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에서 돈의 흐름을 좇다.
[ 글을 시작하기 전에 ]
한국 경제의 흐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경제 사회 역사 같은 것들을 학교에서 배우기는 했지만 심도 깊게 배운 것은 별로 없었고 무엇보다 개인의 관심도가 매우 적었다.
덕분에 우리나라가 최빈국에서 어떻게 성장하고 세계적인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나아가 세계 경제적인 흐름에 대해서도 역사적인 사실들이 어떤 연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기 알지 못했다.
그런데 돈의 인문학에서 한국 경제의 흐름에 대해서 시계열 순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폐허에서 시작한 기록적인 경제 성장과 우리나라가 일본과 어떤 점이 달라서 잃어버린 30년 같은 경제 위기를 맞이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가 있다.
경제적인 흐름을 알고자 했을 때에 사건의 시간적인 순서를 통해서 습득하게 되면 이해도도 높아지게 되고 기억에도 오래 남을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내용이 많아 3번에 나누어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중 첫 번째로 한국 경제에서 돈의 흐름을 어떤 식으로 변화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Ⅰ. 세계 최빈국 한국은 어떻게 수출 6강이 되었을까?
폐허에서 시작한 기록적인 경제 성장
세계은행에 따르면 1960년대 이후 30년 동안 한국의 경제 성장률이 세계 197개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한다. 우리는 자그마치 30년을 1등으로 달려온 민족이다.
세계 경제사에 유래가 없다. 바깥을 향한 경제 정책이 우리 민족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1960년 이후 50년간 세계 경제는 6배 커졌고 우리나라 국내총생산은 34.5배나 늘어났다. 이 역시 역사상 가장 빠른 성장이다. 유대인이 주축이 되어 이룩한 근대 경제사도 우리 한민족의 업적에는 비할바가 못 된다.
16세기 식민지 개척으로 근대 최초의 제국을 건설했던 스페인은 1,000년 동안에 1.6배 16~17세기 해상 무역 강국이었던 네덜란드는 200년 사이에 5.6배, 18세기 산업혁명으로 패권 국가가 된 영국은 170년 동안에 9.4배 성장했다.
미국은 1870년부터 1940년까지 9.5배 일본은 1913년부터 1970년까지 14.1배 각각 성장했다.
1950년대, 중석이 한국 수출을 먹여 살리다.
광복 직후 1946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수출 품목은 중석과 오징어, 수출 대상국은 미국과 일본 단 두 나라였다. 연간 수출액은 350만 달러에 불과했다.
1950년대에 와서도 우리에게는 이렇다 할 수출 품목이 없었다. 땅속과 바닷속에서 찾아낸 광물과 수산물이 고작이었다. 땅속에서 파낸 광물은 미국에 팔고 바닷속에서 건져 올린 수산물은 일본에 팔았다.
수산물은 일본에 수출하다.
광물 외에 국내 주요 수출 품목의 20~30%는 오징어, 한천, 김 등 수산물이었다. 그 무렵 품질 좋은 수산물은 일본에 수출하고 품질에 미달하는 하치들이 우리네 몫이었다.
1960년대 수출 제1주의를 기치로 원양업에 진출했다. 원양어업은 참치잡이가 주력이었다.
수출 품목 늘리기 위한 수출 장려 보조금 제도
6.25 전쟁 후 사람들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정부는 기아 해결을 위해 국민에게 농산물 재배를 독려했다. 그 무렵 우리 국민의 70%가 농민이었다.
문제는 농민 대부분은 추수한 농작물로 빚을 갚고 이자, 세금, 학비 등을 뗀 다음, 남은 식량으로 초여름 보리 수확 때까지 견뎌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농을 제외하곤 대부분 봄이 되면 양식이 떨어졌다. 가을에 수확한 양식이 바닥나고, 보리는 미처 여물리 않은 5~6월 이 춘궁기를 보릿고개라 불렀다.
1960년대까지도 이 보릿고개 때문에 농민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정부는 국민들에게 농산물 재배를 독려했다. 이렇게 국내 기아를 해결하고 생산된 곡물을 수출하려 해도 가격이 안 맞았다.
