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에서 돈의 흐름을 읽다.
[ 글을 시작하기 전에 ]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돈이라고 한다면 단연코 달러를 꼽을 것이다.
유로화라던지 위안화가 한 때에 달러의 가치를 위협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달러는 그 지위가 막강하다.
해외 영업을 할 때에 대부분의 기업은 매출의 규모와 크기를 달러로 환산해서 표기하는 것에 익숙하고 자국의 통화로 표시하는 경우는 재무팀에서 손익 결산을 낼 때에나 활용하게 된다.
그 이유는 판매자와 수입자 간에 모두 달러를 기준으로 표기하는 것이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런 달러는 어떻게 해서 세계적인 통화가 될 수 있었고 앞으로 그 지위는 어떻게 될까 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게 들리는 브레턴우즈 체제나 닉슨 쇼크 플라자 합의 같은 역사적인 순간들을 시간 순으로 복기해봄으로써 달러의 역사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보고자 한다.
그럼 세계 경제에서 돈의 흐름은 어떻게 발생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자.
Ⅰ. 달러 발행은 왜 국채와 연동될까?
네덜란드 유대 무역업자들 영국으로 자리를 옮기다.
해상권을 장악한 영국은 이를 어떻게 해서든지 국부 증대에 활용해야 했다. 크롬웰은 1651년 항해조례를 발표하고 세계 무역에서 네덜란드의 독주를 끝내고 영국이 등장한다.
해상무역에 종사하는 네덜란드의 유대인들은 영국으로 이주를 한다. 곧 세계의 경제력과 경쟁력이 유대인과 같이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유대인들 윌리엄을 돕다.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하고 영국 제임스 2세는 11년 만에 왕정으로 복고했고 유럽 대륙에서는 1672년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가 네덜란드로 쳐들어왔다.
네덜란드는 인구도 적은 데다 해군 중심이어서 프랑스 육군을 대적하기 힘들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위기에 대처할 지도자로 윌리엄 3세를 추대했다.
유대인들은 윌리엄을 도왔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유럽 곳곳을 떠돌던 그들은 이제 그들의 마지막 안식처인 네덜란드마저 가톨릭 국가에 패망하면 다시 정처 없는 방랑길로 내몰려야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윌리엄이 주도하는 전쟁기금 모금 기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전세게 유대인 디아스포라 망을 통해 엄청난 자금을 끌어들였다. 이 덕분에 네덜란드의 윌리엄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야망을 저지하고 1678년 평화조약을 맺었다.
1689년 윌리엄의 영국 왕위 계승, 유대 금융인들 따라와
영국의 제임스 2세가 전제정치를 고집하자 이에 반대하는 명예혁명이 일어났고 네덜란드의 윌리엄 공을 영국 왕으로 추대하여 불러들였다.
1688년 영국은 피 한 방울을 흘리지 않고 통치자를 교체했기 때문에 무혈혁명 곧 명예혁명을 완성 시킨다. 이듬해 2월 의회는 윌리엄 부처에게 권리선언을 제출하여 승인을 요구했고 부처는 그것을 승인한 뒤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해 윌리엄 왕을 따라 영국으로 건너간 인원이 호위 병력을 포함하여 3만여 명이었다. 민간이 가운데 반 이상이 유대 금융인들로 세파라디 유대인 3천 명과 아슈케나지 유대인 5천 명 등 총 8천 명의 유대인이 영국으로 옮겨갔다.
영국, 네덜란드로부터 국제금융 바통 넘겨받아
명예혁명 이전 영국은 오랫동안 종교 간, 민족 간 전쟁이 벌어지던 각축장이었으나 윌리엄과 메리가 즉위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1689년 영국 의회가 통과시킨 권리장전과 관용법과 같은 혁명적인 법률들은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였다.
권리선언을 기초로 같은 해 12월에 제정된 것이 권리장전이다. 그 내용은 제임스 2세의 불법행위를 열거한 뒤 의회의 동의 없이 법률의 제정이나 세금의 징수를 금지하며 의회를 자주 소집할 것과 국민의 재산을 강탈하지 않을 것 등을 규정하고 있다.
권리장전 공표 이후 이제까지 영국 정부는 단 한 차례도 국채 이자 지급을 연체하지 않았다.
