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박을 받거나 난제를 만났을 땐 이완, 타인과 함께 하는 순간엔 수축
자발적 아싸(아웃사이더)의 길을 걷곤 한다. 고1때 패거리 놀이에 질렸을 때, 대학 때 밥친구 구하기 지쳤을 때, 이직 후 점심 시간에 홀로 일하고 싶을 때. 그냥 혼자이길 택했다. 처음에는 질려서였으나 나중에는 무서워서였다. 낯선 이와 같은 시간과 공간에 있을 때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서, 그리고 무언가를 안할 수 없기 때문에.
혼자 있을 때는 아무 것도 안해도 되니까. 생각을 안해도 되고, 알려고 안해도 되고, 생각을 안해도 되는 시간. 혼자 끊어져 있을 때 고요하고 적막한 평화에 내 몸을 뭍을 수 있다. 현실의 한복판인 학교에서 직장에서 흡사 정지된 세계처럼 멈춰설 수 있다.
웃기게도 집에 오고 나면 다시 세계와 이어지고 싶어진다. 채팅방에 들어가 한가한 인사를 복사해서 친구들에게 갠톡으로 보내고, 별볼일 없는 뉴스를 전하며, 교감하고 반응하고 싶어한다. 왜 이럴까?
남탓, 상황탓을 하자면 한없이 늘어놓을 수 있기에 내 잘못만 얘기하자면 두려움과 허무를 포장한 게으름이다. 배우기 싫고 깊이 들어가기 싫어서 안되는 예만 떠올리며 포기한다. '난 원래 그래', '폐를 끼치기 싫어서'라 핑계대며 순간을 피하고 껍데기안에 있고 싶어한다. 그렇게 세상에 속하며 세상을 등진다. 이해는 가지만 이해하기 싫다. 어찌 보아도 참 못났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이 생각난다. 내가 걱정하는 일들, 예컨데 이직 후 젊고 어린 여성들 위주의 사회에 섞이지 못하는 부분과 공은 많이 들여도 티는 많이 나지 않는 업무. 가까이서 보면 도망치고 싶고 답이 없고 그냥 하는데까지 하자, 에라 모르겠다 등 눈감고 싶은 상황이지만 먼훗날 지금을 떠올리면 그같은 상념은 기억도 못하고 나의 선택, 내가 속했던 조직, 함께 일했던 사람이 누군지만 생각날 것이다. 정작 내 걱정의 근간은 정해진 상황에 충실하지 못해 발생하는 쓸데없는 고민일지 모르겠다.
회사에서 업무할 때, 밥을 먹을 때 등 조직에 있을 때는 관망하지 말고 수축하자. 생각보다 먼저 말을 하고, 조심보다 인사를 먼저 하고, 배려보다 먼저 제안하자. 눈앞에 무언가 아른거릴 때 망막이 수축하듯 내가 사는 세계에 들어가자.
퇴근 후, 집에 있을 때, 쉬고 노는 시간에는 이완하자. 쓸데없는 비교질, 속떠보기를 그만두고 내일 일에 대한 걱정도 던져두자. 조직에서 벗어난 후 일걱정해봐야 나아지는 것도, 풀리는 것도 없다. 멀어진 것이 아쉬워 눈을 부릅 떠도 이미 보이는 세계가 아닌 상상의 세계로 사라졌으니. 내면과 외면을 신경쓰지 말고 편하게 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