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말 듣고 하는 연애, 남의 말 듣고 산 주식이 잘될 수 없는 이유
“너 진짜 그때 너무 멋졌어. 내 평생에 여자사람 친구가 그렇게 멋져 보이기는 처음이야.”
작가 생활 초창기 함께 일하며 친하게 지냈던 전 직장 동료와 오랜만에 만났을 때 불쑥 그가 말했다. 대체 뭐가 멋졌다는 거야? 내가 언제 이 남자에게 그렇게 멋지게 보였을까? 초롱초롱 기대에 차 눈을 빛내며 바라보는 나에게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우리 다 사회 초년병 시절에 처음 증권 계좌 만들었을 때, 너랑 나랑 ○○이랑 셋이 여의도 미래에셋증권에 갔잖아. 그때 네가 천만 원을 수표로 뽑아와서 직원한테 딱 내미는데 나 진짜 한눈에 반했잖아. 천만 원을 딱 꺼내면서 주식 계좌 만들어달라는 너한테서 빛이 나더라니까.”
헛! 녀석도 참, 반할 것도 없었나 보다. 기똥차게 예쁜 드레스를 입은 모습도 아니고 똑부러지게 일 잘하는 모습도 아니고 멋드러지게 요리하는 모습도 아니고 증권 계좌 창구에 천만 원을 내밀면서 증권 통장 하나 만들어달라고 한 게 뭐 그리 멋있을 일이라고 그럴까.
그가 지금 밤마다 천장에 주식봉을 그리고 있는 내 모습을 본다면 더더더더 멋있다고 해주려나? (설마 그럴 리가. 당시 우리는 어렸고, 사회 초년병 시절 천만 원이면 정말 큰돈이었다. 나한테도 전 재산이었으니까.) 그렇게 멋있는 명장면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내가 돈에 대해 참으로 무지했었기에 가능했다. 돈에 대해 무지하기가 갓 태어난 아이와 같은 상태였다고나 할까. 은행 수수료 몇백 원은 아까워 미치면서 큰돈에 있어서는 무감각했다. 솔직히 개념이 없었다. 그냥 남들이 차이나펀드가 좋다고 하니까, 단순 무지한 마음으로 그냥 통장에 있는 돈을 전부 다 뽑아온 거였다.
자본주의 정신에 입각해 돈을 움직이고, 돈이 돈을 벌게 하겠다는 창대한 꿈을 품고 주식 공부를 하기 시작했을 때 엉뚱하게도 그 친구 생각이 났다. 그때 내가 그 멋진 모습을 시작으로 꾸준히 돈에 대해 공부하고 투자 생활을 유지했다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지금처럼 매매 타이밍도 못 잡고 바보짓을 연속적으로 되풀이하며 뒤늦게 유튜브와 주식 카페들을 들락거리며 주린이 탈출을 모색하고 있지는 않을텐데.
주식 투자를 결심하고 십수년 전 처음 열어둔 주식 계좌의 먼지를 털어내 최신 버전 HTS를 노트북에 깔고 컴퓨터로 주식을 사고팔면서 처음에는 기대에 찼고 다음 순간에는 설렜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하고 불안했고 나중엔 무서워졌다. 공부깨나 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주식에서 돈을 번다는 것은 공부뿐만 아니라 다른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맞아떨어져야 가능한 아주 특별한 일이란 걸 알아간다.
주식에 열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나는 신기한 깨달음들을 얻고 있다. 그 하나는 머리와 몸은 결코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머리가 시킨다고 눈과 손이 곧이곧대로 말을 듣는 게 아니다. 어느 유명 작가는 소설을 쓸 때 자신의 머리가 아닌 하늘에서 글이 내려와 손이 저절로 작품을 써 내려간다고 했는데, 나의 머리와 손 역시 하늘에서 내린 지령을 받아 이렇게 생각한 바와 다르게 움직이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피아노를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손은 절대 머리의 결정을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
저녁마다 주식 차트를 보고 재무 상태와 영업 이익을 체크하고 외국인과 기관과 사모펀드와 슈퍼 개미들이 뭘 샀나 보며, 종목에 대한 공부를 하고 딱 맘에 드는 몇 개를 골라 ‘내일 사야지’ 하고 마음을 정한다고 해서, 다음 날 내 손이 머리의 명령에 따라 계획한 대로 그 주식을 사는 게 절대 아니다. 내 지인들도 유사한 경험을 했다고 하니, 나만 이상해서 그런 건 아니라고 믿는다.
