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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nnie Volter Jan 24. 2017

집사 서리

우리집은 모태신앙 집안이다. 외할머니 때부터 내려오는 기독교 집안인데 외할머니께서는 살아 생전에 돈을 모아서 교회를 다섯 곳이나 세웠다고 하실 정도로 독실한 신앙을 보유하셨다고 한다. 돌아가시는 순간마저 새벽기도 끝나고 외할아버지와 귀가하는 길에 교통사고로 눈을 감으셨다고 하니 그 신앙심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정확히 나에게 이르러 3대에 걸친 기독교 집안이고 우리 아버지마저 어머니와의 결혼 조건이 교회를 다니고 신앙을 가진다는 조건이었다고 한다. 예상외로 아버지는 그 조건을 받아들였고 교회도 신앙생활도 (나름) 열심히 하고 계신다. 근데 그런 아버지가 20년째 비토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집사 임명'이다.
아버지가 집사임명을 거부하는 사정은 간단하다. 바로 아버지의 가장 큰 인생의 낙인 '일요일에 골프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집사가 되면 정기적으로 목사님이 주관하시는 예배에 대표기도를 드려야 하고 헌금도 더 의무적으로 내야하고 어쩌면 여가시간에 지역구 가정예배도 드려야하는 등 다양한(?) 제약들이 생기기 때문에 아버지는 한사코 거부하고 계신다. 허나 우리집 서열 No.1인 어머니를 상대로 정면승부는 힘들기 때문에 비지니스 미팅이라는 이유로 지금껏 요리저리 회피하셔서 20년째 집사 서리의 신분을 유지하고 계시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보며 배운 것 중 가장 인상깊은 것은 강자와 약자에 대한 대응법, 처세술이다. 학창시절 열심히 하는 공부는 전부 내가 자격을 갖춘 강자가 되어 편하게 살 수 있는 법이라면 처세술은 이미 성장이 끝난 상태에서 나보다 강한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이다. 아버지는 강력한 신앙을 가진 어머니의 약점인 비지니스 세계에 대한 경험부족, 그리고 돈에 대한 욕심을 적절히 배합하여 최적의 구실을 상황에 맞춰 준비하였고 그렇게 20년째 집사임명의 위기를 피하고 있었다. 성질급한 나라면 나의 주관에만 기대어 목소리 높여 어머니에게 대들다 완패했을텐데, 아버지는 달랐다. 사회에서는 물론 가정에서까지 용의주도하신 모습, 내가 아버지에게 본받을 점이다.

P.S 1 : 출근길에 아버지에게 처세술의 노하우에 대해 물어보았다. 아버지가 짧고 굵게 대답하셨다.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그 주장을 철회하거나 보류할 명분을 주는 것이 핵심이라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P.S 2 : 나에게도 처세술을 쓰시냐고 여쭤보았다가 맞았다. 약자에게는 그런 건 따로 쓸 필요가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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