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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ndmer Mar 22. 2022

금융투기의 역사

계층 사다리를 잇는 부를 향한 로드맵



[ 글을 시작하기 전에 ]


로미오와 줄리엣, 이몽룡과 성춘향, 당 현종과 양귀비, 시저와 클레오파트라, 이들 사이의 연정이 로맨스인가 스캔들인가는 시대에 따라, 관점에 따라, 특히 처한 입장에 따라 결론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점은 분명하다. 그 당사자들은 천하와도 바꾸지 않을 만큼 진지하였다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투기의 광풍이 몰아질 때 그때의 당사자들 역시 진지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코스닥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가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지나고 나서는 무모한 투기였음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다들 끝없이 주가가 올라갈 줄 알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던 사람들도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사태의 종말을 올바르게 예측해서 주가가 적정 수준 이상으로 올랐다고 생각하고 빠져나왔던 사람도 많았지만 이후 이들까지 다시 매수세에 가담하였기에 주가가 그렇게 급등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그들은 스스로를 불나방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사숙고하였고 현명하게 행동하고자 최선을 다해 노력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허무한 결과를 맞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싶겠지만 적어도 그 당시에는 냉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반복되는 투기의 역사를 보면서 현재를 판단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럼 과거 투기 광풍의 역사는 어떤 것들이 있었고 어떤 특징이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Ⅰ. 거품으로 만들어진 세계


무엇이든 교환하려는 인간의 성향은 거의 본능에 가깝다. 미래를 점치려는 경향도 인간 본성 깊숙이 자리 잡은 특성이다. 


이것이 투기의 원인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된다. 19세기 미국의 유명한 상인 케네는 인생은 투기이고, 투기는 인간과 함께 탄생했다고 단언하였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투기는 기원전 2세기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로마에는 현대 자본주의 금융 시스템과 비슷한 여러 제도들이 도입되어 있었다. 


로마법이 자유로운 자산이전을 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장은 번성하였고, 돈은 이자를 받고 자유롭게 대출되고 있었다. 


외환거래가 등장하였고 은행이 발행한 환어음을 통해 로마 국경 너머까지 자금결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태동한 이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영국 런던, 미국 뉴욕이 세게 바존의 중심지였던 것처럼 로마는 당시 금융의 중심지였다. 


모든 자본이 로마에 집중된 것이다. 신용이라는 개념이 이미 출현하였고, 선박 등 재산의 안전을 위해 원시적이지만 보험이라는 개념도 등장하였다. 


로마의 시민들은 부를 향한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낼 수 있었고, 소비를 통해 자신의 부를 과시할 수 있었다. 도박 역시 일상화되었다. 


근대 초기의 금융 투기


중세 유럽 문화는 이데올로기적인 면에서나 실질적인 면에서나 금융투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봉건제 아래에서는 로마시대와 같은 금융 시스템이 전혀 필요 없었다. 


로마에서 번성했던 화폐를 통한 거래가 물물교환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내재가치보다 싼값에 사서 비싼 값에 파는 것은 정당치 않을 뿐만 아니라 불법적인 것이라고 말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에 따라 중세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공정 가격이라는 개념을 부활시켰고, 고리대금업을 금기시하였다. 


이윤추구는 도덕적으로 부해한 것이고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여겼다. 


아퀴나스는 이윤을 향한 끝없는 탐욕을 권력과 섹스에 대한 탐욕과 함께 3대 중죄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중세 말기 전통은 붕괴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채권을 발행해 유통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베니스에서는 13세기 중반부터 도시국가의 채권이 매매되었다. 마침내 투기가 부활했고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Ⅱ. 튤립 투기


1630년대 네덜란드의 경제적 상황은 투기적 안락감이 퍼질 수 있는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스페인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졌고, 30년 전쟁으로 강력한 경쟁자였던 동유럽의 직물산업이 붕괴되어 네덜란드 직물산업이 호황을 맞고 있었다. 


당시 유럽 국가 가운데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았던 네덜란드인들은 앞다투어 교외에 대저택을 짓는 등 호황을 만끽했고, 이에 따라 부동산 가격도 급상승했다. 


늘어난 부에 취한 네덜란드 사람들의 머리에선 칼뱅주의적 검약 정신이 사라진 지 오래였고, 그들은 소비지향적인 국민이 되었다.


