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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카페 딸 Aug 22. 2022

사띠(Sati),당신은 무엇으로 아는가?

사실, 미얀마는 국가의 경제성장이나 국력과 상관없이 국제적으로 정평이 나 있는 위빠사나 수행원이 여러곳 있다. 고엔카, 마하시, 빤디따라마등이 바로 그곳이다. 그리고 내가 석달 가까이 -수행을 가장하여 빈둥대며 뒹굴 거린- 쉐우민이 있다. 어찌나 빈둥대고 노는 모양이 꼴 사나웠는지, 십년만엔가 쉐우민을 다시 찾았을 때, 사야도는 나에게 '너 또 놀러왔지?' 라고 물을 정도였다. 여기서의 사야도는 우리나라말로 풀이하면 은사스님 정도가 되겠다. 


사야도, 저 기억하세요. 

음, 알다마다. 그런데, 이번엔 얼마나 있다 갈꺼냐? 

오래 못있어요. 대략 보름쯤. 있다가 여행갈꺼예요.

애개, 보름? 너  또 놀러왔구나. 


사실, 쉐우민은 미얀마의 여러 위빠사나 수행원 중에서도 퍽 자유로운 수행 분위기를 가진 편이다. 나처럼 여러날 빈둥대며 수행을 게을리 한다고 해도. 결코 내쫓지는 않는다. 다만, 수행자의 책임을 적나라하게, 낱낱이, 사야도와의 면담시간에, 담담한 사야도 특유의 어조로 확인 받을 뿐이다. 그 담담한 확인사살(?)이 어찌나 뼈아픈지 마음만 아픈 것이 아니라, 온 몸 구석구석 살을 에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데, 그건 직접 가서 겪어봐야만 그 맛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수행자는 그와 같이 서슬퍼런 평가를 받은 후에도 끝끝내 수행원에 남아서 정진을 한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그와 같은 이상한 일이 코로나 전까지는 수행자 누구나에게 있는 일이었다. 


쉐우민이 아무리 방임에 가까울 만큼 자유로운 수행분위기를 가졌더라도, 초심자에 대한 교육이나 배려가 결코 가볍지 않다. 말그대로 모르면 알 때까지, 수행자에 따라서는 발걸음 하나하나까지 집어주며 수행에 필요한 지식과 소양들을 알려준다. 그 덕분에 나는 맨처음 수행원에 도착하자마자,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우 뗴자니아 사야도와 독대를 하는 영광을 얻었다. 내가 내 앞에서 몹시도 당연하고 별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은 몹시도 심각하고 중요하게 설명하는 중국계 승려가 그렇게 유명한 양반인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삼년이 지나서였다. (명상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특히 동아시아 권역에서 우 떼자니아 사야도의 유명세는 거의 아이돌급이다.) 


두 손을 합장해보겠니? 

(영문 모르고 이미 합장 했음) 

너는 그 두손이 마주 닿은 것을 알 수 있니? 

네, 그럼요. 

그럼, 어떻게 두 손이 마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니? 

두 눈으로 보고 있으니까요. 

그럼 두 눈을 감는다면? 

그래도 알 수 있지요. 

어떻게 알 수 있니? 

손과 손이 닿은 느낌이 있으니까요. 

그럼 그 느낌은 또 어떻게 알았니? 

어... 어... 어.. 


떼자니아 사야도가 나 뿐만 아니라, 쉐우민을 방문한 대부분의 수행자에게 사띠를 설명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대단히 단순하고 성의 없어 보이지만, 내가 알기로는 이것 만큼 간단하고 분명하며, 효율적인 설명도 없을 듯 하다. 사실, 사띠(sati)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감각중 하나다. 우리는 이와 같은 감각과 감각을 통하여 발현된 능력으로 우리가 태어나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정보를 습득하고 훈련을 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나가는 것이 아주 만만해지고 습관화 되어가면서 어느 순간 잊혀져 버린다. 때문에 그 감각을 실제로 느끼고 알면 될 뿐, 별다른 미사여구의 설명이 필요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부분은 헤맨다. 나 또한 한동안은 남의 다리를 긁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이유라면, 뭔가 대단한 사실이 있을 것 같은데, 알고보면 그냥 원래 있던 것이 그 자리에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어나서 몸을 뒤집고, 기어다니다 걷게 된 이후로, 너무나 많은, 불필요한 설명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 이렇게 심오한 철학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지만- 우리가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입에 넣고 씹을 때, 엄마가 그렇게 많은 설명을 하던가? 우리가 변의나 뇨의를 느끼고 화장실에 가야겠다고 생각할 때, 그 감각을 누가 설명해준 적이 있던가? 내내 기억을 떠 올려보면,-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생활을 배울 시기에,-엄마에게 들었던 가장 긴 설명은 신발의 오른쪽과 왼쪽을 헷갈리지 않는 방법이었다. 


우리는 위에서 말한 감각을 통해서 새로운 정보들을 인지하고 기억하며 새롭게 받아들였다. 사띠(sati)의 원래 의미 또한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빨리어로 사띠(sati)는 '기억하다' 라는 의미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것 한가지에만 의미가 한정되지 않는다. 주의, 알아차리다, 마음챙김, 깨어나다, 등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와 같은 의미들을 평면적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마치 책의 한 구절 처럼 순서대로 나열된 것이 아니고, 공감각적으로 이 모든 의미를 느껴서 아는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의 현실에서 이와 같은 의미가 발현되는 상황은 사야도의 설명만큼이나 단순하다. 내가 방금 방문을 열고나올 때, 오른발을 먼저 뻗었는가, 왼발을 뻗었는가? 열쇠로 방문을 제대로 잠갔는가? 화장실에서 칫솔에 치약을 짤 때, 치약의 몸통 가운데를 눌러 짜고 있는가, 끄트머리를 짜고 있는가? 이 모든 일들에 옳고 그름을 판단할 필요는 없다. 어떤 것이 더 효율적인가를 궁리할 필요도 없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보고 알면 될 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정은 조금 더 발전하여 마음으로 옮겨간다. 지금 내 마음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가? 나는 화가 나서 이 행동을 하는가? 아니면 기쁘게 하는가? 또, 주의를 기울여 하고 있는가? 덤덤한 가운데 슬픔이 묻어나지는 않는가? 매 순간을 살피는 것이다. 그러나 애써 노력하지 않는다. 그냥, 주의를 기울여서 알면 그 뿐이다 .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늘 새롭게 일어나지만, 우리 안에서 한번도 없었던 일은 아니다. 우리의 삶이 습관화 되기 전, 태어나서부터 적정의 나이까지 우리 안에서 지극히 본능적으로 일어났으며, 이와 같은 감각을 통해 받아들인 삶의 모든 정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앞서의 시기와 지금이 다른 이유는 우리가 대상을 새롭고 경의롭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 뿐이다. 이것은 받아들이거나, 아니거나의  문제 뿐만 아니라, 그 감각의 깊이도 함께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 어릴적 우리가 삶을 받아들였던 알아차림의 기능을 다시금 일깨워서 우리의 삶을 받아들이는 시도를 매 분, 매 초, 매 순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쉽지는 않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쉬울 수 없다. 사띠(sati)라는 기능 자체가 기계적으로 한결같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기 떄문이다. 만약, 그 기능이 기계적으로 움직인다면, 우리는 생물이 아니라, 자동차에 장착되어있는 블랙박스나 다름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띠 또한 우리의 마음으로 움직이는 기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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