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맘을 위한 슬기로운 노산생활
“헉. 두 줄이네.”
임신을 확인한 순간, 기쁨과 함께 고민이 시작됐다. ‘이 나이에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부터 시작된 걱정은 경력 단절로까지 이어졌다. 지금껏 어떻게 지켜온 커리어였던가. 아이를 낳을 때마다 직장에서 먹었던 눈칫밥도 떠올랐다. 큰아이를 낳았던 2008년만 해도 출산휴가는 당연한 권리가 아니었다. 법으로 보장돼 있었다 해도 당당히 쓰는 사람은 드물었다. 3개월간의 무급 휴가를 마치고 복직하던 날, 사무실에 들어서며 나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어깨를 펴기 위해 애쓰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배 속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우리 부부의 나이를 계산해봤다. 나는 쉰, 남편은 쉰다섯이다. 아무리 평균 출산 연령이 늦어졌다 해도 오십이 넘은 신입생 학부모는 흔치 않을 것이 분명하다. 가만있어 보자, 아이가 성인이 되면 환갑을 훌쩍 넘기게 된다. 남편과 손가락을 꼽으며 나이를 계산하다가 “막내 결혼식은 보고 죽을 수 있을까” 하며 쓰게 웃었다.
임신과 출산에서 나이, 특히 여성의 나이는 중요하다. 만 35세를 넘은 여성은 의학적으로 ‘고령 산모군’에 속한다. 고령 산모는 그렇지 않은 임산부에 비해 더 많은 검사와 주의를 필요로 한다. 아무리 세 번째라 해도 40대 출산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임신테스터기의 두 줄을 확인한 이상 하루 빨리 병원을 찾아야 했다. 초음파를 통해 태아가 자궁 안에 제대로 착상됐는지 확인하고 주수도 체크해야 했다.
문제는 보험이었다. 당시 우리 네 식구는 미국 샌디에이고에 살고 있었다. 남편과 내가 각각 연구교수와 연구원 신분으로 미국 UCSD(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 대학에서 해외 연수 기회를 얻어 두 딸과 함께 타향살이 중인 터였다. 보통 우리처럼 2년 이내로 해외 연수를 가는 경우 떠나기 전에 국내에서 여행자보험을 드는데, 보장 범위가 넓지 않다. 특히 비보험진료 과목인 산부인과와 치과는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치과는 그렇다 치고, 산부인과에 갈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산부인과 진료를 보기 위해 보험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첫 단추부터 쉽지 않았다. 가뜩이나 언어도 자유롭지 않은 데다 보험 제도가 우리와 달라 무척 애를 먹었다. 미국은 공적의료보험체계인 우리나라와 달리 민간의료보험이 주를 이룬다. 즉, 국가에서 보험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직장 혹은 기관이 제공하는 의료보험에 개별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특히 미국의 의료비는 무척 고가라 병원에서는 보험의 종류에 따라 진료가 가능하기도 하고 불가능하기도 하다. 만일 환자가 보험을 가입하지 않았거나 보장 범위가 낮은 보험일 경우 병원은 진료를 거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의료보험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꼽는 이유를 절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보험에 가입하고 다시는 찾을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산부인과 진료실을 방문하던 날, 그 설레면서도 불안했던 기분이 지금도 생생하다. 미국 산부인과는 환자가 진료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의사 선생님이 회진을 돈다. 환자가 진료실 앞 대기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다 들어가는 우리나라와는 반대다. 아마 의사 한 명이 맡는 환자 수가 적기 때문에 가능한 시스템이 아닌가 싶다. 우리처럼 의사 한 명이 수많은 환자를 진료하는 환경에서는 불가능한 방식이다.
주치의는 50대쯤으로 보이는 백인 여자 선생님이었다. 금발에 안경을 쓰고 키가 큰 선생님은 초음파로 태아의 심장 소리를 들려주며 물었다.
“혹시 다른 자녀가 있나요?”
“네, 열한 살, 일곱 살 두 딸이 있어요.”
“언니들이 동생을 잘 돌봐주겠네요. 임신이에요. 축하합니다.”
진료를 마치고 병원 문을 나서며 우리 부부는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일단 나이는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출산일까지 최선을 다해 건강을 유지하며 배 속의 아이를 잘 키워보자 다짐했다. 4월의 샌디에이고는 눈이 부시도록 푸르렀다. 초음파로 아기집을 확인하고 나니 새삼 우리에게 찾아온 셋째가 실감됐다. 무탈하게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키워야 할지, 일은 계속할 수 있을지, 밀려오는 걱정들은 일단 제쳐두기로 했다. 이왕 벌어진 일, 어쩌겠는가? 어떻게든 되겠지. 우선 몸부터 잘 추스르는 게 가장 중요했다.
아침부터 외출을 했더니 시장기가 몰려왔다. 일단 가까운 햄버거 집으로 향했다. 미국에서도 서부 지역에만 있는 인앤아웃이라는 이름의 햄버거 집은 저렴한 가격에 썩 괜찮은 퀄리티를 자랑한다. 특히 메뉴판에 없는 애니멀 프라이(animal fries)가 일품인데, 감자튀김 위에 치즈를 잔뜩 올려주는 이 음식은 아는 사람만 시킬 수 있는 이른바 시크릿 메뉴다. 우리는 주문한 버거와 콜라를 먹으며, 아직 새끼 손톱만 할 크기의 셋째는 남자아이일지 여자아이일지, 어떻게 생긴 녀석일지 수다를 떨었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에 가득하던 걱정들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마치 염려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는 듯 입안에 버거를 욱여넣은 채 실실 웃어댔다. 이번에는 어떤 아이가 우리에게 올까, 사뭇 기대감이 솟았다. 이번엔 남편을 닮은 씩씩한 아들이면 좋겠는데. 아니면 또 어떠리.
식사를 마치고 약국으로 가 엽산을 샀다. 미리 먹었어야 했는데, 계획하지 않은 임신인 탓에 준비하지 못한 것이 못내 걱정스러웠다. 진열대 위 수많은 영양제 중 성분과 함량을 꼼꼼히 따져 한 병을 골라 값을 치른 후 물과 함께 꿀떡 삼키며 생각했다. 긴 인생, 조금 늦고 이르고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냐고. 누가 또 아나, 아이 덕에 더 젊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게될지. 그래, 한번 해보기로 결심했다. 닥치지 않은 미래의 일까지 미리 걱정하지 말기로. 우리 가족에게 뒤늦게 합류한 이 아이와 함께할 행복만 생각하기로.
긴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