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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ndmer Dec 21. 2021

금융 오디세이

돈의 역사가 곧 인간의 역사다



[ 글을 시작하기 전에 ]


금융과 돈 은행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면 상당히 어렵고 복잡하고 난해하다. 돈이라는 것을 은행에 넣어두고 예금이자를 받거나 대출을 받아서 집을 사는 것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 별다른 고민을 한 적은 없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회의 규칙이 나의 소중한 자산을 빼앗아가고 삶을 비참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돈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이 쌓인다거나 투자의 귀재가 될 만한 내용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인 자본주의와 금융 공학의 탄생이 어떤 기원을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 있다. 


역사를 알면 나의 뿌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연유로 내가 이 땅에 태어났는지 국적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지리학적으로 우리 주변에 위치한 국가들의 이름과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고 우리 사회가 이렇게 발전하게 된 원인도 함께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역사에 대한 고민을 하고 공부를 하는 것에 의의를 둘 수 있다. 금융 오디세이라는 것은 금융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재미난 역사적인 사례들을 기반으로 설명해주고 연결함으로써 금융에 대해서 상당 부분 이해하는 계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면 금융 오디세이 돈, 은행, 사람은 어떻게 연결이 되어 있는지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Ⅰ. 돈 Money


1. 돈과 은행을 향하여


대금업과 반유대주의 


셰익스피어가 일그러진 인물로 묘사한 샤일록은 유대인이다. 반유대주의는 기독교 문명과 더불어 흘러내려온 아주 오래된 생각이다. 20세기 들어 유대인에 대한 경멸과 혐오감이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유대인에 대한 경멸과 조롱의 근원은 오랫동안 그들이 독점하다시피 했던 대금업에 있었다. 기독교 교리를 담은 성경에 의하면 생명 창조는 오로지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돈에서 돈을 창조하는 일, 즉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일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유대인 사회에서도 대금업은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엄청난 죄악이었다. 구약시대부터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주면 그에게 채권자같이 이자를 받지 말라는 지침이 있었다. 


그것을 어기고 돈이 돈을 낳는 대금업을 하는 것은 유대인 중에서도 구제 불능인 사람들이나 하는 일로 치부되었다. 


기독교 도라면 더더욱 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인간이 죄악을 바라보는 눈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중세에는 노예를 사고팔거나, 노예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낳거나, 그 사생아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팽개치거나 다른 노예와 결혼시키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그들이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만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중세 대금업의 이중구조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사회가 대금업을 모두 없애버린 것은 아니다. 급전을 주고받는 일이 완전히 근절되면 곤란한 일들이 아주 많아진다. 평생 자급자족하는 것은 로빈슨 크루소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면책조항을 찾아냈다. 외국인에게 꾸어주면 이자를 받아도 되거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는 구절이다. 형제, 자매가 아닌 낯선 이를 상대로 하는 대금업은 숨을 쉴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나라를 잃고 객지를 유랑하는 디아스포라에게 대금업은 천직이었다. 가난한 사람은 상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고객은 같은 동포가 아니라 체류하는 나라의 통치자와 성직자들이었다. 금용 생활을 하는 교회 성직자들은 성직자의 급여인 성직록을 들고 찾아오는 만성적인 예금주였고, 통치자들은 만성적인 차입자였다. 


이런 이중구조는 바람직하기도 했다. 통치자들은 돈을 쓰지 않으면 매주 교황청으로 몰려오는 엄청난 헌금이 갈 곳을 잃어 유럽 사회 전체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통치자들이 전쟁이나 사치를 통해 흥청망청 뿌리는 돈을 교회와 교회의 사제들이 계속 메꿔주는 것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그런 비밀을 잘 알고 있는 대금업자들이 일반 서민들과 접촉이 늘어날수록 통치자와 사제들의 부끄러운 비밀들이 지켜지기 어렵다. 


