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현영이의 커밍아웃
그해 시월 하순 경이었던 것 같다. 반짝 반짝 귀티 나 보이는 현영이가 엄마가 선생님을 뵙고 싶다고 언제쯤 시간이 괜찮으시냐고 물었다. 약속일을 잡고 고1 학생을 둔 엄마치고는 좀은 젊어 보이는 현영 엄마를 마주하고 앉았다.
고등학교는 1학년 때부터 학생과 학부모님들 모두 대입이 초미의 관심사다.
“ 현영이가 인서울이 목표라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요. 인서울 가기만 가라.. 고 했어요” 하고 웃으시면서 현영어머니는 덧붙이신다.
“ 현영이는 어려서부터 가르치는 것 좋아했어요. 초등학교 저학년서부터 친척들 모임이면 애가 어디론가 없어져 찾아보면 구석 방에다 어린 친척 동생들을 모아놓고 무얼 가르치는 걸 잘하더라고요. 가만 보면 너무 또박또박 잘 가르치는 거에요~”
현영 엄마는 현영이가 교사가 되길 희망하시며 “ 제가 그랬죠. 너는 무조건 교사가 돼라... 너는 그렇게 하면 빛이다. 그게 빛나는 길이라고 말했어요..” ‘빛난다’고 말하시는 현영 엄마의 눈에 먼 미래 교사가 된 현영이가 보이는 듯 눈빛이 아련하고 뿌듯함으로 빛났다.
드라마틱한 반전이 일어나지 않으면 고등학교는 1학년 1학기 시험이 끝나면 학생이 갈 대학 수준이 대략 가늠된다. 1학년 지나고 드라마틱한 반전이 일어나는 경우는 내가 겪은 바에는 거의 없다. 나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너무도 난감했다. 현영이에게는 4년제 ‘인서울’도 어렵고 현영어머니의 ‘빛나는’ 교대나 사대는 더더구나 힘든 수준이었다.
현영이와 관련하여 내게 너무도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와 배제’...
교사는 적어도 안 그런 척이라도 해야 한다. 나는 그 ‘척’도 하지 않은 부주의를 저질렀다.
수업 시간에 나는 “짱개가 싫다” 라는 말을 나도 모르게 여러 번 했던 것 같다. 굳이 변명하자면 나는 중국이 두려웠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더 커지면 우리나라를 먹어버릴 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이 내게 있었던 것 같다.
학생들 수행평가 발표 시간이었다.
‘인권과 더 나은 사회’가 주제였다. 현영이 차례가 왔다. 현영이는 ‘우리사회의 인권차별 현장 사례’ 였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 엄마는 연변 출신입니다. 나도 어렸을 적 연변에서 자랐습니다. 우리 선생님도 자주 ‘짱개’라는 말을 하시는 데... 우리 엄마는 짱개로서 너무나도 많은 차별과 무시를 겪으셨고 저는 우리 엄마가 겪은 아픈 차별의 사례를 나누고 싶습니다....
현영이 발표를 들으며 나는 부끄럽고 미안해 온몸이 불덩이 같았다. 도저히 더 듣고만 있을 수 없어 일단 발표를 중단시키고 현영이에게 사과부터 했다.
미안하다. 현영아. 선생님이 정말 잘못 했다. 현영이에게 뭐라고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미안하다..
허겁지겁 중언부언 사과했던 것 같다. 현영이는 천진하고 밝게 웃었다. 선생님에게 아무런 의도 없이 주제에 맞게 발표 준비했다고.. 맑고 깨끗한 미소로 나를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해 주었다.
다시 발표는 이어지고 처음으로 엄마가 연변 출신이라고 커밍아웃(?)한 현영이에게 우리 반 학생들은 뜨겁게 박수로 화답했다.
맞은편에 앉은 현영 엄마를 보며 나는 학생에게 많이 들어 마치 현영어머니를 잘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현영이 말로는 고1 들어오면서 엄마가 아빠랑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고 했다. 알고 보니 초등학교 때 이혼하셨지만 엄마가 일하느라 나가계신 줄 알았지 전혀 그런 줄 몰랐다고 했다.
대부분의 학생이 성적과 상관없이 학원에 다닌다. 고등학생쯤 되면 국·영·수 3과목 정도 들으면 최소 한 달 백만 원에서 백오십만 원이다. 중학교 동생까지 있으면 부모님들 정말 허리 휜다. 학원비 대려고 투잡 쓰리잡 뛰시는 부모님들, 학원 보내지 않으면 부모 노릇 못한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죽을 둥 살 둥 학원비 뒷바라지 하는 부모님들 보면 애처롭고 뭉클하다.
현영이네는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현영이가 지출하는 학원비는 거의 백만 원에 육박하고 있었다. 이 학원비는 누가 대는 거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감당하시며 학원비 외에도 간식비 포함 용돈도 엄마가 다 주는 거라고 했다. 삼십만 원이었던가 그 당시 느낌으로 꽤 후한 돈이었다. 현영이가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다른 곳으로 이사하셨지만,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 현영이 다니는 학교 근처를 떠나지 않고 아이 주변을 늘 맴돌며 자녀 뒷바라지를 손발이 닳도록 하고 계신 거였다.
현영 엄마는 카톨릭 고백성사하듯이 내게 자기 인생을 이야기하셨다. 연변에서도 고생많았으며 어려서 결혼했다. 아이가 어렸을 적부터 이혼했다. 아이를 데리고 나오고 싶었지만 아이 할머니가 아이 데려가려면 나를 죽이고 가라고 덤비는 통에 도저히 감당이 안되었다. 이혼하고 죽도록 일했다. 죽도록 일해 나는 살았지만 아이는 나이 든 아버지와 할머니 아래 이렇게 돼버리고 말았다고 깊이 자책하셨다.
꿈결처럼 선물처럼 온 현영이를 죽어도 포기 못 하는 할머니와 모질지 못한 어린 엄마, 둘 다 너무도 가여웠다..
애는 가라니까 학원 가고 주니까 받았겠지만, 그 돈이 아이곁을 떠나지 않고 ‘죽도록’ 일해
모아 바친 현영 엄마의 피였던 것이다.
“ 저어.. 어머님.. ‘인서울’은 꼭 4년제만 하란 법 없고요.. 필드 좋지 않은 4년제 나와서 취업 안되는 것보다는 ‘인서울’ 전문대도 좋구요. 우리 학교에서 교통편 좋은 수도권 전문대도 좋아요. 취업 잘되는 학과도 많고요. 4년제 인서울도 머 하기에 따라서는.... ”
알고보니 현영어머니는 4년제 대학, 전문대, 인서울의 낱말 뜻을 모르셨다. 나는 간단 용어 정리부터 대입시에 관해 간결하게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드렸다.
어떤 부형님들은 교사에게 깊은 체념과 좌절감으로 몸부림치게 한다. 이런 부형들을 대하고 나면 저잣거리에 나앉아도 다시는 이 짓을 하고 싶지 않은 수렁 같은 정체성 상실감에 한동안 너덜너덜해지곤 한다.
현영엄마와 나, 우리는 물 흐르듯 이야기했다. 굽이진 인생 굴곡에 대해, 쉽지만은 않은 입시에 대해 오랜 친구처럼 이야기했다. 서로가 서로의 가치에 대해 흔들림 없는 존중과 확신을 가지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현영엄마의 마음을 다해 사는 자세,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사랑의 자세에 마음으로 고개 숙였다. 현영 엄마와의 만남은 오랫동안 내 머리에 남아 나를 정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