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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양수다인 Sep 05. 2024

3대 멸치니?

나는 모든 것이 숫자화 된 사회가 무섭다


내가 헬스장이라는 곳과 인연을 맺은 지도 거의 10년이 됐다.  그 사이 나도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국내 피트니스 문화도 상당한 변화와 유행들이 피고 지었다.

그중 하나가 아마 "3대 운동"이다. 웨이트 운동에 관심이 있어서 유튜브에서 관련 콘텐츠를

시청해 본 사람이라면 아마 3대 운동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거다.


바벨 (백) 스쾃(Babel Back Squat),

(플랫) 벤치프레스(Plat Benchpress)

그리고 (컨벤셔널) 데드리프트(Conventional Deadlift)

 

미국에서는 이들을 3대 운동을 SBD라고도 하고 한국에서는 스벤데라고도 한다.

그래, 3대 운동 일명 SBD, 스벤데 참 좋은 운동이다. 그런데 이게 여기에서 그치지 않다.

'3대 운동'이라는 용어는 다시 '3대 500' 혹은 '3대 몇?'이라는 것과 연결된다.

이 SBD를 총 수행할 수 있는 자신의 수행 퍼포먼스 즉 들 수 있는(lifting) 무게의

총 도합이 500인지 여부를 따라서 급을 나눈다. 그래서 몇 년 전에는 이 3대 운동이나

3대 500이 무슨 유행처럼 번졌고 그 후로 헬스장에 이 3대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고 자신의 1RM(Repetition Maximum)을 갱신하기 위하여

혹은 측정하려는 사람들을 헬스장에서 보는 것도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모든 것에는 유행이 있듯이 광풍이었던 이 3대 운동 역시 지금은 약간 그

위세가 줄어든 것 같다. 여전히  벤치프레스, 바벨스쿼트와 컨벤셔널데드리프트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래도 몇 년 전보다는 3대 운동에 대한 광란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린 듯한 느낌이다.  심지어 나 역시도 예전에 비하면 이 3대 운동에

대한 빈도가 좀 줄어들기는 하였으니까.  


3대 운동은 좋은 운동이다. 특정 부위의 근육을 성장시키는 약간은 기형적인

body movement라고 생각하는 웨이트 리프트 일명 헬스는 생각해 보면

건강이나 체력과는 별 상관이 없다. 오히려 특정 근육을 타켓팅하는 그 행위는

짧은 시간 동안 해당 근육에게 스트레스를 집중적으로 투여함으로써 해당

부위의 손상을 악화시키는 행동이니. 그러한 의미로 전신에 자극을 줄 수 있을만한

스쾃나 데드리프트 등의 운동은 - 벤치프레스는 제외 하더라도 - 꽤 좋은 무브먼트다.


그렇지만 나는 이 3대 운동이 다소 폭력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3대 운동과 연결된 또 다른 용어, 즉 3대 500이라는 그 용어에서 그 폭력적 면모를 느끼곤 한다.

500kg이라는 수치는 퍼포머(performer)의 운동 수행 능력이나 현재 레벨을 정량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척도이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숫자로 표현되는 정량적인 기준은

부정적인 면모를 가질 수 있다. 특히 구체적인 숫자와 결합되면 그건 일종의 자기 과시 혹은

허영이 될 수 있다. 나는 3대 500이 넘는데 만약 3대 500을 넘기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 500은 트로피이자 남과 나를 경계 짓는 무서운 벽이 될 수도 있다.


근데 그 500이라는 숫자 기준(barometer)에는 다시 말하자면 정량적(quantitative) 기준에는

그 결과에 대한 어떠한 질적(qualitative) 정보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건 굳이 3대 500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숫자로 표현된, 정량적인, 계량적인 모든 정보는 이 비판으로부터

전혀 자유로울 수 없다.

심지어 "지금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는 설문항목에

'매우 불행하다', '불행하다', '그저 그렇다', '행복하다', '매우 행복하다'의 응답항목을 제시하여

표기하도록 한 후에 리커트 척도(Likert scale)로 매우 불행한 걸 0으로 해서 매우 행복하다는

응답을 4로 표기한들, 매우 불행한 상황이 매우 행복한 것보다 4배 이상 혹은 5배 이상 행복하다는

걸 의미하는지 아닌지 도저히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3대 500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냥 저 사람이 SBD를 총 500kg 이상을 들 수 있다는 거지

그 사람이 얼마나 각 무브먼트를 얼마나 완벽하고 깔끔하게 교과서적으로 수행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하여 현재의 시각적 결과 혹은 다른 순차적인(sequential) 차원들에 뭐가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냥 3대 500은 숫자일 뿐이다.