대금업자와 서민 사이에 금융 거래가 늘어나면, 서민들이 십일조 헌금 약속을 잘 지키는지 감시하기도 어려워진다. 그래서 교회는 대금업자와 서민들을 분리했다. 대금업자들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몰려 살도록 한 것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몬주익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우리에게는 1992년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따기 위해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오르던 가파른 언덕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몬주익은 유대인 산 Mount of Jews이라는 뜻으로 유대인 대금업자들이 당시 성에서 뚝 떨어진 달동네에 격리되어 살았던 데서 나온 이름이다. 


근세의 대금업과 해상무역


해상무역은 위험과 이익이 클 뿐만 아니라 자금의 투자와 회수 기간도 오래 걸렸다. 지중해 안에서의 무역은 간단하지만,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간의 무역은 항구를 출발한 배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6개월 이상이 걸리기 때문에 해상무역에 투자한 자금이 회수되기 전에 이를 현금화할 필요성이 커졌다. 


따라서 배에 물건을 실은 것만 확인되면 그 확인증을 돈처럼 유통할 수 있는 시스템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유대인이 아닌 그 사회의 주류층이 마침내 금융업, 즉 무역금융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은행업의 출발이었다. 


은행업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유대인 대금업자들처럼 단순히 자금을 융통하는 것이 아니라 해상무역과 관련하여 발행된 진성어음을 할인한다는 것이다. 둘째 여신 기간이 보통 3~6개월이고, 아무리 길어봐야 1년 미만이라는 것이다. 


해상무역에서 시작된 단기 진성어음 할인에서 은행업이 시작된 탓에 19세기까지만 해도 상업은행들은 1년 미만의 자금만 취급했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은행법에는 1년을 기준으로 상업금융업무와 장기 금융 업무라는 구분이 남아 있는데, 이것도 르네상스 시대의 흔적이다. 


한국은행도 1년 이내의 단기여신만 취급할 수 있다. 반면 장기금융 업무는 한국산업은행 등 특수은행이 다루는 것이 원칙이다. 


돈이란 무엇인가 : 돈의 힘, 돈이 무엇을 하는가


돈의 양을 조절하거나 가격(금리)을 조절하면 소비와 투자에 변화가 생기고 그 결과 경기와 물가가 영향을 받는 것으로 이해된다. 고용 수준도 달라진다. 케인스주의자라는 경제학자들이 특히 이런 이론을 강하게 믿는다. 


하지만 케인스주의자들은 훨씬 근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문제, 즉 그런 변화가 과연 돈 때문인지, 그렇다면 왜 그런지에 대해 아직도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부국 강병기라고 불리던 때에도 돈이 특별히 많이 공급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조선의 세종도 아버지 태종 때보다 더 많은 돈을 찍지 않았다. 개인의 행복과 씀씀이가 반드시 수중에 있는 돈의 양과 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미래 소득에 대한 기대나 앞날에 대한 불확실성 같은 심리적 요인도 소비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들은 돈의 힘을 의심하게 한다. 미국의 키들랜드와 프레스콧 같은 학자는 실물경제가 문제일 뿐, 돈 그 자체는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실물경기 이론으로 200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돈의 세 가지 조건


첫째, 돈은 계산의 기본단위다. 길이를 재는 자에는 눈금이 새겨져 있고, 무게를 재는 저울에는 추가 달려 있다. 눈금과 추는 무언가의 길이와 무게를 측정하는 기준이다. 마찬가지로 가치를 측정하는 돈은 계산의 기본단위를 품고 있다. 


둘째, 돈은 교환의 매개물이다. 예를 들어 회사 사장과 식당 주인은 서로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회사에서 일한 대가를 돈으로 받아 그 돈으로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는다. 그럼으로써 회사와 식당, 노동시장과 상품시장이 서로 얽힌다. 


이때 직장에 제공한 노동력과 식당에서 제공받는 식사 사이에 교환의 매개물로 쓰이는 것이 돈이다. 그럼으로써 상거래와 일상생활이 엄청 편리해진다. 


