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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nnie Volter Feb 26. 2018

가장 기분 좋을 때

일이 다 잘 풀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언제던가, 학창 시절 시험공부를 시작했는데 첫 과목 첫 챕터를 읽고 문제를 전부 맞췄을 때가 그런 때다. 한 번에 읽고 한 번에 이해한 내용으로 고민없이 문제를 풀었는데 모두 정답일 때. 그 때면 나는 내가 천재는 아니어도 센스가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자신만만히 다른 과목 공부를 시작하곤 하였다. 그러곤 조금씩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지식의 성벽에 누수가 생겨 허물어져 다시 처음부터 공부를 하곤 했지만. 몇 번이나 그런 악순환을 반복하면서도 예의 그 자신감을 잊지 못하고 성급히 문제부터 풀곤 하고 했다.

그래, 기분이 가장 좋을 때가 바로 그럴 때다. 준비없이 나 본연의 지식과 판단으로 문제를 풀 때 손대는대로 다 풀리는 순간. 정답이라는 문에 나 개인이 쏙 하고 들어가는구나, 어쩌면 소설에서나 보던 타고난 재능이 내게 있어 세상에서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겠구나 하고. 그만큼 자신감이 생기고 그만큼 누군가와 관계를 갖고 그만큼 어떤 일이든 할 수 있겠구나 착착 쌓여가는구나 하고.

그래서 나에게 가장 행복할 때가 중학교, 고등학교 때였다. 문제를 만들던 선생님들이 자신감과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배려와 관심으로 만들어준 문제를 하나하나 풀 때의 그 기분. 하루를 방종해도 친한 친구가 적어도 그렇게 나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때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에 입학한 후 노력이 배신하는 상황을 맞으며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배려와 관심으로 만들어진 환경에서 살았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상황을 만들어가기보다, 상황을 나에 맞게 조절해본 적 없는 나. 이런 사태를 받아들이지 못해 노력이 부족했구나라며 생각을 단순화하며 방향없는 노력으로 시간만 버렸다. 학업도 인간관계도 경력관리도 전부.

가장 기분좋을 때라는 말로 시작했지만 어쩌면 지금의 이 넋두리같은 글쓰기도 상황을 바꾸거나 적응하려하기보다 나 좀 봐달라고 나는 틀리지 않았다고 징징대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굳어버려 더 바뀔 수 없는 내 습성에 나는 신의 자비와 행운을 구하며 지쳐 눈을 감는다. 

이젠 무얼 시작해도 그 때의 자신감이 생길 것 같지 않은데. 
이젠 무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은데.
이젠 무얼 시작할지도 잘 모르겠는데.

그 때는 아무 것도 안해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 때는 아무 것도 안먹어도 늘 배불렀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있을 것 같던 그 때.
그 때가 참 좋았다.
그 때 참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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