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지금, 바로, 이거면 충분하다
오늘도 설거지 앞에 섰다. 마치 하루의 종료를 알리는 페이드아웃의 첫 프레임처럼, 말줄임표의 시작 점처럼, 이 작은 일로 끝이 출발하는 경계를 긋는다. 접시를 물로 부시며 하루의 흔적을 닦아낸다. 밥풀, 기름때, 국물 자국 같은 것들이 물과 세제 거품 속에서 사라질 때면 나도 함께 맑아지는 기분이다.
나의 설거지에는 정해진 순서가 있다. 컵, 작은 그릇, 큰 그릇, 숟가락과 젓가락, 마지막으로 후라이팬. 물건을 하나하나 들고 닦으며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들.
‘아니 그럼 처음부터 제대로 말을 해주던가?’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그러는 건 아니지.’
상념에 젖어 투덜거리다가도, 우리 식구 저녁밥 함께 먹으며 실없이 나눴던 대화가 떠오르면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아빠, 그거 알아?”라고 시작하는 딸아이의 이야기에 아내와 내가 맞장구를 치며 깔깔대는 장면들.
설거지는 단순히 물리적인 더러움을 제거하는 행위가 아닌가 보다. 하루를 되새기고 예쁜 추억만 남기는 의식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가끔, 쌓인 그릇을 보면 한숨부터 나오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할 때가 있다. 이럴 땐 우선 잠시 눈을 감았다가 이내 부릅뜬다. 팔을 걷어붙이고 고무장갑을 야무지게 착용 후 손목을 가볍게 턴다.
설거지통에 담긴 그릇을 꺼내어 우선 물로 부시고 싱크대 안에 종류별로 분류해 놓는다. 밥그릇은 밥그릇끼리, 국그릇은 국그릇끼리.
비워진 설거지통에 따뜻한 물을 받아 그곳에 세제 펌프를 두 번 누른다. 손으로 휘휘 저어 거품을 내면, 일단 반은 끝난 것. 다음은 여느 때와 똑같다. 어느새 큰 그릇도, 젓가락도, 프라이팬도 차례차례 정리가 된다.
삶의 다른 문제도 이와 똑같다. 마주한 문제가 크게 보일 때, 처음엔 부담스럽지만, 단계를 쪼개고 작은 일부터 차근차근 해나가면 어느 틈에 그 끝이 보인다. 작은 해결의 반복이 결국 문제 전부를 풀어가는 길이 된다.
그릇을 헹굴 때마다 물에 씻기듯 마음속 응어리도 조금씩 떠내려간다. 젖은 접시를 하나둘 쌓아놓으면 고된 하루가 차곡차곡 정리된 것 같은 뿌듯함이 밀려온다. 나의 작은 의식은 집을 돌보고, 가족을 생각하며, 나 자신을 치유하는 시간이다.
“아빠, 설거지 끝났어?” 뒤에서 귀여운 목소리가 등을 두드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린 딸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응, 이제 끝났어. 왜?” 나의 공주님이 싱긋 웃으며 묻는다. “내일 내가 해도 돼?”
갑자기 웃음이 터진다.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갈 수 있다는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설거지라는 고단한 행위 끝에 마주하는 사랑스러움은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기쁨을 가져다준다. 매일 작은 흔적들을 닦아내며, 때론 미뤄둔 것들을 정리할 때 맞이할 수 있는 그윽한 쾌감.
설거지가 끝난 싱크대에 남은 것은 물 몇 방울과 반짝이는 그릇들뿐이다. 내일 다시 더러워질 게 뻔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나와 내 공간이 깨끗하다. 오늘, 지금, 바로, 이거면 충분하다.
사진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