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무기력한 삶에 빠졌다. 환각에 걸린 것처럼 주어진 시간을 흘려보내던 때, 우연히 어렸을 적 내 모습이 찰나와 같이 스쳐지나갔다. 그래, 불과 2년 전만해도 나는 꿈에 취해있던 사내였다. 글쓰기에, 창업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애송이였지만 추진력과 기획, 관계망을 형성하는 능력만큼은 상당히 뛰어났다.
서른 살부터 서른 다섯까지는 정신없이 달렸던 것 같다. 실패하고 거절당해도 성장기 식물처럼 대지를 뚫고 대기를 뚫고 뻗어나가는 줄기처럼 거침없었다. 아무것도 나를 멈추지 못할 것 같았고 몇 번의 실패와 시행착오는 대수롭지 않았다.
가속도를 더해가며 달려가던 인생속도가 늦춰진 것은 외로움과 아픔 때문이었다. 변명이지만 나는 정말 아팠다. 전부 소출을 거두어가고 다음 세대를 위한 씨앗마저 먹어버리는 세상에서 동조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너무 슬펐다. 무엇에라도 미친 것처럼 묵묵히 씨를 뿌리기엔 가족도, 주변의 따뜻한 시선도, 함께해줄 동지도 없었다. 그래서 외로웠다. 외로움에 함께 해줄 사람을 원했지만 원하는 이가 내가 아님을 알고 상처받았다. 그후 스스로 세속화를 선택했다. 내 안의 파수꾼 유전자가 세속화에 이따끔 격렬히 저항하지만 그래고 꾹꾹 세속의 길을 걸었다. 그래, 인식하지 못하면 없는 것이다. 인식하지 못하면 없는 것이다. 되뇌이면서. 그러다 기억도 깜빡깜빡 할정도로 박제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서른 여섯의 나이에 다섯번째 회사로 이직을 한다. 국내 기업 중 씨뿌리는 일을 하기에는 최고의 조건과 환경이 갖춰진 회사다. 8개월만에 연봉을 천만원 넘게 올린 것도,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회사에 들어간 것도 감사할 일이지만 나를 더 설레게 하는 것은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평범한 샐러리로 끝이 날지, 다시 씨뿌리는 사람이 될지 모르지만 이러한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