풍요와 오만에 젖은 네덜란드인들은 과시욕을 드러냈고 더 큰 부를 안겨줄 대상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 대상이 바로 튤립이었다. 


꽃에 대한 네덜란드인들의 강한 애착은 지리적인 요인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그들은 국토가 좁은 탓에 대형 공원을 가꿀 수 없었다.


대신 앙증맞은 공원을 만들어 한가운데에 가장 아름다운 꽃을 심었다. 그리고 꽃들은 당시 네덜란드의 칙칙한 농촌 분위기를 털어 내기도 했다.


이 꽃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이 튤립이었다. 특히 좁지만 기름진 땅은 튤립이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는 환상적인 조건이었다. 


초기 튤립은 귀족과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튤립이 처음 유럽에서 꽃을 피운 것도 고상한 꽃 재배 취미를 갖고 있던 당시 유럽 최고의 은행가인 푸거의 아우크스부르크 공원이었다.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꽃의 색깔에 따라 튤립을 다양하게 분류했다. 또 위계 서열에 따라 군 계급과 같은 이름을 붙였다. 


최상급 꽃은 입에 황실을 상징하는 붉은 줄무늬가 있어 황제라고 불렸고, 이어 총독과 제독, 장군 순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1624년 황제 튤립은 당시 암스테르담 시내의 집 한 채 값과 맞먹는 1,200 플로린에 거래되었다. 


투기의 에피소드


공황을 거치면서 튤립 투기는 극단적인 튤립 혐오로 바뀌었다. 이는 1992년 대공황 이후 주식에 대한 미국인들의 혐오와 같은 것이었다. 


라이든 대학에서 식물학을 강의했던 에브라드 포스티우스는 지팡이로 눈에 띄는 튤립을 모두 후려칠 정도였다고 한다. 


일확천금 바람이 한 차례 네덜란드를 휩쓸자 노동을 성스럽게 여긴 칼뱅주의적 전통도 무너져 내렸다. 


한쪽이 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다면 다른 쪽은 빈털터리가 되었다. 투기가 계층 사이의 위화감을 악화시킨 것이다. 


대화록의 저자는 투기꾼들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튤립이 투기의 대상이 되자, 네덜란드 삽화가들은 튤립을 해골, 모래시계, 사치와 사악함, 흥청거림을 표현하는 소재로 활용했다. 


또 튤립은 바보들을 표현하는 상징이 되었고, 사람을 경솔하게 만드는 유혹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튤립의 또 다른 이미지는 덧없는 인간을 상징하는 버블이었다. 이는 로마의 도덕주의자 바로가 인간은 거품이다라고 선언한 데서 유래된 것이다. 


버블은 빠르게 부풀어올라 빛을 영롱하게 반사해 바라보는 사람을 황홀하게 하지만, 한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바람이나 공기에 의해 짧은 시간 동안 유지될 뿐이다. 바람이라는 말은 선물거래를 의미하는 네덜란드 말에서 상징적으로 쓰였다. 


이후에는 주가조작을 일삼는 악덕 주식거래꾼을 우화적으로 표현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튤립은 갑자기 화려한 꽃을 터트리고 이내 꽃잎들을 흩뿌린 뒤 줄기가 고사하는 자연의 순환을 의미하기도 했다. 


 Ⅲ. 머리장식 높이와 치마 길이


1690년대 초반 주식시장의 버블은 당시 여성들의 머리장식 높이와 궤를 같이했다. 


당시 과시적인 여성들은 머리장식을 서서히 높였는데, 주가가 최고점에 도달한 뒤 다시 무너지기 시작한 1695년에는 머리장식 높이가 2미터에 달했다. 


주가는 여성들이 머리장식 높이에 따라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했다는 리처드 스틸 경의 말은 당시 상황을 거울처럼 보여준다. 


현대 한 경제학자가 리처드 스틸 경의 말에서 힌트를 얻어 1920년대 주가 흐름과 여성들의 치마 길이를 비교 연구해 치마 주가 이론을 내놓기도 했다.


콜럼비아 비즈니스 스쿨의 폴 니스트롬 교수인 그는 패션 경제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19년 미국 여성들의 평균 치마 높이는 키의 10% 수준이었으나, 미국 경제가 1차 세계대전 이후 강한 회복세를 보인 1920년에는 20%까지 높아졌다. 