아침에 눈을 뜨고 주식 매매 창을 열면 어젯밤에 했던 굳은 결심은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빠르게 오르고 내리는 호가창에 홀린 내 눈과 손은 어느 순간 다른 종목을 사고 있다. 그것도 사자마자 어마어마한 내리막길을 걷게 될 주식을 말이다.
처음엔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아니 분명히 어젯밤에는 A 기업을 사려고 했는데 왜 엉뚱하게 F 기업의 주식을 사는가 말이다. 귀신이 아니라면 컴퓨터에서 무슨 무의식을 자극하는 전파라도 흘러서 나를 자기네 마음대로 조정이라도 하는 건가? 이런 행동 패턴을 몇 차례 반복하며 손실이라는 쓴맛을 원없이 보다가 나는 깨달았다.
‘대학 시절 연애할 때 하던 짓을 주식 시장에서 똑같이 하고 있구나.’
그 시절, 말하자면 연애 초보 시절 나는 남들이 ‘멋지다’, ‘좋다’ 하는 남자들만 좋아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관심이 없다가도 사람들이 좋다고 하면 덩달아 그 사람이 좋아지는 것이다. 나와 가치관이 맞는지, 성격이 맞는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남들이 좋다니까 그냥 좋아하게 되면, 커플이 돼도 또 커플이 안 돼도 결과는 좋지 않다. 그는 나와는 맞지 않는 그냥 인기 많은 남자였을 뿐이므로 끝까지 잘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생각해보면 주식도 마찬가지다. 아침에 호가창을 열면 눈은 인기가 많아 벌겋게 불타오르며 길게 장대봉을 세운 주식들을 쫓기 일쑤고 그런 주식들을 보다 보면 당장 내가 그 종목에 적극적으로 들이대지 않으면 녀석이 더 멀리 달아나 나 아닌 남 좋은 일을 시킬 것 같은 초조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초조 불안에 휩싸여 10퍼센트, 20퍼센트 넘게 인기 상종가를 구가하는 종목을 계좌 안으로 모셔 오고 나면, 인기가 많아 한껏 건방져진 녀석은 온갖 허세를 다 부리다 ‘맛 좀 봐라’ 하는 식으로 쓴맛을 잔뜩 보여준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사실을 주식 시장에서 수차례 체험했다. 추락하는 날개는 그러모아 잡아 올릴 수도 없을 만큼 날카롭고 무섭게 지하를 뚫고 처박힌다.
처음엔 종목들이 남자친구라도 되는 듯 애증의 감정에 휩싸였다. 진심으로 미웠다. 그러다 알게 됐다. 연애에도 때가 있듯 주식에도 매매 타이밍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아는 한 친구는 스타일도 별로, 직장도 별로인, 남들 눈에는 별 볼 일 없어 보였던 짝을 일찍이 알아보고 그가 제대로 자리를 잡고 미래가 창창한 멋진 사람이 될 때까지 곁을 지켜 지금은 누가 보기에도 부러워할 예쁜 부부로 아름답게 산다. 남들은 볼 수 없었던 그가 가진 잠재력과 가능성을 일찍이 알아본 덕이다.
또 다른 친구는 콧대 높게 독신주의를 고수하던 인기 많은 한남자를 10년 넘게 짝사랑하다 그가 잠시 병에 걸려 아프고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아 외로울 때 그를 돌봐주다 눈이 맞아 예쁜 가정을 꾸렸다. 남들이 가치 없다 등 돌릴 때, 믿어주는 것. 그것만큼 큰 가치를 만드는 일은 없다.
주린이가 주식을 해보니 주식 역시 그렇다. 좋은 주식일수록 때를 기다리고 언제 들이대야 할지를 알아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고, 아무도 관심 두지 않을 때 투자하고 지켜봐야 큰 열매를 맺는다. 또 사고 싶지만 늘 고공행진만 하며 절대 떨어질 것 같지않은 우량주식도 어느 순간 사람들의 외면을 받고 나락으로 떨어질 때가 반드시 있고, 그 순간 믿고 지하에 떨어진 그 기업과 동행하는 자만이 그 주식이 다시 날아오를 때 달달한 수익이란 열매를 함께 얻을 수 있다.
어쩌면 연애 밀당보다 더 어려운 것이 주식 매매 타이밍 같다. 하지만 관심을 두고 알아가며 때를 기다리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