셋째, 돈은 가치 저장 수단이다. 건물, 기계, 자동차 등은 시간이 흐를수록 마모되어 가치가 줄어든다. 부동산, 주식, 귀금속 등은 가치가 불안정하다. 그에 비해 돈을 닳지 않고, 가치도 대단히 안정적이다. 자의 길이와 저울추의 무게가 온도나 습도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돈의 시작 : 금과 은으로 된 주화


아주 오랜 옛날, 오늘날의 터키 서쪽에는 리디아라는 나라가 있었다. 에게해의 온화한 기후 덕분에 각종 곡물과 과일, 견과류가 풍부했던 곳이다. 그로 인해 상업도 꽤 발달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리디아 사람들이 최초로 상설 상점을 세웠다고 한다. 


한편, 리디아에는 팩톨루스라는 강이 흐르는데, 그 강의 모래에서는 사금이 유난히 많이 채취되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미다스 왕이 자신의 손을 씻은 곳이 바로 팩톨루스 강이다. 


당시에는 금과 은이 장식용으로만 쓰였다. 그런데 상업이 발달한 리디아가 놀라운 발명을 했다. 다른 언어를 쓰는 주변의 나라들과 장사하는 데 불편을 없애기 위해 금과 은으로 화폐를 만든 것이다. 오늘날의 주화처럼 품질과 크기가 일정하고 그 가치를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금화든 은화든 널리 쓰이려면 우선 신뢰를 얻어야 한다. 즉 돈의 가치를 잘 지켜야 하는데, 이에 대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통치자들은 서로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리스는 무역수지나 재정 사정과 관계없이 돈의 가치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심지어는 전쟁과 같은 긴급 상황에서도 돈의 가치를 지키려고 했다. 


그래서 오늘날 그리스 지역에서 발견되는 주화의 품질은 일정하다. 반면, 로마의 통치자들은 재정이 어려울 때마다 돈의 가치를 계속 낮췄다. 은화 데나리우스의 경우 원래 4그램 정도였지만 네로 시대에 이르러서는 3.8그램으로 줄었고 왕정 말기에는 은의 함량이 2퍼센트 정도까지 하락했다. 


은화라고 하기가 민망할 정도다. 오늘날 로마 시대의 돈이라고 하는 유물들은 시대에 따라 은의 함량이 천차만별이다. 


화폐 가치와 디베이스먼트


이처럼 돈의 물리적 가치를 낮추는 조작을 디베이스먼트라고 한다. 오늘날까지 알려진 대표적인 디베이스먼트 기술은 클리핑과 스웨팅이다. 클리핑은 주화의 주변을 살살 깎아내는 방법이고, 스웨팅은 주화를 가죽 부대에 넣고 마구 비벼대어 금화와 은화 가루를 얻어내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클리핑 여부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주화 테두리를 톱니 모양으로 만들었다. 스웨팅을 막기 위해 이탈리아에서는 금전거래가 끝나면 금화를 곧장 주머니에 넣고 밀봉한 다음, 주머니까지 통째로 주고받았다. 

이탈리아어로 품질보증을 의미하는 피오리노 디 수겔로는 원래 밀봉된 금화라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돈의 가치를 속인 사람들은 주로 통치자들이었다. 고대 로마의 위정자들이 선구자적 위치에 있었고 그 이후에 유럽 각 지역에서 군주들이 그 계보를 이었다. 종교 개혁 이후 교황청의 힘이 약해지면서 상대적으로 힘이 세진 군주들은 흥청망청 돈을 쓰기 바빴고, 씀씀이를 메우는 방법으로 디베이스먼트를 시도했다. 


유레카! 항해술의 발달과 가격혁명


1545년 오늘날 볼리비아의 포토시라는 곳에서 은광이 발견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유럽 전체의 매장량보다도 훨씬 많은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다만 해발 4,000미터가 넘은 고지에서 캐낸 원석을 유럽으로 운반하는 것이 문제였다. 