 

3대 운동이나 3대 500은 그저 한국에서 지난 10년 동안 급격하게 발전하게 된 피트니스

문화에서 발생한 화두가 된 키워드 혹은 하나의 하위문화로서 그냥 유쾌하게 넘어갈 수

있을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별로 없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3대 500이라는 걸

들으면 가끔 머리가 아플 때가 있다. 한국 아니 점점 더 현대 사회가 숫자에 미쳐 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숫자화 된

열병을 이제 하다 하다 헬스 문화에서도 봐야 한다니 어쩔 때는 속이 울렁거릴 때가 있다.


숫자는 인류가 만들어낸 인공물이지만 이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오히려 숫자의 노예가 되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숫자로 표기된 시계로 지금이 몇 시인지 시간을 가늠하고

출근을 하기 위해 당장 일어나던 혹은 아직 출근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될 시간인지를 파악한다.

그리고는 또다시 숫자로 표시된 오늘의 날씨 혹은 예상 기온을 보면서

'아~ 오늘의 기온은 이 정도이니 오늘 옷은 두껍게 혹은 가볍게 입어야겠군'

을 결정한다.

그렇게 출근을 해서 일을 하다 점심시간이 되면 우리는 도 다시 숫자의 노예라는 걸 확인하게 된다.

내 주린 배를 채워주기 위해 내가 선택할 것들의 값어치는 간단하게 숫자로 표현된다.

칼국수 9,000원, 보쌈 정식 13,000원, 맘스터치 버거 세트 7,600원 등등.

그러다가 숫자로 표현된 시간을 보고서 퇴근을 하고 인스타그램에 올린 나의 포스팅을 보고

'오늘은 내가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주목을 받고 관심을 얻었구나'를 짐작하고,

한 달에 한 번은 급여 통장에 찍힌 급여 숫자를 보면서

'아~ 내 한 달짜리 가치는 이 정도의 수치로 치환될 수 있구나'라는 걸 인식하게 되며,

저울 위 숫자로 표현된 지구의 중력 작용에 의한 나의 물리적 몸무게를 기준으로

내가 날씬하니 뚱뚱하니 이 정도면 봐줄만하니 확찐자가 되었느니를 판단한다.

그렇게 현대사회의 우리 모두는 숫자와 함께 살고 있고 숫자에 노예가 되듯이 살고 있다.


이렇게 일상의 모든 것이 숫자화 되면서 숫자의 노예가 되어가는 데 지난 10년 동안

숫자의 침공은 이제 하다 하다 피트니스 문화에도 침투하였고 3대 500이라는

정량적 기준이 우리를 옥죄었고 나와 남을 가르는 척도가 되었다.


푸코(Michel Foucault)는 "Governmentality"에서 현대 정부들이 권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숫자로 구성된 객관적 측정 방법을 발명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숫자를 통하여 타인의 제재나 통제에

순종할 여지가 높아졌으며  자기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순응할 줄 아는

"자기 이해(self-knowledge)"나 "자기 규제(self-regulation)"가 가능해졌다.

숫자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주제를 알고 깝죽거리지 말 것을 경고하는 수단이다.


숫자의 힘을 믿는 사람들, 학자들은 차고 넘친다. 숫자야 말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고

전 세계적인 석학인 바츨라프 스밀(Vaclav Smil)은 그의 여러 책에서 이야기한다.

그렇다 숫자 그 자체는 아무 감정도 어떠한 차별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숫자의 이면을

들춰내면 숫자는 매우 폭력적이다. 그리고 숫자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숫자가 모든 걸 말해주지 않는다. 숫자는 그저 여러 가지 상태를 설명해 주는 하나의 지표 혹은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세계는 21세기는 점점 더 숫자가 모든 걸을 말해주는 숫자

우선주위가 되어가는 것 같다. 숫자와 무관한 분야에서도 숫자로 된 증거를 요구하기 시작하였으며

간단하더라도 숫자로 된 무언가를 들이밀어야 그의 논리가 받아들여지는 세상이 되었다.

정량적으로 계량적으로 수치화될 수 없을만한 분야들 그러한 문제들 역시 이제는 객관적이라고

추앙받는 숫자화 된 정보를 요구하는 사회이다. 과연 이게 맞는 건지 의구심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사회는 점점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숫자를 만든 건 인간이지만 이제는

숫자가 인간을 만들고 지배하는 세상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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