미국 경제가 침체를 보인 1921년에는 치마 높이가 다시 10% 수준까지 낮아졌고, 미국 증시가 호황에 접어든 1924년~1927년 사이에는 25%까지 높아졌다. 


여기에서 여성 신장의 25% 수준이라는 것은 거의 무릎까지 올라오는 치마 높이는 1929년 후반기까지 유지되다가, 대공황이 발생한 뒤에는 거의 바닥을 쓸다시피 하는 수준까지 내려왔다. 


스틸 경의 주장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있다. 대담하고 과시적인 유행은 주식거래에서 얻은 수익이 과시적 소비를 위해 쓰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또 투기로 일확천금을 거머쥔 사람들에 대한 에피소드의 주제가 되었던 과시적 소비를 이해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론 일확천금을 벌어들인 투기꾼들의 부인들이 머리장식에서 투기가 만연한 시대의 도덕적 해이를 읽을 수 있다. 


투기의 시대에는 사치와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건전한 정신이 자취를 감추기 때문이다. 


 Ⅳ. 미시시피 버블이 불러온 해프닝


미시시피 버블은 스코틀랜드의 화폐 개혁론자 존 로에 의해 발생했다. 


그는 금으로 교환할 수 없는 화폐를 사용하면 경제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유럽의 왕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논리를 설파했으나 동의를 얻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1717년 봄 프랑스의 오를레앙 공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그는 단 2년 만에 방크 제너럴이라는 은행을 설립했다. 


그리고 대형 합병회사를 창설하는데, 그 회사가 미시시피였다. 프랑스 정부의 뒷받침을 받은 미시시피는 나중에 프랑스 동인도회사로 개칭된다. 


이를 이후 20세기 공격적인 자본가들이 외형성장을 위해 벤치마킹하기도 한다. 


존 로이 거침없는 외형 확장은 또 다른 자금조달 방법을 필요로 했다. 자금조달의 필요성 때문에 불환 화폐가 발행되고 무제한의 화폐 발행은 프랑스 경제를 엄청난 인플레이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마침내 프랑스는 역사적인 버블에 휘말리게 된다. 


1719년 12월은 존 로이 전성기였다. 하지만 이는 찰나와 같은 순간이었다. 존 로가 오늘날 중앙은행의 총재처럼 행동하기 시작하자 거품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다. 


방아쇠는 콩티 왕자가 보유하고 있는 지분을 팔아 금과 은으로 바꿨다는 소문이었다. 1720년 1월 초 이 소문이 퍼지자, 두려움이 삽시간에 파리를 뒤덮기 시작했다. 


주식을 현금으로 전환하려는 열풍이 불고, 프랑스 중앙은행의 금고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금 유출을 막기 위한 비상조치가 필요했다. 1720년 5월 주가와 은행권의 가치를 2분의 1까지 점진적으로 떨어트리는 조치가 취해졌다. 50%의 평가절하를 단행한 것이다. 그리고 공황이 엄습했다. 


일주일 뒤 존 로이 방크 제너럴은 예금지급을 거절했다. 그리고 존로는 해임되었고 그의 거창한 시스템은 철저히 무너졌다. 


그리고 존로는 해임되었고 그의 거창한 시스템은 철저히 무너졌다.


미시시피 버블로 프랑스에서는 온갖 해프닝이 벌어졌다. 오를레앙 공의 어머니인 오를레앙 공작부인이 1719년 당시 상황을 이렇게 쓰고 있다. 


지금 프랑스의 부가 얼마나 되는지를 도저히 알 수 없다. 모든 사람의 입에서 억억 소리가 난다.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프랑스가 엄청난 배금주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었다는 점이다. 


어림잡아 3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미시시피에 투자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몰려들었다. 이들 가운데는 경제학자 출신 영국 의원인 허치슨과 사우스 시의 대표이사인 램버트, 아이슬 레이 백작 등 유명인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접수창구 앞에 장사진을 치고 있는 대중들을 제치고 청약자 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특혜를 받았다. 


 Ⅴ. 철도 버블


슘페터는 혁신은 자본주의 경제 역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투기꾼은 자본주의 경제의 전위대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일단 혁신이 성공하고 안정적인 수익이 확보되면 자본이득보다는 투자원본의 안전과 수익의 예측가능성에 더 관심을 갖는다. 


