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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찬재 May 30. 2019

너희도 죽음이 두렵니?

모든 건 마음에 있단다.

ⓒ 이찬재

성묘의 날에


썽빠울로의 겟세마네 공동묘지에 너희 형제를 데리고 간 것이 알뚤이 4학년 때였나? 브라질 사람들이 아주 많이 왔단다. 성묘의 날이었거든. 날씨는 더웠지만 바람은 시원히 불었다. 묘지마다 꽃들이 꽂혀있어서 죽음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 식구들은 웃으며 잡풀을 뽑고 이름이 새겨진 동판을 닦았지. 반짝반짝 닦았어. 그러고는 향을 꽂고 술잔에 술을 따라놓고 두 손 모아 고개 숙여 절을 했어. 너희들도 술잔에 술을 따라 그 앞에 놓았지. 내가 나의 부모님이 죽어서 여기에 누워 있다고 하며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어.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죽으면 여기 묻힐 거야.”

그냥 그렇게 말했어. 아니 꼭 말하고 싶었단다. 어린 손자들에게 죽음이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그날은 하늘이 맑고, 사람들은 조용조용 움직였고, 묘지마다 꽃들이 아름다웠기에. 그런데 너희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죽을 것이고, 땅속에 묻히게 될 거라는 말에 놀랐나 보더라. “할아버지 할머니도 죽어요?” 

“그럼,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단다.” 집에 돌아간 알뚤은 엄마한테 산소에 갔던 얘기를 하며 할아버지 할머니가 죽어서 땅에 묻히는 것이 정말이냐고 물어봤다지?



ⓒ 이찬재

죽음의 의미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너희는 아니? 내가 죽는다는 말을 처음 들었던 때가 아마 네댓 살이 됐을 때일 거다.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람은 죽는단다”라고 말했다. “엄마도 아버지도 죽어요?”

그렇다는 말을 듣자마자 너무도 북받쳐 울어버렸다. 그날 울던 기억은 여든이 가까운 지금까지도 선명하다.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그리 울었나? 어린 내가, 왜 그리 서러웠을까?



ⓒ 이찬재

모든 건 마음에 있는 것 같구나


브라질에 처음 도착해서 살 집을 구하러 다니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어. 그걸 꼭 이야기해주고 싶구나. 글쎄 공동묘지가 동네 한복판에 있지 뭐겠니? 복덕방 직원의 안내로 아파트 높은 층 집을 구경하다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어. 바로 아래 푸른 나무들이 많이 있어서 공원인가 했는데 공원이 아니라는 거야. 공동묘지였지.

동시에 떠오른 생각, ‘비 뿌리고 바람 부는 날은 어쩌지?’ 동네가 썽빠울로 중심 구역이었는데, 한국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 상갓집 조문을 갔다가 브라질 사람들을 보았는데 관 속에 누인 시신 얼굴에 키스도 하고 손도 만져주고 있더라. 산 자와 죽은 자의 거리가 없다고 해야 할지, 죽음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 다르다고 봐야 할지 한동안 충격에 빠졌었어. 

이제 몇십 년 살다 보니 조문 가면 나도 꼭 관 가까이 가서 얼굴을 보게 돼. 그러는 것이 이상하지 않게 됐어. 모든 것은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았어. 마음이 그렇게 이끄는 것이지.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은 오랜 관습에서 오는 것이었어. 브라질 사람들로부터 죽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배웠단다.



ⓒ 이찬재

나오며

그래도 삶은 아름답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아이들이 문득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생각나는 어느 날, 그런 날이 분명 있을 게다. 나는 지금 그때를 생각해본다. 고요한 마음으로 할아버지 그림을 보게 될 그때를, 그림 곁에 적힌 할머니의 이야기를 읽게 될 그때를. 아이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젊은 시절이 있었구나.’ ‘진짜 전쟁도 겪었어. 피란도 갔어!’ ‘할아버지는 노래를 잘 불렀다면서 왜 우리가 좋아한 아이돌 노래는 배우지 않았을까?’ ‘내가 어릴 때 이랬구나. 할아버지 할머니랑 많이 놀았었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남편. 안 보는 척 슬쩍 얼굴을 바라본다. 입가의 주름은 깊어지고 어느새 백발이 된 남편. 보청기를 꽂아도 잘 들리지 않아 가장 즐기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어쩔 수 없이 바둑과 당구 같은 스포츠인 남편. 그런데도 한국이, 북한이, 미국이, 중국이,일본이, 러시아가, 브라질이 그리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알고 있는 신기한 남편. 남편을 바라보며 늙으면 다 신령이 된다는 말을 믿게 된다. 당신은 우리 집을 지켜주는 수호신.