안데스산맥을 넘어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까지 옮기는 데 두 달 반이 걸리고, 제일 가까운 태평양의 리마 항구까지도 2,400킬로미터가 넘었다. 따라서 신대륙에서 반드시 은의 정제까지 마치고 완제품을 수송해야 했다.

 

이 문제로 고민하던 스페인은 리마 항구에서 가까운 우앙카벨리카에서 1563년 마침내 은의 정제에 꼭 필요한 수은을 찾아냈다. 이때부터 포토시는 300년 동안 전 세계에 은화를 공급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연간 300톤의 은이 생산되어 그 가운데 절반은 유럽으로 보내지고 나머지는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로 운송되어 중국의 비단이나 차와 교환되었다. 


고산지대에서 이만큼 은을 캐내려면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다. 어린 아기까지 동원해도 노동력은 늘 부족했고, 수은에 노출된 열악한 작업환경 때문에 원주민들은 끊임없이 죽어나갔다. 


인구가 계속 줄자 아프리카에서 노예까지 동원되었다. 은광의 발견이 유럽인들에게는 횡재요 단꿈이었지만 인류사적으로는 저주요 악몽이었다. 


유럽인에게도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은이 넘쳐남에 따라 수천 년 동안 안정되었던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한 것이다. 스페인과 아무 연관이 없었던 북유럽과 동유럽의 구석구석까지 일상생활에 일대 혼란이 초래되었다. 인플레이션이었다. 


은광의 발견 이후 약 100여 년간 지속된 물가상승 현상을 역사에서는 가격혁명이라고 한다. 이는 지리상의 발견이 가져다준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부산물이었다. 


화폐 수량설 : 돈의 가치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과거에는 돈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이 군주들의 디베이스먼트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격혁명 이후 돈의 가치가 떨어지자 많은 이들이 국왕을 원망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장 보댕은 세상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법률뿐만 아니라 신학, 철학, 정치, 역사, 과학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 없는 문사철의 대가였던 그는 스페인을 통해 유럽으로 유입되는 은의 양과 물가 간의 관계를 주목했다. 


포토시에서 은이 물밀듯이 들어오는 이상 유럽 전역에서 빚어지는 물가 불안을 국왕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의도했던 돈의 타락과 의도하지 않았던 돈의 타락을 모두 경험한 끝에 인류는 잠정적 결론에 이르렀다. 반듯하면서도 따스한 철학을 가진 전문가들이 권력자들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서 긴 안목으로 토론을 통해 돈의 가치를 결정하도록 하는 원칙이다. 


중앙은행 제도에 담긴 이런 지혜를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고 부른다. 


장터, 화폐 경제의 중심이 되다. 


장터는 상인들이 이윤을 남기는 장소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굉장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파슬리, 세이지, 로즈메리, 타임 같은 풀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라비아의 향신료와 아프리카의 물소 뿔과 아시아의 비단들도 있었다. 


중세의 묵직한 분위기에 짓눌려 있던 사람들은 장터에서 진기한 물건을 보고 만지며 행복을 느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의 열기 속에서 흑사병의 시련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교회에서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장터는 설렘과 여흥의 상징이다. 영어로 장터, 박람회, 전시회라 부르는 페어는 축제, 여흥, 유원지를 뜻하기도 한다. 장터는 새로운 변화의 출발점이었다. 거기서 거래를 통해 상상도 할 수 없는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 사람이 등장했다. 그들의 돈은 정치와 종교까지 움직였다. 


문화와 예술과 학문도 그들의 돈이 가진 힘에 좌지우지되었다. 그러면서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다. 20세기 중국을 움직이는 권력이 총구에서 나왔다면 14세기 이후 근세 유럽을 움직이는 권력은 거상의 금고에서 나왔다. 