수출 원가가 국제시세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이를 타개할 묘안이 필요했다. 정부가 만든 묘안은 수출 장려 보조금 제도였다. 수출하는 게 바람직한 품목에 대해 수출로 인한 결손액을 정부가 보조하기로 한 것이다.
이로 인해서 광물 위주의 수출에서 농수산물 비중이 그다음으로 커지게 되었다.
1960년대 수출 주역, 아낙들의 누에치기 시작
양잠은 고대로부터 한민족의 특기이자 왕가의 중요한 장려 거리였다. 왕후가 직접 뽕잎을 따고 누에를 치는 조선 시대의 친잠례는 종묘와 사직 다음으로 중요한 행사였다.
또한 염색 기술이 일찍이 발달한 삼국시대에는 비단이 중요한 수출 상품이었다.
특히 중국에는 명품 비단으로 유명했다. 그 무렵 중국에서 생지를 들여다 염색해서 되파는 가공무역도 발달했다.
1950년대 농가에서는 아낙네들이 삼과 목화를 재배해 길쌈을 했다. 그리고 짬을 내 누에를 치는 양잠을 해야만 가족이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었다.
양잠 농가는 봄부터 여름까지 방마다 잠잘 공간만 남겨둔 채 선반을 만들어 누에를 쳤다. 누에는 뽕잎을 먹기 때문에 밭 주위에는 으레 뽕나무가 있었다.
광복 후 1951년경까지 수매된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생사 곧 명주실은 대부분 국내용으로 쓰였다. 생사가 수출 물자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52년 한국 생사 수출 조합이 결성되어 수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그해 생사는 중석에 이어 수출액 2위였다. 하지만 규모는 크지 않아 200만 달러에 불과했다.
애환 어린 가발 수출
1960년대 3대 수출품의 하나가 가발이었다. 가발 제조는 우리나라 여성의 섬세한 손재주, 풍부한 노동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내에서 조달 가능한 원료였다.
한국산 가발과 속눈썹은 미국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지금도 우리나라 가발산업은 세계 최고의 위치에 있다.
세계 가발 시장의 무려 80%를 차지하고 있다. 비록 인건비 부담으로 공장은 중국, 동남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가동하지만 기술력과 디자인, 유통에서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
보세가공의 시작
우리나라는 자원과 자본이 없고 오직 인력밖에 없었다. 남의 나라 자원을 가져와 우리 인력으로 부가가치를 높여 수출하는 조립가공 산업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홍콩은 작은 섬이라 자기들이 직접 생산하는 원자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외국에서 수입하죠. 외국에서 원자재를 들여와 가공하여 수출하는 게 보세가공입니다.
이를테면 원단을 수입해서 아동복이나 봉제완구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만들어 다시 수출하는 거지요. 홍콩의 부녀자들은 재봉틀 하나를 갖고 4~5명의 식구를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우리 여성들의 봉제기술은 아마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일 겁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 봉제산업과 섬유산업이 시작됐다.
1983년 반도체 산업 진출 선언
우리나라가 직물과 신발 등 경공업 제품을 주력으로 팔고 있을 때 일본은 세계 최강의 제조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이미 세계 최대 반도체 생산국이었다.
그 무렵 미국은 떠오르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1983년 일본과 반도체 협상을 시작해 본격적인 규제를 가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이병철은 이른바 도쿄 선언을 하며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었다.
1986년 사상 최초의 무역흑자
1986년은 우리나라 무역흑자의 원년으로 기록된다. 제5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마무리 짓던 해였다. 1인당 GDP는 2,643달러였다.
한국의 수출이 수입을 처음으로 넘어 47억 달러의 무역 흑자에 힘입어 49억 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무역흑자 달성으로 국제적으로는 국가 신용이 향상되었고 경상수지 흑자와 물가안정이란 두 마리 토끼를 최초로 잡았다.
2021년 대중국 수출액 일본 제치고 세계 1위
중국이 2009년 독일을 제치고 마침내 세계 최대 수출국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2012년에는 우리나라가 일본을 제치고 대중국 수출 1 위국으로 부상했다.
