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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nnie Volter Jan 25. 2017

맞선 2

알파걸을 만나다

먼저 번 맞선이 실패로 끝나자 비상가족회의(?)가 소집되었다. 비상가족회의의 진행은 주로 어머니가 담당하는데 이번 안건은 '우리 집 막내는 왜 굴러온 복에 까여버리는가?'였다. 아버지는 나의 이름없는 직장을, 형은 나의 긴장유발 제로의 외모와 뿌리부터 뒤틀린 성격 탓이라는 얘기를 하였다.(또 다른 참여자인 형수님은 나에 대한 배려로 노코멘트로 일관하셨다.) 안건의 당사자인 나에게는 발언권이 없어 입다물고 가만히 있었는데 이는 어머니의 지시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맞선 자리에서 거절당한 것이 단순히 나 개인이 거절당한 것이 아닌 우리 집안이 거부당한 문제로 인식하여 이 회의를 소집한 것이라 얘기하셨다. 더불어 이 손해(?)를 무언가로 꼭 만회하여야 한다며 눈에 불을 키며 얘기하셨다. 아무래도 지난 번 맞선에 나온 여자의 집안이 어머니 입장에서는 그냥 그런 집안이 아니었던 것 같다. '누구누구네 아들이 누구 딸에게 까였데.'라는 말을 듣는 것은 어머니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으리라. 

그래서 이번 회의에서는 상처받은 집안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더 좋은 처자와의 선을 주선하기 위해 각기 인물 하나씩 추천하라는 어머니의 부름이 떨어졌다. 아버지는 공수표를 던지셨고 형수님은 '일전에 해드린 적이 있는데 잘 안되어서 더 없어요.'라고 발뺌하셨고 형은 독신주의자를 위한 책목록을 나에게 건내주었다. 어머니는 나를 쳐다보셨고 나는 당당히 '없습니다'라고 얘기했다가 등짝 스매시를 맞았다. 어머니는 나와 가족을 좌우로 노려보다 한숨을 쉬시더니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와 잠깐 통화하러 가셨다. 핸드폰 버튼 터치가 한번이었던 것을 봐서는 VIP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리라. 

그날 회의는 어머니가 다른 처자를 알아보는 것으로 종료되었고(어머니 혼자서 문제제기하고 해결책도 다 내셨다.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시는 것이다. 비단 오늘 회의 뿐 아니라 지금까지 진행된 99%회의가 다 이런 식으로 처리되었다.)그렇게 몇일이 흐르자 그냥 어영부영 지나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나를 부르셨다. 갑자기 대뜸 꿇어 앉으라는 말에 어머니 눈높이에 맞춰 고개를 숙이자 나를 한껏 내려다보면서 말씀하셨다. 
"니 XX은행 서 팀장 알지?" 
안다. 내가 대학생 시절부터 우리 가정의 대부분의 수입을 그 팀장님께 맡기고 있다. 어머니와 종종 안부를 묻는 사이인 것까진 아는데 갑자기 그 분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는 잘 몰랐다. 내 궁금함을 아시는지 어머니가 바로 대답을 주셨다. 
"서 팀장한테 좋은 아가씨 소개해달라고 연락 넣어놨다. 조만간 니 핸폰으로 서 팀장에게 연락이 올거니 받는대로 바로 여자 만나고 온나. 내 니한테 주는 마지막 기회데이." 
10시간 근무 후 지옥철을 타고 귀가하고 이제 막 집에 와 씻으려는 나를 꿇어앉혀가며 하시는 이야기가 고작 이전 맞선 실패에 대한 설욕전이란 말인가. 피로를 풀기 위해 긴장을 한껏 풀었던 나에겐 밀물처럼 스트레스의 파도가 해일이 되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냥 남녀가 편하게 만나보는 자리가 아닌 (우리 집안만의) 명예회복을 위한 전투가 된 것이다. 어머니는 나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2차 가족회의를 소집하여 전 가족원에게 진행상황을 통보하였고 아버지, 형, 형수님은 나를 보며 눈을 흘기며 건투를 빈다고 말했다. 내 눈에 비친 그들의 속내는 첫 자리라도 무사히 통과해서 애프터까지만이라도 가라는 뜻이 아니었나 싶다. 

다음날, 서팀장님으로부터 문자가 왔고 거기에는 여성의 이름과 연락처가 기재되어 있었다. 나는 늘 그렇듯 머릿속의 매크로 안부 인사 중 하나를 끄집어내어 핸드폰에 타이핑하고 공유받은 연락처로 전송하였다. 문자를 보낸 것은 오후였는데 답변은 저녁에 왔다. 내가 제안한 시간, 장소로 나오겠다는 쿨한 승낙 사인이었다. 그렇게 맞선 날짜를 기다리며 한 주는 화살처럼 흘러갔다. 

맞선 날이 왔다. 그날따라 희안하게 날씨가 추웠는데 맞선 장소로 가는 나를 향해 전에없이 강력한 돌풍이 얼굴 부위를 집중강타하여 도착했을 때쯤 기껏 손질한 내 머리는 엉망이 되었다. (하늘도 내가 홀몸이 아니게 됨을 원하지 않나보다.) 다행히 약속 시간까진 아직 여유가 있어서 화장실에서 어느 정도 수습하고 자리에 앉으니 핸드폰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고 고개를 들어보니 아리따운 아가씨 한 분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셨고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어보니 딱히 가리는게 없다고 하셔서 파스타와 피자 세트를 시켰다. 주문이 끝나자 드디어 길고 긴 묻고 답하기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어떤 일 하세요?" 
"아, 네. 저는 XX 벤쳐회사에서 마케팅과 영업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잡일 전부 다합니다'라고 속으로만 말했다.) 어떤 일 하시나요?" 
"아, 네. 저는 XX회계법인에서 일하고 있어요." 
"회계법인이면...회계사인건가요?" 
"네. 아직 7년차에요." 
뒷통수를 강타당한 충격. 어떤 정보도 없이 만나러 간 선자리에 국내 굴지의 회계법인 7년차 회계사라니. 갑자기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허나 얻은 정보가 없기에 할 말은 적었고 이왕 이렇게 된거 이미 시작한 소재의 대화를 계속 하기로 하였다. 
"그럼 회계법인에서 어떤 일 하시나요?" 
"기업 인수합병 관련 일을 하고 있어요. 지난 번 XX회사 사건에도..." 

