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nnie Volter Mar 03. 2017

채변봉투사건

이제 60대 중반에 진입하신 아버지와 어머니. 부부 내외는 50살부터 매년 건강검진을 받고 계신다. 올해도 어김없이 회사에서 지원하는 건강검진 일정이 찾아왔고 정확한 측정을 위해 전날 저녁부터 두 분은 금식에 들어가셨다.
아버지는 유난히 식탐이 강하신 편인데 겨우 반나절의 단식도 참기 어려워하신다. 식사 후 드시는 오미자쥬스나 티비보면서 먹는 땅콩, 양치는 빼먹어도 절대 빼먹지 못하는 요구르트까지 모두 아버지의 디저트 메뉴다.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하지 못하게 된 아버지의 신경은 전에 없이 날카로웠고 그 칼끝은 가장 만만하고 눈에 가시같은 나에게로 향하였다.
다음 날 아침, 오전 일찍 출근하기 위해 기상한 나는 아버지를 보며 안부인사를 드렸다. 내 안부인사는 특이한데 '잘 주무셨나요?', '좋은 아침입니다.'같은 평범한 종류의 인사가 아니다. 혼잣말처럼 되뇌는 말이지만 아버지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즉, 아버지 속을 뒤집는 말이다.)

"아버지 덕 보자. 아버지 덕 보고 편하게 살자."

매일 아침 아버지는 내 잠을 깨울 때 내 방에 노크없이 들어오셔서 내 옆에 누으시며 말씀하신다.
"회사 가기 싫나?"
그럼 나는 얘기한다.
"가기 싫습니다."
"그럼 뭐 먹고 사노?"
"아버지 돈 타먹고 살렵니다."
"못난 놈이로세. 그만큼 애비 등골 빼먹으면 염치가 있어야 하지 않나?"
"도와주지 않을 거면서 회사 가기 싫냐는 얘긴 왜 하십니까?"
"가기 싫으면 집에서 나가라고 하려했지. 퍼뜩 안일나나."
"일어날테니 제 책상위에 유산증서 올려주십시오."
"유산없다. 꺼지라."

평일 오전마다 이 레파토리가 반복되는데 대화의 말미에 나는 늘 "아버지 덕 보자. 아버지 덕 보고 편하게 살자."는 말을 되뇌며 화장실로 가곤 했다. 건강검진 당일 날도 이런 레파토리로 끝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대뜸 아버지가 전에 없던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 덕 보여줄까?"
나는 뭔가 주나 싶어 생각없이 대답했다.
"함 보여주이소."
아버지는 정체불명의 흰 봉투를 뒤적이더니 투명한 유리컵에 담긴 괴상한 고체 덩어리를 보여주셨다. 난 이게 뭐지, 얼마전에 얘기했던 보물선에 나온 유적인가 생각하다 금새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왜 이걸 내한테 보여줍니까?"
"덕 보고 싶담서...내가 니한테 줄것은 이것밖에 없다."

그것은 건강검진용으로 제출할 아버지의 채변이었다. 그렇게 나는 회사 출근을 앞두고 못볼 것을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였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에도 눈에 아른거리는 불쾌한 고체의 형상. 그 후로 나는 아버지 덕 보자는 말을 안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맞선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