한국이 일본을 제친 것은 그동안 중국이 일본에 의존해오던 첨단부품과 설비를 우리나라가 꾸준히 대체해온 데다 우리 주력제품이 중국 소비시장에서 입지를 다졌기 때문이다.
2014년 메모리 반도체 강국으로 부상하다.
2013년부터 세계 시장에서 우리나라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일본을 추월했고 미국에 이은 2위가 됐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는 세계 1위이다.
한국이 세계 수출 시장에서 5년 연속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품목이 32개 있는데, 그중 수출액 10억 달러 이상으로 상승세를 타고 있는 것이 메모리 반도체다.
Ⅱ. 한국 경제는 정말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과 닮았나?
한국과 일본의 경제 위기는 그 시작이 다르다.
현재 우리 경제가 부진한 것은 두 가지 이유이다. 하나는 세계 무역 경기 위축이다. 현재 세계 무역이 급감하고 있어 우리 수출이 줄어들고 있다.
우리나라는 GDP에서 수출 비중이 높아 세계 무역경기와 궤를 같이 한다.
코로나 19 사태로 세계 교역에 심하게 위축되어 우리 경제도 그와 비례해 고전할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수요 부진이다. 세계 경제는 초과공급과 수요 부진에 시달리고 있는데,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생산성 향상으로 공급은 넘쳐나는데 소득불평등과 부의 편중으로 사회 전체 수요는 줄어들어 불황이 계속되고 있다.
유동성 증가가 그간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 가격만 심하게 올리고 중산층과 서민들에게까지는 돈이 가지 않아 소비자 물가는 오르지 않는 현상을 보였다.
하지만 코로나 19가 통화경제 판을 근본부터 바꾸고 있다.
한국전쟁 덕을 톡톡히 본 일본
미국의 1945년 이후 동아시아 핵심 전략은 일본이 미국의 동아시아 대리인 구실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1950년에 터진 한국전쟁 덕분에 일본은 국가 체제와 산업 양면에서 여러모로 득을 크게 보았다.
일본,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이 되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본이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일본은 카메라, 오디오, TV 등을 앞세워 놀라운 속도로 세계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일본은 1968년 서독을 제치고 세계 경제 대국 2위 자리에 올랐다. 1970년대 오일쇼크가 터지자 일본 자동차가 다른 나라 자동차보다 연비가 뛰어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수출이 가파르게 성장했다.
1980년대 일본은 반도체 강국이 된다. 일본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최대 생산국이 되면서 미국의 반도체 산업은 비상이 걸렸다.
결국, 미국의 인텔은 일본과의 경쟁력에서 밀리는 D램을 포기하고 비메모리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자국 기업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 미국의 경제패권이 일본의 경제력 때문에 위협받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의 자동차와 전자제품은 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며 미국 상품을 시장에서 몰아내기 시작했다.
일본 상품의 세계 시장 점유율이 10%를 넘어섰다. 무역수지 흑자 역시 대규모로 늘어났다
제조업 강국 일본은 철강, 자동차뿐 아니라 당시 첨단산업인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미국보다 훨씬 나은 경쟁력을 보였다.
1985년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5천 달러 정도였는데 일본은 1만 8천 달러를 넘어서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을 앞질렀다.
비극의 씨앗 자이 테크, 일석삼조 돈놀이
일본 기세는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수출보다는 손쉬운 돈벌이의 유혹에 빠진 것이다. 1980년대 초반 일본 기업들은 자이 테크라는 자산운용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자이 테크 수익이 크니 자연히 영업에는 소홀하게 되었다.
일본 투자자 입장에서는 미국 채권에 투자하면 일본에서보다 3배 이상 높은 투자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다.
이로써 일본 기업가들 사이에선 돈 놓고 돈 먹는 일명 자이 테크 열풍이 분 것이다. 재테크로 번 돈은 다시 일본 주식시장과 부동산에 투자되어 활황 장세를 이루었다.
그러자 자산 가격이 치솟기 시작했다. 버블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 기업들은 수출로 번 돈을 기업에 재투자하지 않고 주식시장과 부동산에 투자했다.