투기꾼과는 달리 현재 상태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미래의 수익을 기대하더라도 현재의 상태가 변화 없이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신기술 개발과 희소성은 늘 투기꾼들을 흥분시켰다. 1690년대 잠 수구와 내 연기과, 유치한 수준의 경보기, 1720년대 기관총과 영구 회전바퀴 등은 투기꾼들을 매료시켰던 기술혁신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발생하기 전까지 투기꾼들을 들뜨게 했던 신기술은 기존 기술의 조잡한 조합이거나, 돈이나 벌어볼 심산으로 벌였던 사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천재적인 발명이 수없이 이루어졌다. 


이는 인간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운하의 개발이 커뮤니케이션 혁명의 시작을 알렸고, 다음으로 철도와 자동차, 라디오, 항공기, 컴퓨터가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인터넷 혁명이 발생하고 있다. 각각의 커뮤니케이션 혁명 사례들은 당대의 투기꾼들을 매료시켰고 투기꾼 들고 이 혁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철도 버블의 서막 : 운하 투기


1767년 맨체스터 북서부에 위치한 워슬리의 광산에서 방직공장 단지가 들어선 맨체스터 남서부의 린콘을 잇는 45킬로미터짜리 듀크 브리지 워터 운하가 건설되었다. 


마침내 영국에서 운하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20년 동안 영국에서는 1,500킬로미터가 넘는 운하가 건설되었고, 운하 건설 회사들의 주가는 하늘을 쳤다. 


브리지워터 운하는 투자자들에게 대규모의 자본이득과 배당수익을 안겨주었다. 


따라서 운하가 완성되어다는 소식은 당시 사람들을 흥분시킨 빅뉴스가 되었다. 


석탄과 공산품, 농산물의 물류비용을 크게 낮추는 등 운하로 인해 얻게 되는 이익이 너무나 커, 당시 사람들은 운하가 기존 질서를 해체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이익이 너무나 커, 당시 사람들은 운하가 기존 질서를 해체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운하의 개통으로 새로운 시장이 열리자 상품값은 하락하고, 운하 인근 땅값은 상승했다. 


사정이 이쯤 되면 투기가 발생하는 게 당연한 법, 1790년대 초반 마침내 운하 투기의 막이 올랐다. 


이때 50개의 새 운하를 건설하기 위한 법이 통과되었고, 이는 1740년 이후 50년 동안 건설된 운하의 두 배가 넘는 것이었다. 


운하 건설회사의 주식청약 접수가 들판과 여관, 심지어 교회에서까지 실시될 정도였다. 


지역사회 중개인들과 운하 건설회사의 직원, 변호사, 여관 주인들로 구성된 일단의 투기꾼들은 1630년대 튤립 투기 단과 유사한 운항 사무실을 열어 투기를 부추겼다. 


새로운 운하 건설로 도시와 시골이 생산자와 시장이 연결되어 지역경제가 활기를 띠었지만, 운하 건설 기술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일찍이 로마인들도 운하를 건설했다. 운하는 단순히 수로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지역까지 수상교통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철도는 인간생활에 아주 의미심장한 변화를 야기했다. 1820년대 처음 증기기관차가 출현했을 때 당시 사람들은 열광과 전율을 동시에 보였다. 


괴물 같은 증기기관차를 처음 접한 당시 사람들은 열차가 독성이 가득 찬 연기를 내뿜어 새를 죽게 하고 하얀 양털을 새까맣게 만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많은 사람이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초창기 철도는 두 차례나 투기열풍을 일으켰다. 첫 번째 철도 열풍은 미국에서 스톡턴과 달링턴 사이에 철도가 개통된 1825년에 불어닥쳤다. 


이후 대중들은 철도가 불러일으킨 변화로 주변 땅값이 오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지주들의 반발도 사그라들었다. 


언론과 철도회사들은 철도는 전례가 없는 혁명적인 진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투기의 시작 


1844년 후반기의 영국 경제상황은 나쁜 편이 아니었다. 이자율은 지난 100년 동안 가장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연이은 풍년으로 곡물값 또한 낮게 형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철도건설 비용이 낮아졌고 철도회사의 당기순익은 빠르게 상승했다. 당시 3대 철도회사는 통상 이자율이 거의 3배에 이르는 10%의 배당을 실시했고, 철도 혁명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나날이 증폭되고 있었다. 


1844년 투기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 허드슨은 이해 겨울 개인 재산으로 철도 레일을 대량 매점했고, 그의 예상은 적중해 석 달도 지나지 않아 레일 값은 3배 이상 뛰었다. 