은행의 기원 골드스미스


왕실의 주조국이 위치한 런던탑은 영국 최고의 보안시설로서 상인들에게는 오늘날의 대여금고 역할을 했던 곳이다. 하지만 왕이 이곳에 있는 상인들의 재산에 손을 대면서 상인들은 분노했다. 그리하여 런던탑에 보관했던 재산을 찾아서 금고를 갖고 있던 시내의 민간 금세공업자, 즉 골드스미스에게 맡겼다. 


이후 상인들은 상거래를 할 때 자신들의 재산을 보관하고 있는 금세공업자를 이용했다. 물건을 살 때는 금화를 지급하는 대신 금세공업자들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즉시 돈을 받을 수 있는 예금인출증을 건네주었다. 


금세공업자들은 보관 중인 예금을 바탕으로 대출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은행의 기원이다. 


아주 틀린 사실은 아니지만 영국의 설명이 지극히 섬나라를 벗어나지 못한 생각이다. 영국이 찰스 1세의 폭정에 시달린 것은 17세기 초이지만, 인류 역사에서 근대 금융업 또는 은행업이 시작된 것은 그것보다 훨씬 빨랐다. 


10세기 초 인류  최초의 불태환 지폐인 교자를 발행할 정도로 상업과 금융이 발달했던 중국 송나라에는 12세기에 이르러 양자강 남쪽 지방에서 전장이라는 조직이 등장했다. 예금과 대출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은행과 똑같았다. 


그런데도 오늘날 은행이라는 단어를 탄생시킨 사람들을 콕 짚는다면, 이탈리아 북부의 상인들이었다. 이 지역은 게르만족의 한 분파인 롬바르드족이 정착했던 곳이라서 이 지역의 상인들을 통칭해 롬바르드라고 불렀다. 


롬바르드 중에서 어떤 이들은 금융업에 집중했다. 물건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전당포업자였다. 물건을 받고 돈을 주는 일은 교회가 금지하는 대금업이 아니라는 이유로 간신히 용인되었으나, 그들은 유대인들 못지않게 천시받았다. 


그보다 약간 나은 대접을 받았던 것이 환전상이다. 돈과 돈을 바꿔주는 환전업도 물물교환으로 여겨져서 합법에 속하기는 했지만, 역시 천대받는 일이었다. 초기 환전상들은 길거리에서 접이식 좌판을 깔고 오가는 행인들과 환율을 흥정했다. 


이탈리아 말로 좌판 또는 테이블을 방카라고 하는데, 여기서 나온 것이 뱅크 즉 은행이다. 


Ⅱ. 은행 Bank


투기 광풍의 시작 : 네덜란드 튤립 파동


독립전쟁 중인 네덜란드 주민들이 생업을 팽개치고 투기판에 뛰어들게 한 것은 튤립 뿌리였다. 오스만 튀르크에서 이국적인 튤립 종자가 들어온 이후 수익성이 좋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증권거래소에서 거래되는 튤립 한 뿌리 가격이 몇 달 만에 20배 이상 폭등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꿈에서 빠져나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튤립은 일단 재배되면 쉽게 번식하는 것 아닌가!


튤립을 사랑하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던 이 단순한 사실을 상기했을 때 가격은 급격히 제자리를 찾았지만, 시민들의 삶과 경제는 파탄 났다. 1636년과 1637년 사이에 아주 잠깐 벌어졌던 이 사태를 역사에서 튤립 파동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이후 세계 곳곳에서 줄기차게 반복되고 있는 투기와 광기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광기는 80여 년 뒤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존 로가 쓴 프랑스 은행의 역사


스코틀랜드 출신인 존로는 스물세 살에 이성 문제로 친구와 다투다가 살인을 저질렀다. 이후 존 로는 탈옥하고 네덜란드로 도망갔다.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그가 본 것은 막 피어오르고 있던 근대 은행업의 가능성이었다. 