마침내 일본 주식시장 시가총액이 1987년 미국을 앞섰다. 땅값도 마찬가지였다. 버블이 한창일 당시 도쿄 땅을 팔면 미국 땅 전체를 살 수 있었다.
1988년이 되자 세계 10위권 은행은 모두 일본 차지가 되었다. 버블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누구도 위기를 예상하지 못했다. 일본의 장기 불황은 이렇게 형성된 거품이 붕괴하면서 시작됐다.
미국의 본격적인 일본 견제, 1985년 플라자 합의
1985년 9월 22일 미국 재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뉴욕 플라자 호텔로 선진 4개국 재무장관을 은밀히 소집했다. 베이커는 일본에게 엔화가 너무 저평가되어 미국의 무역적자가 심화되니 엔화 강세를 유도해 달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미국이 시장 원리에 맡겨야 할 외환시장에 각국 정부의 개입을 요청한 것이다.
베이커의 압박에 일본과 서독은 수입 물량 조정, 관세 인상과 같은 직접적인 조치로 타격받는 것보다는 환율 조정이 그나마 받아들일 만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일본은 핵우산과 자위대 문제 그리고 과도한 무역흑자로 더 이상 미국과 마찰을 일으킬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각국 재무장관들은 달러 가치, 특히 엔화에 대한 달러 가치를 떨어뜨리기로 합의했다. 이것이 이른바 플라자 합의다. 이 합의로 미국은 엔화와 마르크화를 대폭 평가절상시킴으로써 달러를 평가절하한 셈이 되어 위기를 넘겼다.
달러는 세계 기축 통화이기 때문에 스스로 평가절하할 방법이 없다. 곧 상대방 통화를 절상시켜야 달러의 평가절하를 달성할 수 있다.
1987년 루브르 합의와 내수 부양
달러화 약세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무역적자 비중은 계속 확대되었다. 달러화 가치 폭락에도 미국의 적자가 개선되지 않자, 달러의 평가절하는 이제 그만하기로 했다.
미국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원인을 외부에서 찾았다. 일본과 서독이 미국 물건을 사주지 않아 무역적자가 늘어나는 것이라 보았다.
미국은 1987년 2월 파리 루브르에서 선진 6개국 재무장관 모임을 주선해 미국의 뜻을 전달했다. 더 이상 달러 가치 하락은 각국의 경제 성장을 저해한다. 라며 각국이 내수 경기를 살려 미국 상품의 수입을 늘려달라는 요지였다.
미국은 금리를 인상하여 달러 약세를 막고, 다른 나라들은 금리를 내려 내수를 부양시켜 미국 상품을 수입하자는 것이 루브르 합의의 요체였다.
일본, 주택담보 비율을 120%까지 올리다.
루브르 합의 직후 일본은 내수부양을 위해 5조 엔의 재정투자와 1조 엔의 감세를 발표했다. 이미 금리 인하와 양적완화 정책으로 과열 조짐을 보이던 일본 경제는 그 뒤 폭발적으로 팽창한다.
일본은 기준금리를 0.5% 내리고 내수부양을 위한 각종 대책을 도입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부동산 경기부양이었다.
당시 일본 은행들은 부동산 경기가 활황세임에도 주택담보 비율을 경쟁적으로 120%까지 올렸다. 10억 원짜리 아파트 대출 끼고 구입하기 위해 은행에 가면 12억 원까지 대출해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로써 너도나도 부동산 구입 대열에 끼어들어 1980년대 후반 일본의 부동산 버블이 극에 달했다. 이렇게 일본은 미국이 강제한 두 합의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버블을 만들고 그 버블이 터지면서 이른바 잃어버린 30년의 늪에 빠지게 된다.
일본, 중국의 협공에 무너지다.
일본은 중국 위안화에도 심하게 당했다. 중국의 덩샤오핑은 1978년 유명한 백묘 흑묘론을 내세우며 중국의 개방화와 세계화를 선언했다.
흑묘백묘론이란 고양이 색깔이 검던 희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는 뜻이다.
실질적인 것에 따라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실사구시와 같은 의미다.