얘기를 들을수록 첩첩산중이었다. 알고보니 이 아가씨는 S대 생명공학과 공부를 하다 UC버클리로 교환학생을 다녀온 후 경제에 관심이 생겨 경제학을 이중전공한 수재 중에 수재였다. 그걸로도 모자라 회계사 시험을 1,2차 동차로 합격 후 회계법인에 바로 입사하여 현재는 7년차 기업 컨설팅 파트너로 퇴근 후에는 Y대 대학원에서 법학 관련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고 하지 않나. 퇴근 후에는 드라마나 영화보며 글이나 끄적거리는 삶을 사는 나하고는 다른 레일로드를 걷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것이었나. 이게 어머니가 첫 맞선에 실패해 만회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나. 한 치의 정보도 제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내 최고 수준의 알파걸을 만난 나는 행여 질문의 초점이 나에게 이어질까 노심초사하며 간신히 대화의 끈을 이어갔다. 

그런데 말을 하면 할수록 보통 아가씨가 아닌 것에 내 정신은 더욱더 혼미해져갔다. 능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외모도 예쁘고 거기다 성격까지 착하고 겸손하기까지 한 것 아닌가. 화룡점정으로 집안까지 좋아서 도대체 이 자리에 왜 나왔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인생에 허비한 시간없이 공부와 액티비티, 미래계획 등 여러가지를 하신지라 본인 이야기의 소재는 바닥이 날 줄 몰랐고 나는 앞에서 '멋지네요', '훌륭해요' 따위의 감탄사를 연발하며 맞장구치느라 바빴다. 간혹 내가 얘기할 타이밍이 되면 학창 시절의 이야기와 어학연수 기간 약간, 그리고 이전에 다녔던 회사 이야기 정도만 나누어서 대화가 삼천포로 빠지는 일은 다행히 없었다. 
자신의 최종 목표는 회계법인 경력을 더 채운 후 로스쿨 입학 후 조세전문가가 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백기를 들었다. 맞선 자리가 내가 너보다 낫다를 재는 자리는 아니지만 이 분의 인생과 내 인생간의 교집합은 찾기 어려웠고 내가 꿈꾸는 나의 삶이란 정년까지 일하며 글쓰기나 영화 관련 조그마한 강연이나 책을 집필하는 것인데 그것을 말하기는 왠지 초라하게 느껴졌다. 결코 초라한 것이 아닌 대단한 꿈이지만 대한민국 피라미드 상위층의 목표를 꿈꾸는 그녀에겐 동화나 만화처럼 추상적으로 보일 것 같아 이야기를 못하였다. 대신 그녀에게 격려와 응원의 메세지만 실컷 건내고 그렇게 맞선 자리는 끝났다. 

집에 돌아가니 어머니가 마루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내가 현관에 들어가기 무섭게 말했다. 
"어땠나? 잘 하고 왔재?" 
"좋았습니다. 실수는 안한 것 같습니다." 
나는 말을 짧게 끊고 내 방에 들어가 그렇게 하루를 끝내었다. 
다음 날 저녁, 퇴근 후 집에 들어온 나에게 어머니가 다가왔다. 오늘 하루 힘들었지 하며 등을 두드려주실 줄 알았는데 돌아온 것은 강력한 등짝 스매시였다. 
"왜, 왜 때립니꺼?" 
어머니는 내 말을 끊고 한대 더 때리셨다. 
"닥치고 일단 좀더 맞아라." 
등짝 스매시를 여덞 번 맞고 난 후에 어머니는 얘기해주셨다. 어제 만난 여자애가 맞선 자리에 대한 피드백을 서팀장님에게 보냈는데 순수한 사람이라 좋았다는 얘기를 (예의상)해주었다고. 허나 그 담부터는 안좋은 이야기였다. 
"미친놈아, 세상에 맞선 자리에서 존경하는 인물을 안데르센, 미켈란젤로라고 하는 놈이 어딨노. 죄다 독신으로 살고간 위인들인데 니 머리에 총맞았나."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아, 미술과 책 이야기 하다 해버렸구나. 나는 묵묵히 등짝 스매시를 더 맞으면서 얘기를 계속 들었다. 
"그리고 뭐? 여자애가 아무리 괜찮아도 그렇지 존경한다는 말은 왜 하노? 맞선 상대방에게 존경한다는 얘기하는 니는 뭐고 듣는 걔는 어땠겠노? 초롱초롱 자기 쳐다보니 자기 자랑 같은 얘기를 그만할 수 없어서 억지로 계속 했다고 하소연캤다 카더라. 이건 누구 닮아 이리 생각이 없노?" 
정확히 열 여덟 대. 그날 내가 맞은 등짝 스매시의 횟수다. 그렇게 나는 회사에선 사장님에게, 집에선 어머니에게 박살나고 등을 위로한 채 잠자리에 들며 그날 하루를 끝내었다. 불을 끄고 눈을 붙이려는 찰나, 방문 넘어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기절하듯 수면에 들었다. 

"서 팀장님, 다음 처자 또 있지예? 소개해 주이소. 얼마나 기다리면 되는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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