또 비국교도를 포함한 개신교도들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용하는 관용법 덕분에 유대인들은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영국 사회로 진입해 산업혁명과 금융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를 토대로 영국은 세계의 패권국가로 비상한다.
네덜란드의 빌렘 공이 영국 왕 윌리엄이 되자 네덜란드의 유대인의 금융자본이 영국으로 건너갔다. 윌리엄의 경제관과 금융에 대한 시각을 잘 알고 있는 유대 금융업자들이 대거 옮겨 갔다.
마차도와 메디나 같은 유대 금융인들은 1689년 런던에 도착한 직후부터 네덜란드에서 번창했던 주식시장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네덜란드 경제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영국은 짧은 시간에 선진적인 금융산업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후 네덜란드 은행은 70~80년의 황금기를 마감하고 국제금융 중심지의 바통을 영국에 넘겼다.
이에 따라 그 뒤 네덜란드에서와 같은 저리로 대규모의 금융지원을 받은 영국 제조업은 나날이 발전했다. 그리고 무역 확대와 식민지 개척도 속도를 냈다.
영국은 네덜란드로부터 세계 최고의 해상국가 지위까지도 넘겨받아 사상 최대 규모로 세계의 상업과 식민정책을 주무르는 제국으로 탈바꿈했다.
전쟁기금 모금 기구를 주식회사 영란은행으로 만들다.
당시 유대 금융인들은 이미 네덜란드에서 1609년 세계 최초의 중앙은행 격인 암스테르담 은행을 만들어 화폐통합을 이루어냈던 사라들이었다.
그들은 영국 왕에게 큰 거래를 제안했다. 왕이 말한 전쟁 기금 모금 기구를 만들어 금괴를 모아 빌려주는 대가로 그 모금 기구가 왕실 부채를 담보로 은행권을 발권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곧 전쟁기금 모금 기구를 통해 120만 파운드의 자본금을 상인들로부터 모은 후 전쟁기금 모금 기구를 주식회사 영란은행으로 전환한 후 자본금 전액을 모두 국왕에게 대부하고, 대신 상인들은 왕실에 대부한 금액을 담보로 은행권을 발행해 지불수단으로 통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한 것이다.
영란은행을 본떠 만든 미국 연방준비은행
미국은 중앙은행을 설립할 때 영란은행 시스템을 그대로 따라 했다. 미국 중앙은행이 영국의 영란은행을 본떠 만들어진 민간은행연합체인 이유다.
1910년 11월 모건의 별장이 있는 조지아 주 연안의 휴양지 지킬 섬에서 비밀회의가 열렸다. 지킬 섬은 조지아 앞바다에 있는 J.P 모건 소유의 섬이었다.
여기에 모인 사람은 모두 7명, 국가금융위원회 위원장인 넬슨 올드리치 상원의원이 모임을 주최했다. 하지만 실제로 자리를 준비한 사람은 폴 워버그라는 독일계 이민자였다.
연방준비법이 만들어지고 법안을 만든 것은 입법부가 아닌 유대 금융인들이 주도했다. 주로 모건, 록펠러, 로스차일드 3대 금융 가문이 주축이었다.
이 중에서도 로스차일드 가문의 대리인 폴 워버그가 이를 주도했다. 이들은 중앙은행이라는 용어가 주는 부정적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연방준비 시스템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과거의 중앙은행이 20% 정부 지분을 인정한 것에 비해 100% 민영으로 설계했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은 민간은행들의 연합체
의회는 연방준비제도 법안을 치열한 논쟁과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13년 12월 크리스마스 이틀 전에 통과시켰다. 월가 금융 세력들에게 적대적인 민주당과 공화당 의원들이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난 틈을 이용하여 상하 양원에 기습 상정하여 처리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유대인의 압박에 못 이겨 FRB 법에 서명한 후 이렇게 토로했다 한다.
위대하고 근면한 미국은 금융시스템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금융시스템은 사적 목적에 집중돼 있다. 결국 이 나라의 성장과 국민의 경제활동은 우리의 경제적 자유를 억압하고 감시하고 파괴하는 소수에 의해 지배된다.
