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대 연봉을 꿈꾸다 전세난민이 되다

어쩌다 전세난민이 되다

by 그래도봄




15년 전 그 날 그 집 앞엔 하얀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불광동의 다세대 연립! 내 돈으로 산 내 첫집이었다! 재테크에 밝은 친구를 따라 한번 보기나 하자며 갔던 그곳, 허름한 연립들이 들어선 동네, 그 집 앞을 지나는 골목이 벚꽃으로 뒤덮여 하얀 융단이 깔린 듯 그렇게 아름답지만 않았어도 계약하지 않았을 집, 그 골목에 홀리듯 이끌려 덜컥 계약을 했다.


은행에 돈 1억을 가만히 두면 뭐 하냐며 말이다. 내 첫 집이 된 그 작은 연립은 먹고살기 바쁜 고단한 삶 속에 가물가물 잊혔다 되살아났다 하며 근 10년의 세월을 함께했다. 그리고 세월에 힘입어 재개발 조합 결성, 이주, 철거, 착공, 동호수 추첨, 모델하우스 관람 등의 단계를 밟아 멋들어진 ‘○○캐슬’이 되었다.


그 집을 사면서 처음 해본 일들이 많았다. 처음으로 조합 결성이 되는 과정을 지켜봤고 이주비라는 걸 받았고, 생애 처음으로 대출이란 걸 받았고, 동호수 추첨이란 걸 해봤고, 내 집의 모델하우스를 구경했고, 시공 후 하자 점검을 하러 갔고, 첫 세입자를 받았다.


재테크에 무지몽매했던 내가 연봉 1억이라는 위태로운 꿈을 꾸며 대롱대롱 줄을 타느라 매일 숨 쉴 틈 없이 바쁘다는 이유로, 대출이 내 발목을 잡는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팔아넘기지만 않았다면 지금은 든든한 내 백이 되었을 내 보금자리...(흑흑흑. 지금도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에 잠을 설친다).


“이 집이 지금보다 더 오를 거라고 생각하세요?”

집을 사러 온 아저씨에게 내가 물었을 때 그 분의 입가에 어렸던 희미한 미소를 나는 기억한다. 아저씨는 속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뭐 이렇게 멍청한 여자가 다 있나....’


그 집은 지금 내가 팔았던 금액의 2배도 훨씬 넘게 올랐다. 이제는 감히 내가 넘볼 수도 없는 왕궁, 말 그대로 ‘캐슬’이 되어버린 것이다. 돈은 일을 열심히 해서 버는 것이라 배웠고 그렇게 믿고 밤잠, 아침잠, 수명까지 줄여가며 오로지 노동해서 돈 벌기에만 매달렸던 나는 20년 동안 열심히 일만 한 결과 번아웃이 돼 짜증과 분노에 차 당분간은 일이라는 게 하고 싶지 않은 백수에, 전세난민이 됐다.


“너 ○○이 알지? 걔 연희동에 3층짜리 집 지었더라. 잔디밭이 쫙 깔린 게 너무 좋아. 외곽도 아니고 서울 한복판에 그런 집이라니... 진짜 부러워.”

친구가 그 말을 했을 때, 내 기분은 부러운 게 다 뭔가, 말 그대로 멘탈이 낱낱이 부서져 너덜너덜 산화하는 것만 같았다. 막내 작가를 1년쯤 하다가 자기 적성은 아니라며 그만두고 부동산 재테크에 올인, 열과 성을 다한 후배는 지금 연희동에 잔디밭까지 깔린 대궐 같은 3층 집을 갖게 됐다는 이야기에 급 현타가 왔다. 지금까지 난 뭘 한 것인가... 내 몫이었던 ‘캐슬’조차 지키지 못하고 새벽부터 밤까지 몸을 갈아넣으며 대체 무슨 바보짓을 한 건가. 나 같은 멍청이가 또 어디 있을까. 후회와 절망 속에서 과거의 내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일을 여러 개 하느라 늘 스트레스를 받았던 나는 분초를 쪼개서 틈만 나면 쇼핑을 했다. 나갈 시간이 없으면 온라인 쇼핑을, 시간이 있으면 오프라인 쇼핑을 닥치는 대로 해댔다. 물건을 사면 순간의 만족감으로 잠시 잠깐 육체적·정신적 피로를 잊었다.

어깨통증과 만성두통, 분노와 짜증이 결합해 번아웃으로 찾아왔다. 더 이상은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처음으로 집에서 종일 밥해 먹고 청소하고 빨래하면서 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집 안을 구석구석 살피니 어이가 없었다.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집 안 가득 쌓인 정체조차 알 수 없거나 왜 이렇게 많이 사두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물건 더미들 때문이었다.


대체 뭐 하려고 락스는 이렇게나 많이 산 것일까, 샴푸는, 트리트먼트는, 습기제거제는, (참치, 황도, 꽁치, 골뱅이) 통조림은... 왜 이렇게 몇 박스씩 쌓여 있는 것인가. 냉장고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냉동식품이 가득 차 있는 냉장고, 옷방에는 언제 샀는지 알 수 없는 상표도 떼지 않은 옷들로 가득 차있고, 벨트, 모자, 스카프, 하다못해 수면양말까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귀신이라도 들렸던 건가? 왜 이렇게 많이 산 걸까? 뭐 하려고? 1년 가까이 통조림과 반조리 식품들과 냉동실의 음식들을 정리하고 먹으면서 나는 가끔 죽을 때까지도 이걸 다 먹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아찔함을 느꼈다.


더 잘 먹고 더 잘 살기 위해 현재의 자신을 학대하며 노동하고 먹으며 다람쥐 쳇바퀴를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게 인간이라더니, 내가 딱 그랬다. 돈 벌겠다며 돈을 좇느라 정작 중요한 건강도 잃고, 일에 대한 열정도 잃고, 집도 잃고, 그토록 쫓아다녔던 돈까지 잃어버린 지금 나는 생각한다.


‘뭣이 중한디? 정신 똑디 챙기고 살아라. 제발~.’



브런치_도서배너-001.png 이러다 벼락부자가 될지도 몰라 _ 지해랑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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