 많은 생각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2) 책 속에 언급된 식물들 중 내 삶의 모습과 가장 유사한 식물은 무엇일까?

책 속에는 여러 식물들이 언급된다. 식물들은 단지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의 삶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대표성을 띠기도 한다. 내 삶의 모습과 닮아 있는 식물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독서 경험이 될 것 같다. 


3) 빌과 자런은 어떤 관계일까. 나에게도 이런 사람이 있을까? 이런 관계가 되려면 서로에게 어떤 자세로 다가가야 할까?

빌과 자런의 관계는 독특하다. 통속적인 연애소설이라면 빌과 자런은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든, 이별을 하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런의 실제 인생에서 빌은 연인이 아니며, 그야말로 인생의 길을 같이 걸어가는 동반자다. 


4) 자런은 아이에게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자런은 한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 의미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본다면, 그녀가 지향했던 삶의 방향을 더 명확히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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