우리는 문명세계에서 가장 조종당하고 지배당하는 잘못된 정부를 갖게 되었다. 자유의사도 없고 다수결의 원칙도 없다. 소수 지배자의 의견과 강요에 의한 정부만이 있을 뿐이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서 미국은 비로소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를 비롯해 12개 지역 연방 은행을 주축으로 하는 중앙은행 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일종의 은행 카르텔이 탄생했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산하에 12개 지역 연방은행
연준 조직은 미 전역을 보스턴, 필라델피아, 뉴욕, 클리블랜드, 리치먼드, 애틀랜타, 시카고, 세인트루이스, 미니애폴리스, 캔자스시티, 댈러스, 샌프란시스코 등 12개 지역으로 나누었다.
1914년 11월 16일 12개 지역 준비은행이 업무를 시작했다.
미국 정부는 연준에 국채 이자를 지불할까?
미국 연준도 이번 코로나 사태로 5조 달러 이상의 미국 국채를 보유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나머지는 채권시장을 통해 민간부문이 갖고 있다.
미국 정부는 연준의 국채에도 이자를 지급한다.
연준은 미국 정부가 지급하는 이자를 받아 주주들 곧 연준 설립 시 자본금을 댄 민간은행들에게 6%의 배당금을 지급하고 연준이 쓸 경비를 뺀 다음 나머지는 다시 미국 정부에 돌려준다는 점이다.
이것이 미국 정부가 재정 적자 곧 국채 발행을 크게 무서워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Ⅱ. 달러는 어떻게 기축통화가 되었나
케인즈의 무서운 선견지명
1차 대전 직후인 1918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독일에 과도한 배상금을 물려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으나 거부되었다.
그는 독일에 물린 혹독한 배상금으로 전무후무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이며, 이는 독일 국민들을 빈곤으로 내몰아 극단적인 혁명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해 히틀러 시대와 새로운 전쟁을 예감했다.
케인즈의 예견은 그의 표현 그대로 현실화되었다. 결국 독일에 대한 거액의 전쟁배상금은 화폐 발행량 증가 초인플레이션 히틀러 등장으로 연결되어 2차 대전을 불러왔다.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은 인플레이션이었다. 2차 대전이라는 참화는 케인즈의 선견지명이 거부된 결과였다.
케인즈의 세계화폐와 달러의 대결
케인즈는 이렇게 말했다. 인플레이션은 부당하고 디플레이션은 비효율적이다. 독일의 경우처럼 극단적인 인플레이션을 제외하면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중에 디플레이션이 더 안 좋다.
빈곤한 세계에서 임대인을 실망시키는 것보다 실업을 유발하는 것이 더 안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중 하나를 꼭 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두 가지가 모두 안 좋고, 모두 피해야 한다.
케인즈는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는 세계화폐가 개발되어야 한다고 믿고 스스로 그런 화폐의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패권국가가 극단적인 무역수지 적자를 볼 경우, 무역 분쟁은 물론 환율 전쟁을 일으킬 우려가 있고 또한 이는 세계 경제를 불경기에 빠트릴 염려가 있어 이를 예방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마침내 그는 세계화폐 방코르를 고안해냈다. 방코르는 금을 비롯해 30개 상품 가격을 기초로 가치가 산정되며 각국은 자국 화폐를 일정한 고정환율로 방코르와 교환할 수 있게 했다.
케인즈는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학문적 연구를 토대로 달러 체제에 대항하는 세계화폐 방코르와 이를 청산해줄 국제 청산 동맹을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세계 각국이 무역에서 각 나라 통화를 사용하지 말고, 이 세계화폐를 공통으로 사용하자는 주장이었다.
브레턴우즈 체제,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금본위제로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 부부의 막내로 태어난 화이트는 집안이 가난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차 세계대전 때 군에 자원입대했다. 전쟁이 끝나자 화이트는 참전용사 지원 프로그램 덕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잠시 교수생활을 한 뒤 재무부에 취직했다. 당시 재무부 장관이던 모겐소는 그의 능력을 알아봤다. 유대인끼리 통하는 면도 많았을 것이다.
화이트는 모겐소 장관 보좌관을 거쳐 승승장구해 차관보에 오른 뒤 브레턴우즈 회의에 미국 대표로 참석했다.
화이트는 케인즈에 밀리지 않았다. 그의 적극적인 공세는 미국이라는 힘과 유대 금융자본의 파워를 배경으로 압도적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참가국들도 2차 대전의 후유증으로 미국의 도움이 절실할 때였다.
결국 회의는 여러 나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뜻대로 마무리되었다.
