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생활자와 독립불능자의 동거 라이프

우리는 이렇게나 서로를 모른다니까

by 그래도봄




딸들과 좋은 친구라는 생각을 오래 하고 살았다. 거대한 착각이었다. 그게 자랑거리였다. 딸들이 나를 진정 좋아하고 사랑할 거라고 믿고 살았다. “우리는 이렇게나 서로를 모른다니까.” 별일도 아닌 사소한 기억 몇 개가 달랐을 뿐인데 슬쩍 지나가면서 한 딸아이 말이 꽤 오래 남았다. 못 할 말 전혀 없는 친구라거나, 속속들이 사랑한다거나, 마음속 비밀까지 잘 알고 있다거나... 하지만 그런 건 엄마와 딸 사이에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번쩍 깨달았다. 딸과 엄마 사이는 끊을 수 없는 깊은 애정 관계가 틀림없다는 애달픈 착각에서 깨어나려는 가당한 노력은, 실로 지지부진했다.


더 끊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애써왔는지도 모르겠다. 친구들이 하나둘 지상에서 사라지면서 딸을 친구 삼으려고 아부하고 집착하고 참견하고 외로운 사람인 척, 아무것도 잘하지 못하는 모자란 사람인 척하고 붙들고 살았던 건 아니었을까.


꽤 젊었을 때 빈둥지증후군(empty nest syndrome)이란 말을 들었다. 그때만 해도 딸들이 자라 독립해서 집을 떠나면 슬픔과 외로움, 상실감을 격하게 겪을 거라고, 빈둥지증후군 환자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그런데 웬걸. 아기 새들은 이제 어른 새가 되어도 둥지를 떠나지 않는다. 집을 떠나지 못한다. 몸이 커지고 생각이 넓어져 둥지가 비좁아져도 새 둥지를 구할 수가 없어서 엄마 새 곁에서 한데 뭉쳐 같이 산다. 둥지를 떠날 수 없고 독립도 할 수가 없어 엄마에게 빈둥지증후군을 앓을 기회조차 주지않는다.


육십갑자 한 바퀴가 다 되어가는 우리 또래 엄마들은 빈둥지증후군조차 느낄 수 없이 캥거루족 자식을 껴안고 성인 육아의 덫에 걸려 있다. 다 큰 자식을 애잔하게 가슴에 품고 한집에 담기어 밥을 해먹이며, 받아먹으며 살고 있다. 어쩌면 딸들이 모이를 가져다 엄마를 먹이는 것일 수도 있겠다.


딸들은 연애도 결혼도 독립도 하고 싶거나, 하지 않고 싶거나, 못하거나, 안 했다. 딸 대신 종종 내가 떠나거나 독립을 했다. 밥먹듯이 가출하는 엄마가 된 것이, 독립하지 않는 딸이 되어 사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었다. 불행했다거나 슬픈 일도 물론 아니다.


아무 데도 안 나가고 성실하게 사는 딸 대신 독립을 외치면서 엄마가 집을 나가 생활했다. 딸을 키웠으니 나도 커야겠다고 흔들흔들 걸어 다녔다. 그 세월이 10년이 넘었다. 남들은 멋지게 여행생활자가 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 이름 있는 자가 돼가는데 민망하고 면구쩍게 ‘가출생활자’로 살았다. 딸들은 훌륭한 단독자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이 충분한 독립가능자로 자라났다. 그런데 왜 90년대생 딸들이 ‘독립불(가)능자’가 되었을까. 나는 돌아와 더 이상 가출할 필요가 없게 되었는데 왜 딸들은 독립할 수 없게 되었나.


성실하게 살았으나 부자가 되지 못한 엄마는 집을 구해줄 수가 없다. 아무리 개미처럼 돈을 벌어도 딸들은 집을 살 수 없다. 혼자는 살 수 없게 저 바깥세상은 위험하고 험악하다. 좋은 사람을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려 해도 나쁜 사람이 너무 많아 관계 맺기도 꺼려진다. 곳곳이 허방이고 지뢰인 세상으로 밀어낼 수가 없다. 마음을 열고 넓고 깊게 사람을 만나려 해도 세상의 나쁜 일이 운 좋게 피해갈지 알 수가 없다. 성큼성큼 뚜벅뚜벅 무언가 되는 길로 걸어온 발걸음 앞에 놓인 선택지가 좁고 가파른 낭떠러지 같아 지금은 멈출 수밖에.


그래서 우리는 두리번거리며 한집에서 서로를 키우고 돌보고 있다. 딸들은 내게 책을 사주고 인터넷 강의를 열어주고 학점을 따게 한다. 끊어진 경력을 잇게 하고 멈춘 연금을 새로 열어 그 돈을 붓고 있다. 어엿한 예술인 아니냐며 예술인카드를 만들어주고 글을 쓸 수 있도록 작업실을 얻어준다. 끊어진 경력, 끊긴 돈, 끊어진 인간관계를 딸들이 잇는다. 깁는다. 메운다. 딸들 덕분에 나는 이어지고 기워지고 때워져서, 이 세상의 한 사람의 몫을 해내게 만든다. 나는 그냥, 이대로 사라져도, 뒷마무리는 걱정할 게 없어졌다. 집에서도 출가한 것처럼 나는 살 수 있고 집에 살면서도 딸들은 이미 독립을 이룩했을 수도 있겠다.



가출생활자_brunch_b.jpg 가출생활자와 독립불능자의 동거 라이프 _ 권혁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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