브라질에서 우리는 열심히 일했다. 꾀를 부리지 않았다. 우리 물건을 사준 이들은 다 브라질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그저 고마웠다. 브라질은 푸근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다. 말이 서툴러도 다 알아듣고, 누가 넘어지면 달려와 부축해주고 물을 가져와 마시라고 하는, 고맙다는 말을 아주 잘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몰래 곁눈질하는 걸 모르는 사람들의 나라다. 그래서 우리도 그곳에서 웃으며 살았다. “36년 만에 고향에 오니 좋지요?” 하고 묻는 이들이 많다. 이제 고향은 어디에도 없다. 아니다. 나에게 이제 고향이 더 많아졌다. 서울도 내 고향이고 통영도 내 고향이고, 부산도 썽빠울로도, 지금 살고 있는 부천도 내 고향이다. 저 멀리 있어서 ‘언제나 가려나’ 하는 평안도 박천은 아주아주 오래된, 참으로 아련한 내 고향이다.


“왜 다시 한국으로 오셨어요?” 하고 묻는 이들도 있다. 모르겠다. 브라질에서 36년이나 살다가 왜 한국으로 돌아왔는지. 답이 없을 리 있겠냐고? 아니다. 삶에는 답이 없는 것도 있더라. 

어떤 땐 어려움과 고통이 세 번 네 번 쓰나미처럼 겹쳐서 오기도 했다. 잠자는 것도, 아침에 눈 떠지는 것도 무서울 때가 있었다. 누구 하나 만나기도 두렵고 싫을 때도 있었지. 그럴 때 가족과 친구들의 도움, 그리고 시간의 도움이면 어느 순간 스르르 해결되곤 했다. 그렇지 않고서 어찌 살아낼 수 있었겠니. 우선 “왜 그래? 누가 그랬어?” 하고 나서줄 내 편, 내 언덕, 내 식구들이 있는 곳이 곧 고향이다.


글을 쓰다 색이 예쁜 목도리에 새로 산 청바지를 입고 집을 나섰다. “잠이 잘 안 오는데 어쩌지요?” 하고 의사에게 물어볼 참이다. 공원에는 오늘도 아이들이 많다. 이리저리 달리며 웃고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어느 아이가 갑자기 와앙! 하고 운다. 어디지? 누구지? 왜지? 나도 모르게 다급해진다. 빙 둘러 있는 대여섯 명의 아이들. 눈물을 닦아주는 아이, 무릎을 쓰다듬는 아이, “괜찮아. 피 안 나” 하고 위로하는 아이……. 누가 울었는지 모를 한 무리의 아이들이 다시 일어나 우르르 뛰어간다. 다시 웃음소리가 터진다. 한참을 앉아서 아이들을 보았다. 그러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은 아예 잊어버린 게지.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모든 이를 행복하게 한다. 마음이 답답할 때나 우울할 때 들으면 다 잊어버리게 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너희는 알고 있니? 밝고 맑은 너희 소리는 혼자 있는 이에겐 그 외로움을 잊게 해주고, 오랫동안 입원해 있는 환자의 아픔도 고쳐준다는 사실을. 너희의 웃음소리가 얼마나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슬프게도 잊고 있을 때가 많다. 그래도 걱정하지 말자. 너희는 늘 웃지 않니? 그 웃음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때때로 떠올리자.


우리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에 담고 보니 문득 지나온 인생이 보이더라. 어떤 때는 눈앞에 놓인 하루하루 살아내는 게 무척 힘들고, 벅차고, 피곤하기만 했을 때가 있었지. 그런데 여기 서서 돌아보니까 모든 순간이 아름다웠더라. 찬란했더라. 참으로 삶은 아름다운 것이었더라. 너희에게 꼭 이 말을 해주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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