미국은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금환본위 제도를 실시키로 했다. 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시키고 그 외에 다른 나라 통화는 달러에 고정시키되 1%의 범위 내에서 조정할 수 있는 재량을 부여했다.
이로써 브레턴 우즈 체재가 개막되었다.
세계가 달러를 의심하다.
브레턴우즈 체제 초기인 1947년까지만 해도 미국 정부는 전 세계 금의 70% 이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서독과 일본의 눈부신 경제 성장과 무역 증대로 세계 무역에서 미국의 위상은 점점 축소되었으며, 베트남 전쟁으로 늘어난 국가채무, 통화 팽창 등으로 달러 가치는 1960년대 들어 심각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세계를 우롱한 닉슨의 배신
1971년 8월 9일 영국의 경제대표가 재무부에 직접 와서 자그마치 30억 달러를 금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미국 정부는 잘못하면 국가부도 사태를 불러올지도 모르는 비상 국면에 직면한 것이다.
그다음 주 13일 금요일, 닉슨 대통령은 돌연 행정부 주요 경제 정책 담당자들 16명에게 자신과 함께 캠프 데이비드 군사기지로 가자고 명령을 내렸다. 대통령은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모든 길을 차단함으로써 이 모임에 대한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했다.
금 고갈에 직면한 미국이 자신만 살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미국은 금 고갈로 인해 1971년 8월 15일 달러와 금의 교환을 일방적으로 중단하는 닉슨 쇼크를 단행해 브레턴우즈 체제를 스스로 파기하는 비도덕적 배신을 감행했다.
닉슨은 투기꾼들에 의해 달러가 공격받고 있다면서 일시적으로 달러의 금 태환을 중지한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미국이 하루아침에 금과 달러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림으로써 그간 금 교환권이라고 믿어온 달러와 또 그 달러에 연동되어 있던 전 세계 화폐를 모두 종잇조각으로 전락시킨 엄청난 사건이었다.
닉슨 쇼크와 동시에 미국 정부는 모든 수입품의 관세를 10% 올리는 보호무역을 단행하고, 국내적으로는 90일간 물가와 임금을 동결하고, 대외적으로는 달러의 평가절하를 단행하여 목표 금값을 온스당 35달러에서 38달러로 변경했다.
달러, 기사회생의 묘수를 찾아내다.
1970년대 달러 가치가 이렇게 떨어지자 상품 가격을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그 영향이 산유국들에게 미쳐 국제 원유 가격을 대폭 끌어올리는 빌미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아랍권의 패배로 끝난 이후, OPEC 산유국들은 석유의 무기화를 외치던 참이었다.
산유국들은 석유 수출을 줄이고 원유 가격을 인상했다. 달러 가격이 1배럴당 2.9달러에서 3개월 만에 11달러로 뛰었고 세계 경제는 휘청거렸다.
그러는 와중에 미국의 천재 외교관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놀라운 외교성과를 연속적으로 이루어냈다. 그는 소련과의 전략무기 제한협정을 체결하고, 죽의 장막 중국의 문을 열고,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1975년에는 OPEC 종주국인 사우디의 파이살 왕과 비밀협상에 성공했다. 곧 미국이 사우디 왕권을 보호해주는 대신 세계 최대 유통 상품인 석유의 거래를 달러로만 하도록 하는 묘수를 찾아낸 것이다.
그 뒤 석유의 달러 거래로 달러 수요가 커진 덕분에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Ⅲ. 4번의 세계 환율전쟁, 어느 나라가 주도했나
강달러를 외치는 미국, 깊숙한 속내는 약 달러 정책
미국은 전통적으로 채무국 가다. 그들은 호황기에는 빚을 내서 소비하고 수입해 즐긴다. 그리고 빚이 턱밑에 차오르면 달러 가치를 인위적으로 떨어뜨려 누적된 외상값, 곧 국제 채무의 대대적 탕감으로 덕을 본다.
이렇듯 남의 빚으로 살아가는 국가는 약달러를 지행 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빚 탕감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국의 고민이 있다. 세계 기축통화로서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강달러를 지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강달러란 돈의 실질 가치가 높아서가 아니라 국제 결제 통화로서 강한 지배력을 뜻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장이 달러를 요구하게 만들어야 한다. 방법은 여러 가지다. 특히 위기의 징후가 보이면 세계의 투자자들은 안전자산인 달러로 회귀하는데, 유럽 재정위기가 좋은 예이다.