한동안 네덜란드에 머물다가 고향 스코틀랜드로 잠깐 돌아왔을 때 그는 어느덧 금융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이때까지 스코틀랜드는 영국과 통합되지 않아서 런던에서의 살인은 고향 스코틀랜드에서 별로 문제 되지 않았다. 


1705년에는 화폐의 무역이라는 책까지 발간했다. 사상 최초의 화폐금융 이론서였다. 


이 책에서 그는 초근대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돈이 돌지 않으면 경제가 죽는데, 은행은 영업을 통해 자연스럽게 돈을 늘리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돈을 유통하므로 은행은 경제를 살찌우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의 결론은 이처럼 유익한 사업은 자유방임 상태로 둘 것이 아니라 국가가 독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이 결정되자, 그는 자기가 주장한 대로 통합 왕국 아래서 국립은행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 사회는 아무도 그의 이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고향에서 관심받지 못한 그는 예전처럼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오가면서 도박장과 투기 거리를 좇으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1714년 마침내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프랑스에서 귀인을 만난 것이다. 


영국에서 건너온 금융전문가 행세를 하면서 프랑스의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어울리던 존 로는 어느날 오를레앙 공작을 만났다. 공작은 당시 프랑스를 통치하던 태양왕 루이 14세의 조카였으므로 그와 사귀는 것은 만사형통의 지름길이었다. 


당시 왕실은 만신창이가 된 재정문제가 고민이었다. 왕실의 부채는 30억 리브르에 이르러 이자 갚기도 벅찼다. 루이 14세가 재위하던 1685년에 낭트칙령 파기를 선언하고 위그노들을 다시 탄압하기 시작하자 그들이 돈을 들고 외국으로 떠나는 바람에 프랑스 안에는 왕에게 급전을 빌려줄 사람이 없었다. 


이때 외국에서 건너온 존 로가 오를레앙 공작에게 묘안을 제시했다. 로는 몇 년 전 스코틀랜드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겼다. 외국인들이 차지한 금융업을 독점사업으로 만들고 그 은행에 정부 지출을 맡기면 신교도의 도움 없이도 재정이 개선되고 경제도 좋아진다고 설명했다. 


자기 고향에서는 이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오를레앙 공작은 그 말에 뛸 듯이 기뻐했다. 존 로를 왕실 재정 고문으로 임명하면서 그가 제안하는 은행을 설립하는 것을 궁정회의 안건으로 회부했다. 이탈리아, 네덜란드, 영국 등에만 있었던 은행을 프랑스에도 만들자는 것이었다. 


왕실은행과 전환사채 프로젝트


로의 은행이 설립된 지 6개월 뒤 모든 세금은 이 은행의 은행권으로만 내라는 국왕의 칙령이 내려졌다. 그로 인해 존 로의 은행이 발행하는 은행권은 사실상의 법정화폐가 되었다. 


이 은행은 은행권 발행을 통한 시뇨리지 이외에 어음할인과 환전 등의 독점사업을 통해서도 짭짤한 이익을 거두었고, 첫 2년간 15퍼센트 정도의 배당까지 실시했다. 


왕실 후원으로 만들어진 서인도회사


존 로는 금속을 화폐로 써야 한다는 생각에 처음부터 불만이 많았다. 그가 생각했던 화폐제도는 일종의 토지본위제도였다. 은행권의 가치를 토지에 대한 청구권과 연계함으로써 금속화폐를 대신한다는 생각이었다.

 

토지는 귀금속보다 영원하지 않은가? 그의 생각에 따르면 토지본위제도에서는 물가가 상승하는 일이 없다. 사람들이 토지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과 연계된 은행권을 보유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토지가 인기 없으면 토지청구권에 해당하는 은행권은 은행으로 자동 환수될 것이요, 반대로 농사나 상업활동을 위해 토지가 필요하면 토지청구권인 은행권의 수요가 커져서 은행권 발행이 늘어난다. 