철도 수사슴들


주식시장 동물원에는 황소와 곰, 절름발이 오리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뒤늦게 한 무리의 수사슴이 동물원에 뛰어들었다. 


이 순간 동물원은 공포 분위기에 휩싸인다. 자연 그대로의 수사슴들은 전혀 해롭지 않은 유순한 초식동물이다. 


그들은 조금만 먹어도 만족한다. 하지만 철도 수사슴은 끝없는 식욕을 갖고 있는 포식자이다. 


그들은 철도 투기꾼들의 피와 살로 이뤄진 초과수익을 끊임없이 갈구한다. 그러나 철도 수사슴도 숲 소 그이 사슴이 갖고 있는 특성 하나를 갖고 있다. 


남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를 아주 부끄러워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노련한 사냥꾼들도 이 철도 수사슴을 추적하는 데 애를 먹을 정도로 이들은 여우보다도 교활하다. 


철도 수사슴은 단기 시세차익을 노린 철도회사 청약꾼들을 빗대어 표현하는 데 딱 들어맞는 별명인 셈이다. 


기차는 떠나고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는 말처럼, 1846년 여름 흉작까지 겹쳐 영국 경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철도가 일상화되어 기업들은 과거처럼 재고물량을 쌓아둘 필요가 없게 되자 수요가 줄었고, 이는 경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코노미스트는 1845년 고삐 풀린 투기열풍으로 발생한 개인들의 손실이 전체 경제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고 기록했다.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은 1846년 10월 주식청약으로 배정받은 주식값이 떨어져 발생한 손실은 6,000만 파운드에 이르고, 엑서터 주민들이 입은 손실만도 800만 파운드가 넘는다고 주장했다. 


당시 영국 각급 법원들의 일정은 파산선고 공판으로 꽉 차 있었다. 존 프란시스는 2~3년이 지난 뒤 파산선고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유명인사들이라고 기록했다. 


 [ 글을 마치며 ]


미래를 점치려는 욕망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우리는 내일 비가 올 것인지 알고 싶어 하고 날씨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이를 좀 더 정확하게 예측하는 사람들은 부족의 리더가 될 수 있었고 심지어 신격화되기도 했다. 


근본적인 이유는 날씨를 예측해 준비를 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서 더 많은 농작물을 경작할 수도 있었고 위험한 일을 피할 수도 있었다. 


이런 미래 예측을 하고자 하는 본능이 어찌 보면 우리의 투기 성향을 잘 나타내 주는 것과도 동일해 보인다. 


금융 투기의 예시로 이탈리아에서 도시들이 발행한 채권을 다시 복기해보자. 


이윤추구가 불법인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투기에 대한 본능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리고 초기에 채권이 발행되었던 목적은 미래에 대한 준비라는 명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도시의 발전을 위해서 건축물을 짓는다던지 도로를 확장한다던가 하는 개념으로서의 채권이 발행되었을 것이고 미래에 발생될 수익을 현재에 보증하고 그 권리를 가진 것이 채권일 것이다. 


그 채권을 기반으로 도시는 돈을 유용할 수 있었고 도시환경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반대로 현금이 있지만 마땅한 투자처가 없던 사람들은 자본 소득이라는 점에서 오는 추가적인 수입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 정도만 되면 합리적이라고 보이지만 이 채권이 다시 추가적인 가치를 가지게 되고 그 가치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려지면서 투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어떤 투자도 처음에는 무리해 보이지 않고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의 목적은 사라지고 너도나도 뛰어들면서 더 많은 자금이 몰리고 위험이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자금이 쏠리게 된다. 


여기에 다수의 투자자가 합류하게 되면서 상황은 비이성적으로 흘러가게 된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면 당시에 투자가 얼마나 무분별하고 비합리적이었는지 알게 되지만 그 시점에는 그런 판단을 내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지금 돌이켜보면 튤립 투기, 철도 투기, 미시시피 투기 같은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 상황은 그렇게 무리한 투자라고 생각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례로 중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도 남해회사의 광풍 같은 투자 열풍에 휩쓸려 평생 모은 자산을 모두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남긴 말은 천체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는 있었지만 인간의 욕망을 가늠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이처럼 투기 열풍에 휩싸여 사회가 움직일 때에 그 안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일이라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 도서 : 금융투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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