미국 곧 세계 기축통화국의 입장에선 세계 경기 위축과 통화 경색을 막기 위해 우선 달러를 많이 풀어야 한다. 그래야 기축통화의 장악력이 유지된다.
미국이 유럽의 재정위기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이유이다. 미국은 기축통화의 권력이 주는 엄청난 시뇨리지 효과(기축통화를 보유한 나라가 누리는 경제적 이익)를 양보할 수 없는 입장이다.
미국의 고의적 환율전쟁
1930년 대공황 즈음의 1차 환율전쟁 (1921 ~ 1936)
브레턴우즈 체제를 붕괴시킨 2차 환율전쟁 (1967 ~ 1987)
플라자 합의로 촉발된 3차 환율전쟁 (1985 ~ 1995)
글로벌 금융위기로 촉발된 4차 환율전쟁 (2008~ )
1차 환율전쟁
1930년대 대공황 때 시작되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주요 강대국들이 수출 경쟁력 확보를 위해 자국의 화폐 가치를 경쟁적으로 떨어뜨리고 무역 장벽을 높게 쌓았다.
이 두 가지 곧 보호무역과 환율전쟁이 세계 경제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1933년 4월 미국은 통화량 확대를 위해 금본위제를 이탈했다. 이로써 달러 가치는 하루아침에 69%나 떨어졌다.
수출 경쟁국들한테는 청천벽력 같은 날벼락이었다. 주변국들의 손해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형적인 인근 궁핍화 전략이었다. 이로써 수출 경쟁력에서 월등히 앞서 나간 미국의 산업생산은 연간 10%씩 늘어났다.
이로부터 촉발된 각국의 평가절하 경쟁은 전 세계를 경제 침체의 구렁텅이로 몰고 갔다. 세계 무역이 회복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루스벨트의 이러한 평가절하는 이후 선례가 되어 미국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이루어졌고, 이는 다른 국가들로 하여금 달러가 기축통화에 어울리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루스벨트는 금은 복본위 제도를 운영하며 화폐 발행량을 늘리기 위해 세계의 은을 대량으로 사들였다. 그 통에 은본위제 국가들은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 정부는 은본위제 통화제도가 붕괴되어 사회 혼란이 극심해지면서 공산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2차 환율전쟁
1971년 8월의 닉슨 쇼크였다. 금본위제였던 브레턴우즈 체제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이후 금본위제는 달러 본위제로 바뀌었고 금값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이는 OPEC이 국제 원유가를 2달러에서 10달러로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일명 오일쇼크였다.
3차 환율전쟁
일본과 독일의 경제 대국화와 미국의 무역적자 심화가 발단이었다. 미국은 무역적자를 극복하기 위해 달러화 약세를 유도했고 1985년 플라자 합의를 이끌어낸다.
이로 인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 시작되었고 일본 자본에 엄청난 손실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반사이익으로 한국의 수출이 급성장할 수 있었다.
4차 환율전쟁
2010년 10월 더블딥 이중침체, 우려가 커지자 양적완화를 발표하고 중국 환율 절상을 촉구하면서 환율전쟁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양적완화 결과 2012년 8월 말까지 브라질 헤알화가 2002년 말 대비 75% 급등한 것을 비롯해 일본 엔화가 46% 올랐다. 우리 원화도 2012년에만 달러화 대비 8%가량 절상되어 그해 세계 주요 통화 중에서 가장 많이 올랐다.
양적완화는 달러화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실제로 1차 양적완화 때 10%, 2차 때 5% 정도 떨어졌다.
유동성 확대가 위험한 이유
주요 공황들은 모두 통화 교란으로 발생했다. 그 출발은 유동성 공급과잉이었다. 유동성이 버블을 키우고 그 버블이 터짐으로써 경제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주식 등 자산 가격의 증가는 기업의 내재가치 증가에 비례해 커지는 것이 순리다. 그런데 시중의 유동성 확대로 주가가 내재가치에 비해 턱없이 높아지면 그것이 바로 버블이요, 버블이 터지는 게 공황이다.
위기를 유동성으로 막는 것은 부실을 파헤쳐 시장에서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유동성으로 부실을 덮어주어 부실을 키우는 것과 같다. 각국의 유동성 확대 곧 환율전쟁이 세계 경제의 암적인 존재이자 위험한 이유이다.