그가 은행권 발행의 근거로 삼으려고 생각한 지역은 오늘날의 북미 중부에 있는 아칸소였다. 이 지역은 프랑스가 개척했지만, 별 용도 없이 놀려두고 있는 땅이었다. 그 무렵 몇몇 민간 영세 개발업자들이 달려드는 것을 보고 존 로는 자기가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거기에 서인도 회사를 세웠다. 다른 말로 미시시피회사라고도 했다. 이 회사의 역할은 왕실을 대신해 아칸소 지역을 개간하는 것이었다. 지난번 은행을 세울 때와 마찬가지로 미시시피회사의 자본금도 국채로 모집되었다. 따라서 회사가 세워지더라도 왕실의 부채는 달라지지 않는다. 


불모지가 개척되면 세금이 더 걷히기 때문에 왕실이 손해볼 것은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왕실은 존 로에게 아르콩사 공작이라는 작위를 수여하고 그의 사업을 후원했다. 로는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왕실에 이 회사에 25년간 개발독점권을 양도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또한 당시 국채 이자와 같은 수준으로 매년 4퍼센트의 배당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왕실이 갖고 있던 북미 담배농장의 수입을 서인도 회사에 넘기로고 요구했다. 담배농장의 수입을 포기하는 것을 왕실이 떨떠름해 하자 그는 이 회사는 장차 인도보다도 더 귀한 선물을 프랑스에 선사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프랑스를 뒤흔든 부동산과 주식 광풍


주식 모집이 다소 부진해지자 존 로는 여러 가지 꾀를 생각해냈다. 우선 투자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관리하는 왕실은행을 통해 2퍼센트의 금리로 대출을 해주었다. 이는 당시 5~6퍼센트의 금리 수준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낮은 수준이었다. 


더 나아가 주식 청약금의 20퍼센트만 선납하면 5개월간 분할납부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중간에 포기할 수는 없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돌이켜 보건대, 투기와 버블이 인류의 역사에서 기록된 것은 종교개혁 이후다. 인간의 욕망이 종교의 권위를 통해 잘 통제되던 시절에는 사회 전체가 투기에 빠져들거나 버블이 폭발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인간의 내면적 욕망뿐만 아니라 과시적 소비와 부의 축적까지도 죄악으로 생각하던 가톨릭 세계관의 미덕이었다. 


투기와 버블은 인간의 이윤추구 본능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부의 축적이 옹호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선교도들의 땅 네덜란드가 첫 희생자였고, 신교도들이 경제권을 잡았던 프랑스가 두 번째였다. 남해회사 버블을 겪은 영국이 세번째쯤 된다. 


영국도 카톨릭 세계를 이탈한 국가였다. 역사상 두 번째 버블을 초래한 존 로는 형편없는 인물로 기록된다. 그러나 화폐금융이론과 거시경제학 차원에서 보자면 그는 선구자였다. 케인스를 능가하는 독창성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그가 한 가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금리와 화폐량의 관계였다. 


그는 명목금리가 높다는 것을 무조건 돈이 부족하다는 것으로만 해석하여 금리를 낮추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믿었다. 중요한 사실은 한 은행가의 잘못된 믿음이 너무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 글을 마치며 ]


 금융 문맹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리는 요즘이다. 


금융과 관련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함은 물론 금융과 관련된 언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로 풀이가 된다. 


금융 문맹이 되면 현대의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뜻도 되기 때문에 금융 문맹을 벗어나서 금융과 관련된 이해를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고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상태라면 어떤 것들을 알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하는가가 고민이 될 수 있다. 


이럴 때에 금융이 어떤 식으로 발전을 해왔는 가를 이해하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금융 오디세이라는 책은 금융 자본주의가 어떤 식으로 발전을 해왔는지를 알려주는 책으로 매우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정리하지 않는 내용 외에도 자본주의가 어떤 식으로 변모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담고 있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정도 읽어본다면 매우 좋을 것 같다. 


참고 도서 : 금융 오디세이 (차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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