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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ndmer Jan 12. 2022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삶과 죽음에 대한 그의 빛나는 이야기


[ 글을 시작하기 전에 ]


이어령 선생님이 하신 말씀 중에서 인상 깊었던 대목이 있다.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는다는 것이다. 


상당히 단순한 사실인데 이 말을 듣는 순간 뭔가 기존에는 몰랐던 사실을 깨닫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영원히 늙을 것 같지 않았고 나이가 들 것이라는 상상을 잘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당시 그 말을 동영상을 듣는 순간 아 나도 이제는 나이가 조금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라는 생각을 심도 깊게 하게 된 순간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이처럼 삶에 좋은 화두를 던져주는 것은 삶을 좀 더 풍요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시간을 내어서 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이어령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을 읽고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가 있어 정리해보고 느낀 점을 적어보고자 한다. 


 Ⅰ. 어둠과의 팔씨름


작년 시월에 선생님은 라스트 인터뷰에서 빅뱅처럼 모든 게 폭발하는 그런 꿈을 꾼다고 하셨죠. 너무 눈이 부셔서 볼 수 없는 어둠, 죽음이 곁에 누웠다 간 느낌이라고요. 


평생 죽음을 기억하라고 외치던 선생님은 드디어 곁에 가까이 와서 누운 죽음을 잘 사귀어보기로 하셨고, 그렇게 알게 된 그 미스터리하고 섬뜩한 친구에 대해 저와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기로 하셨어요. 


요즘엔 어떻게 밤을 보내고 계십니까? 


요즘엔 밤마다 팔씨름을 한다네.


팔씨름을요? 야밤에 깨어 누구와 팔씨름을 하십니까? 


근육에 빠져 더욱 얇아진 스승의 팔뚝을 나는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매일 밤 나는 죽음과 팔씨름을 한다네. 어둠의 손목을 쥐고서 말이야. 


어둠의 혈관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포효하는 나의 스승을 상상해보았다.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띤 채 그는 파일을 열어 시 한 편을 읽어주었다. 


한 밤에 눈뜨고 죽음과 팔뚝 씨름을 한다. 근육이 풀린 야윈 팔로 어둠의 손을 쥐고 힘을 준다. 


식은땀이 밤이슬처럼 온몸에서 반짝인다. 


팔목을 꺾고 넘어뜨리고 그 순간 또 하나의 어둠이 팔뚝을 걷어 올리고 덤빈다. 


그 많은 밤의 팔뚝을 넘어뜨려야 겨우 아침 햇살이 이마에 꽂힌다. 


심호흡을 하고 야윈 팔뚝에 알통을 만들기 위해 오늘 밤도 눈을 부릅뜨고 내가 넘어뜨려야 할 어둠의 팔뚝을 지켜본다. 


빈 컵에 물을 따르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여기 유리컵에 보이차가 들어갔지? 이 액체가 들어가서 비운 면을 채웠잖아. 이게 마인드라네. 우리 마음이 항상 욕망에 따라 바뀌지? 그래서 보이차도 되고 와인도 돼.


똑같은 육체인데도 한 번도 같지 않다. 우리 마음이 늘 그러잖아.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지. 


네. 날씨처럼 변하는 게 감정이지요. 


그런데 이것 보게. 그 마인드를 무엇이 지탱해주고 있나? 컵이지. 컵 없으면 쏟아지고 흩어질 뿐이지. 나는 죽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내 몸은 액체로 채워져 있어. 


마인드로 채워져 있는 거야. 그러니 화도 나고 환희도 느낀다네. 


저 사람 왜 화났어? 뜨거운 물이 담겼거든. 저 사람 왜 저렇게 쌀쌀맞아? 차가운 물이야. 죽으면 어떻게 되나? 컵이 깨지면 차갑고 뜨겁던 물은 다 사라지지. 


컵도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러나 마인드로 채워지기 이전에 있던 컵 안의 Void는 사라지지 않아. 

공허를 채웠던 영혼은 빅뱅과 통했던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거라네. 알겠나?


  Ⅱ. 큰 질문을 경계하라. 


묻는 자로서 어떤 질문을 경계해야 합니까? 


큰 질문을 경계해야 하네. 


문인에게 다짜고짜 문학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사람은 문학을 못하네. 그런 추상적인 질문은 무모해. 

철학자에게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아인슈타인에게 과학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면 대답할 수 없어.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랬지. 인간은 세 가지 부류가 있다네. 