중국의 환율정책이 바로 그랬다. 중국은 개방 초기에 수출 기업에게는 달러당 2.8위안, 외국인 직접투자나 관광객 그리고 민간에게는 달러당 1.5위안으로 환전해주었다.
일종의 수출 보조금 제도 성격이었다. 당시 암시장 환율 등 3개의 환율이 동시에 존재해 외국인들을 힘들게 했다.
위안화의 가치가 싸질수록 임금이 싸져 외국기업의 중국 투자가 늘어났다. 중국 정부는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인해 가치가 떨어지는 달러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역시 위안화 공정환율의 평가절하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1984년 달러당 2.8위안이었던 것이 1986년 달러당 3.2위안, 1989년에는 4.7위안, 1990년 5.2위안으로 연속적으로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이때부터 중국은 경상수지 흑자국으로 돌아섰다.
일본, 직격탄을 맞다.
평가절하된 위안화는 전 세계에 골디락스를 선물했다. 골디락스란 중국의 값싼 상품이 인플레이션을 상쇄시켜 세계 경제는 차지도 덥지도 않은 알맞은 성장세를 유지한다는 뜻이다.
중국이 저가 공산품은 주변국의 제조업을 비롯한 전 세계의 1차 산업을 무너뜨렸다. 특히 일본이 직격탄을 맞았다.
일본은 미국의 플라자 합의보다 중국의 위안화 절하로 맞은 상처가 더 깊고 아팠다.
[ 글을 마치며 ]
한국의 경제가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는지 꽤 많은 궁금증이 해결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과 우리나라 경제가 왜 동일하지 않은 형태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풀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예측을 해볼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책에서는 과거의 이야기를 했으니 현재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리를 해보자.
코로나로 인해서 세계 각국은 실물 경제의 침체를 돈의 양적완화로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노력을 했다.
결과적으로 국가 생산성 측면에서는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극적인 반전을 일으켜내는 것에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실제 경제 성장을 이루어낸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돈의 양이 많아지면서 화폐의 가치가 하락해버렸고 고정 자산의 가치는 상승되어 버렸다.
대표적인 자산 중에 부동산은 전 세계의 모든 나라의 부동산이 상승해버리고 말았고 미국의 주식시장은 매일 상한가를 거듭하면서 고점이 어느 정도일까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면서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새롭게 등장한 비트코인 같은 한정적인 재화의 가치도 폭등해버려서 단기간에 수익을 만들어내는 부자들도 탄생시켰다.
지금까지는 결과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예측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이 든다.
단기적으로는 화폐의 공급량을 예전보다 줄여나가는 것에 집중할 것으로 예상이 된다.
대출 규제와 금리 인상을 복합적으로 결부시키면서 시중에 풀린 돈의 양을 조절하는 것에 집중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현상은 자산 시장에 신규 투자 세력의 유입을 한정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조정을 불러오겠지만 급작스런 하락이나 대폭락은 없을 것으로 예상이 된다.
화폐를 풀어서 경기를 부양한 것이 한국만의 일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일이어서 장기간 인플레이션 측면에 진행되면서 자산의 가치는 일정 수준으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무리한 대출을 받아서 투자를 나선 사람들이 먼저 위험을 느끼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서 타격을 받게 될 것으로 예상이 된다.
그 시간이 오기 전에 현금 흐름의 안정성을 고려해서 투자 자산의 배분을 조정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인다.
하지만 금리가 높아진다고 해서 안정적인 투자 수익을 모색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대출 금리를 올리고 시중에 풀린 돈의 흐름을 줄인다는 것이 목적이지 은행에 돈이 쏠리는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예금 금리의 인상은 높아지지 않을 것이다.
예금금리와 대출금리의 차이가 예전과는 달리 꽤 큰 차이를 보일 것이며 주식시장은 실적 장세 위주로 주요한 기업들의 주가가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2021년도 이제 거의 저물어가고 있고 2022년에는 어떤 일이 생겨날 지에 대한 예측으로 가득하다.
그중에서 어떤 것이 좀 더 합리적이고 실현 가능성이 높은지에 대해서 고민을 해보고 개개인의 포트폴리오를 구현하는 데에 적용해 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
참고 도서 : 돈의 인문학 (홍익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