[ 글을 마치며 ]
긴 글 중에서 꼭 필요한 세 가지를 꼽으라면 이렇다.
첫 번째는 미국 연방준비제도 위원회는 한국은행과는 성질이 다르다는 것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위원회는 국가 기관이 아니라 민간 기관의 연합체라는 것이다. 미국이 국채를 발행하게 되면 연방준비제도 위원회는 국채를 매입하고 이자 수익을 올린다.
이자 수익은 미국 국민의 세금에서 나오게 된다.
연방준비제도 위원회의 입장에서는 미국이 더 많은 국채를 발행하는 것이 오히려 좋다.
이자수입이 늘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 입장에서도 연준이 적정한 이자 마진을 제외하고는 국고로 귀속시켜주기 때문에 걱정 없이 국채를 발행할 수 있고 정계에서는 금융 자본을 쉽게 융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불만이 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빚으로 만들어진 경제의 끝은 결국 언젠가는 그 빚을 청산해야 하는 시간을 맞이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이 대공황 같은 경제 위기를 만들어낸다는 것도 잊지 말자.
두 번째는 달러는 기축통화 지위를 위해서 더 많이 유통되는 것을 꿈꾼다.
이 말은 굉장히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달러를 전 세계의 모든 국가가 사용하는 것을 미국이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미국의 달러를 자국의 통화로 사용하는 국가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미국의 달러화는 지위가 강해지게 된다.
캐나다가 유럽이 중국이 모두 달러를 쓰게 된다면 달러를 발행할 수 있는 미국의 경제적인 속국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이 때문에 자국은 자국의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국 화폐를 사용하는 것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인 시스템이 불안정하거나 금융 공학이 발달되지 못한 나라는 이미 달러를 자신들의 통화로 사용하는 것을 채택하고 있는데 파나마 같은 국가가 대표적이다.
물론 경제력이 큰 나라들은 모두 자국의 통화가 있고 유럽의 경우에는 비효율을 개선하기 위해서 유로화를 출범하기도 했지만 결국 미국의 달러의 지위를 위협하지는 못했다.
미국은 달러를 통한 기축통화의 지위를 유지하는 한 자신의 위기 상황에 통화를 조절해서 이를 쉽게 극복할 수 있고 반대로 환율 전쟁의 대상국이 되는 나라는 경제적인 위기를 맞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이 찍어낸 달러를 일정 부분 보유해야 하는 숙명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외환을 보유하게 될 경우 미국이 양적완화를 통해 달러 유통량을 늘리면 그 손해는 고스란히 달러를 보유한 사람들에게 전가되는 것이라는 것도 잊지 말자.
세 번째는 환율전쟁의 근본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미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쓰는 단어는 아니다. 환율전쟁을 하는 쪽이 미국이기 때문이다.
금본위 제도를 채택한 것이나 브레턴우즈 체제를 출범시킨 것, 닉슨 쇼크, 플라자 합의 모두 미국이 원해서 발생된 일이다.
현재의 코로나로 인한 전 세계적인 양적완화도 어찌 보면 미국의 주도로 다른 나라에까지도 여파가 미친 것이라고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달러화의 공급이 미치지 못하는 국가들은 자국의 환율을 방어할 수단이 없어지게 되고 미국의 금리 인상 시기가 도래하게 되면 상상할 수 없는 인플레이션을 맞이할 수도 있다.
코로나로 인해서 발생된 위기가 점점 걷혀가고 있다. 이 위기의 끝에는 분명 유동성 확대로 인해서 보이지 않았던 경제 문제들이 서서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문제의 일차적인 여파는 대출금이 많은 사람, 부채가 높은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 것이다.
두 번째는 자산 시장의 최고점에 구입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세 번째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서 이를 헷지 할 수 있는 수단이나 자산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곤란해질 수 있다.
반대로 가장 좋은 사람은 현금 흐름이 많은 사람이 될 것이다. 현금 보유액이 아닌 현금 흐름을 발생시킬 수 있는 수단을 보유한 사람들에게 선택권이 높아지게 될 것이다.
그다음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에게 기회가 올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서 보유 자산이 하락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이제부터는 자산의 급격한 상승을 기대하기보다는 자산의 가치 하락을 방어하는 쪽으로 계획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참고 도서 : 돈의 인문학 (홍익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