개미처럼 땅만 보고 달리는 부류. 거미처럼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사는 부류. 거미 부류는 허공에 거미줄을 치고 재수 없는 놈이 걸려들기를 기다리지.


뜬구름 잡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학자들이 대표적이야. 


마지막이 꿀벌이네. 개미는 있는 것 먹고 거미는 얻어걸린 것 먹지만 꿀벌은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들어. 


개미와 거미는 있는 걸 gathering 하지만 벌은 화분을 transfer 하는 거야. 그게 창조야.


여기저기 비정형으로 날아다니며 매일매일 꿀을 따는 벌! 꿀벌은 문학의 메타포가 있어. 


작가는 벌처럼 현실의 먹이를 찾아다니는 사람이야. 발 뻗는 순간 그게 꽃가루인 줄 아는 게 꿀벌이고 곧 작가라네.


  Ⅲ. 바보로 살아라, 신념을 가진 사람을 경계하라. 


천재가 있으면 특별 교육시켜야 해요. 특권이 아니에요. 오히려 불쌍한 애들이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 세상에 내보내기 전에, 쓸모를 못 찾은 놈에게 눈곱 하나 떼서 붙여주면 그 아이가 화가가 되고, 귀지 좀 후벼서 넣어주면 그 아이가 음악가가 되는 거예요. 


너 세상 나가면 쓸모없다 조롱받을 테니, 내 눈곱으로 미술 해 먹어라. 너 세상 나가면 이상한 놈이라고 왕따 당할 테니 내 귀지로 음악 해 먹어라. 


그게 예술가예요. 예술가들은 그 재능 빼면 세상 못 살아요. 아무것도 못해서 범죄자 돼요. 그러니 자비를 베풀라는 말이에요. 


그런 아이들을 위해서 특별한 학교를 만들어주는 게 자비예요. 


앨버트로스라는 새가 있다네.


날개가 일이 미터 되는 큰 새 말이지요?


그래. 앨버트로스는 하늘을 날 때는 눈부시지만, 날개가 커서 땅에 내려오면 중심을 못 잡고 기우뚱거려. 사람이 와도 도망 못 가고 쉽게 잡혀서 바보새라고 한다네.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앨버트로스가 땅에 내려오면 바보가 되는 거야. 그게 예술가야. 날아다니는 사람은 걷지도 못해. 


예술가들은 나는 사람들이야. 시인 보들레르처럼, 이상처럼. 그들은 앨버트로스에서 자기를 본 사람들이지. 

지상에서 호랑이처럼 늑대처럼 이빨 있고 발톱 있고 잘 뛰는 놈이라면 예술가가 되겠나. 


앨버트로스니까 예술하는 거야. 


 [ 글을 마치며 ]


크게 두 가지를 기억하고 싶었다. 


첫 번째는 생애 마지막 순간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삶을 열심히 살았던 덕분인지 생에 마지막을 생각해보거나 상상한 적이 거의 없다. 


항상 오늘 하루가 바빴고 나름대로 치열했고 고민이 되었고 변화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시간들이었다. 


덕분에 지금 이 순간에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가에 대해서만 고민했지 3년 후 5년 후의 미래 같은 것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상상을 해보았다. 


30년 후에 나는 어떤 모습일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 모습이 지금 내가 원하는 모습인가 혹은 실현 가능한 모습인가에 대한 상상을 해봤다. 


그런데 상상한 모습은 괜찮은 모습이었고 내가 원하는 나이 든 나의 모습이었는데 실현 가능한 모습과는 약간 거리가 멀지 않았나 싶었다. 


이 생각이 들고 나니 지금부터라도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좀 더 고민을 해보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두 번째는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그 능력을 활용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특별한 능력이 다 제각각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스스로 그 능력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조금만 다듬으면 빛을 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그 능력을 살리지 못하고 평균적인 능력에 맞춰서 달려가다 보니 모두가 다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어령 선생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도 있다.


모두가 다 성향이 다르고 특징이 다른데 모두가 다 똑같은 방향을 달려 나가야 하니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성과를 올리지 못하는 슬픈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각자가 다 제각각 가진 특징을 활용해서 360도로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모두가 다 성과를 올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생각하는 바가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모두 다 같은 방향으로 균일한 목표만을 놓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양성도 사라지고 성과도 없고 피곤하기만 한 상황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겠다.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책이었다. 


 참고 도서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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