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 쇼크로 인해서 미국은 달러 패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페트로 달러 시스템을 탄생시킨다.
페트로 달러 시스템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오일 쇼크가 왜 발생했는지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오일 쇼크 ( Oil Shock)는 말 그대로 전 세계가 기름값이 왜 이래? 라며 뒷목을 잡고 쓰러졌던 사건이다.
총 두 번의 큰 충격이 있었는데 순차적으로 정리해 보자.
제1차 오일 쇼크는 1973년이다.
중동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면서 이스라엘 편을 드는 미국과 그 친구들에게 기름 안 팔아라고 선언하며 시작되었다.
기름값은 4배나 폭등했는데 배럴당 3달러에서 순식간에 12달러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기름을 넣으려고 주유소 앞에 수 킬로미터씩 줄을 섰다.
기름이 떨어졌다는 표지판이 걸리면 시간을 허비한 운전자들끼리 싸움이 날 정도로 치안이 불안정해졌다고 한다.
한국도 오일 쇼크에 직격탄을 맞았는데 1973년 당시 서울의 밤거리는 암흑 그 자체였다.
네온사인의 70%를 강제로 끄게 했고 밤늦게 방송차량이 돌아다니며 불 끄고 잠을 자는 계몽 운동을 펼칠 정도였다고 한다.
2차 오일 쇼크는 6년 뒤인 1979년이다.
이번에는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서 석유 생산이 멈췄다.
1차 때보다 가격이 더 심각하게 상승했다.
기름 사재기가 발생되었고 한국에서는 기름값이 오를 것이라는 소문에 주부들이 시장에서 비누, 화장지, 설탕을 마구 사들였다.
석유값이 오르면 공장 물건 값도 다 오를 게 뻔했기 때문이다.
에너지 절약 붐도 일어났는데 이때부터 전 세계적으로 작은 차가 최고라는 인식이 생기며 연비 좋은 일본차가 미국 시장을 휩쓸기 시작했다.
미국 고속도로의 속도 제한이 시속 55마일 (약 88km/h)로 낮아진 것도 이때 기름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서머타임도 도입되었는데 햇빛이 있을 때 일을 빨리 끝내고 전기를 아끼자는 취지에서 서머타임이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유가상승을 막을 수 없자 홀짝제 주유 시스템도 도입했는데 자동차 번호판 끝자리에 따라 주유할 수 있는 날을 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해결하지 않는데 제도적인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미국은 에너지 안보를 탄생시켰고 일시적인 대책이 아닌 시스템을 구축한다.
전략 비축유를 건설해서 기름 공급이 끊겨도 버틸 수 있는 거대한 창고를 만든 것이다.
땅속 소금 광산에 수억 배럴의 원유를 저장하기 시작했고 현재도 상당한 양의 비축유를 보유하고 있다.
에너지부를 창설해서 에너지만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장관급 부서를 만들어 국가 차원의 에너지 관리를 시작했다.
국제 에너지 기구 설립을 주도해 미국은 서방 국가들을 모아 IEA(국제 에너지 기구)를 만들었다.
위기 시 서로 기름을 나눠 쓰고 정보를 공유하는 에너지 동맹을 결성한 것이다.
미국은 여기에 더해 중동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에너지원 자체를 다양화했다.
알래스카 송유관을 건설했다.
환경 문제로 반대가 심했던 알래스카 유전 개발을 오일 쇼크 직후 전격 승인했고 미국 자체적으로 기름을 캐기로 한 것이다.
원자력 및 대체 에너지 투자에도 적극적이었는데 석유 화력 발전소 비중을 줄이고 원자력 발전소를 대거 짓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태양광이나 풍력 같은 에너지 연구에 국가 예산이 투입되었다.
자동차 연비 규제도 도입해 기름만 많이 먹는 큰 차 대신 연비가 좋은 차를 만들도록 제조사에 강제 규제를 걸었다.
이때부터 미국의 거대한 자동차 전성기가 저물고 작은 차들이 도로에 나오고 미국 자동차 산업이 일본에게 주도권을 내주게 되는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결정타는 페트로 달러 시스템으로 사우디와 손을 잡고 석유 결제는 오직 달러로만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요약해 보면 미국은 오일 쇼크를 계기로 단순히 기름을 아끼는 단계를 넘어 비축유를 쌓고 동맹을 맺고 달러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위기를 패권 유지의 기회로 바꿔버렸다. 역사는 반복된다. 과거를 꾸준히 다시 알아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