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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카페 딸 Aug 23. 2022

사띠(Sati), 그다음.

나는 앞서 내가 아는 대로.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주워들은 대로'를 포함한, 사띠의 개념을 이야기하며, 애쓰지 않는 노력을 이야기했다. 이와 더불어서 사띠(sati)만 기울일 수 있으면 그뿐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아마도 이쯤 해서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논쟁을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거나, 그런 것에 애초 관심이 없거나. 어느 쪽이라도 매우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 명상은 언제 하지?                


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통해서 깊이 있는 사색이나, 훌륭한 철학적 고찰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명상을 통해서 번뜩이는 영감을 갖기를 바라고, 우리는 명상을 통해서 됨됨이가 반듯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가 원만하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그런 게 아니라면, 무슨 이유로, 명상을 배우기 위해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무더운 나라의 수행원을 일부러 찾아와, 하루 종일, 그것도 석 달 열흘씩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느냔 말인가. 어디 그뿐인가? 형태는 제각각 다르지만 인류 구원을 목적으로 평생을 수행에 헌신하는 구도자들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경지'를 이루려면 사띠(sati)를 하는 것 말고 뭔가, 이 세상을 이루는 심오한 논리, 혹은 인류 구원을 고민해야 하는 특별한 시간 별도로 가지거나 그에 걸맞은, 수련이 필요하지 않을까? 또한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나 또한 다르지 않다. 때문에 위와 같은 이유로, 사색이나 철학적 고찰은 '애를 써서' '피나는 노력을 한 끝에'  '처절한 산통을 거쳐서' 나오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내가 명상을 배우고 난 다음, 아니, 명상을 통해서 생각지도 못한 효험(?)을 보게 된 후로는 생각이 크게 달라졌다. 그와 같은 사고와 노력이 처음부터 흘릴 수도 없는 피를 흥건하게 흩뿌려야만 나오는 것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깊이 있는 사색과 영감은 꾸준하고 깊이 있는 사띠(sati)를 통해 자연적으로 발생, 또는 발견되는 것이다


물론, 빛나는 영감이나 깊이 있는 통찰, 사색을 위해서는 당연히 노력이 수반된다. 그러나 내가 기존에 생각하던 것과는 그 방향이 틀렸다. 통찰과 사색, 그리고 세상에 다시없을 명언 그 자체를 위한 노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진 과정을 보면 이해가 쉽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사고나 행동들 대부분은 어느 날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의 나이만큼, 우리가 처한 환경 속에서 삶의 경험을 통해 '형성' 된다. 빛나는 영감이나 깊이 있는 통찰, 사색 또한 이 세상에 없던 것이 아니라, 삶의 경험 속에서 극명하게 빛을 발하는 무엇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 빛나는 무엇이 우리 스스로를 통해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면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얼마나 새로운 삶의 경험과 정보를 얼마나 방대하게, 그리고 새롭게 자각하는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영감과 사고의 발현이 용이하도록 스스로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사띠(sati)의 이야기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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