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과 철구 #1

단편소설

by 고귀한 먼지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 기형도 '정거장에서의 충고' 中




충주역 앞 4차선 도로는 차가 별로 다니지 않아 한적했다. 2년 만이었지만 며칠 전에 왔던 것처럼 풍경은 변함이 없었다. 방금 함께 열차에서 내린 이들이 어딘가로 사라질 때까지 미영은 역 앞에 멀뚱히 서 있었다.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에도 몇몇은 누구와 통화를 하거나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통화하는 목소리를 빼면 지나치게 조용한 월요일 오후였다.

2년 전 충주를 처음 찾은 날, 미영은 철구와 탄금대 조정경기장에서 취재를 마치고 역 앞에 있는 한 모텔에 짐을 풀었다. 원래는 취재를 마치고 바로 서울로 돌아가야 했지만 둘은 새벽에 올라가기로 했다. 미영은 서울로 가는 열차표를 미리 예매했지만, 열차에 오르지 않았다. 모텔에서 미영과 철구는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

그날 둘은 자신들을 알아보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을 거닐었다. 시내를 관통하는 작은 실개천을 따라 천천히 걷던 둘은 분위기가 괜찮아 보이는 카페를 발견했다. 둘은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동안에도 별말이 없었다. 미영이 빨대를 저을 때 잘그락거리며 유리잔에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 사이에서 나는 유일한 소리였다.

낮에 미영과 철구는 장애인조정 국가대표팀을 지도하는 감독을 인터뷰하고, 탄금대 조정경기장과 중앙탑, 그리고 탄금대공원을 천천히 둘러봤다. 카페에서 미영은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취재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중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자고 가세요?”

“네.”

“5만 원입니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간 미영은 우선 창문 커튼을 열어젖힌 후 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논이 펼쳐져 있었고, 논과 논 사이에 꽤 규모가 큰 장애인재활원 건물이 솟아있었다. 건물로 향하는 작은 길은 한가로이 거닐고 싶은 목가적인 분위기의 길이었다. 길 양쪽에 펼쳐져 있는 논에는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미영은 눈을 감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포근한 봄 햇살을 가득 들이마셨다. 순간, 미영의 스마트폰 벨소리가 울렸다. 미영은 발신자를 확인만 하고 전화는 받지 않았다.


끝없이 길었던 짙고 어두운 밤사이로

조용히 사라진 네 소원을 알아

오래 기다릴게 반드시 너를 찾을게

보이지 않도록 멀어도

가자 이 새벽이 끝나는 곳으로


미영은 자신의 스마트폰 벨소리를 오랜만에 들었다. 벨소리가 울리는 게 두려워 항상 진동으로 설정해 놓는데 언제 소리로 바뀌었는지 미영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이유는 목소리가 어쩜 저리 곱지? 저 벨소리 한 2년 됐나?’


오랜만에 듣는 멜로디가 좋다고 느끼던 중 ‘뚝’ 하고 매정하게 소리가 끊겼다. 미영은 왠지 모르게 서운해 스마트폰을 침대에 쓱 던져버리고 자신도 침대에 누웠다. 한참 분주할 오후의 시간이 미영에게는 느리게 지나가는 것 같았다. 미영은 오랜만의 이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낯선 냄새를 맡았고, 눈을 감고 피부에 느껴지는 포근하고 낯선 봄의 공기를 느꼈다. 그렇게 누워 저녁을 먹기 전까지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완전히 잠에 취해 의식을 잃기 전에 ‘문자 왔숑’, ‘문자 왔숑’ 하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양 볼을 베는 것 같은 바람에 통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종종걸음을 해보지만 내려가는 계단은 보이지 않는다. 미영은 지금 자신이 걷고 있는 다리가 양화대교라는 걸 안다. 옆을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미영은 그냥 양화대교라는 것을 안다. 성산대교인가? 잠시 헷갈리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떨어질까 봐 무서워 옆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보지 않아도 아찔함을 느낄 수 있다. 언젠가 당산역 인근에서 볼일을 마친 후 양화대교를 걸어서 건넌 적이 있었다. 그때 마주 오던 자전거를 피하며 난간에 바짝 붙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 바라본 한강의 모습은 먹이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악어의 입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그랬는데. 다리 위나 배 위에서 물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충동을 못 이겨 떨어지게 된다고. 그 생각만으로 오금이 저려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최선을 다해 다리를 벗어났던 기억. 미영은 지금이 그때와 같은 상황이라는 걸 느낌으로 알 수 있다. 여의도에서 밝히고 있는 고층빌딩의 빛도 분명 고개를 돌리면 볼 수 있다. 하지만 미영은 웅크린 몸을 펴지 않고 앞으로 계속 걷는다. 드디어 다리를 내려가는 계단 앞에 이르렀다고 느끼지만, 계단은 어둡다. 그래도 망설이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딘다.


어?


미영은 본능적으로 안다. 발이 닿을 계단이 없다는 걸. 공중에 뜬 미영은 천천히 흘러간다. ‘난다’는 느낌이 아니다. 천천히 한강으로 밀려간다. 빠지는 걸까? 빠지면 엄청 추울 거 같은데. 몸에 얼음같이 차가운 물이 처음 닿을 때, 그 따가운 고통을 어떻게 견디지? 무서워. 점점 속도가 붙어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순간, 빛이 보인다.


미영이 눈을 떠보니 낯선 모텔의 천장이 보였다.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벽에 붙은 시계를 쳐다보니 오후 5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잠깐 눈을 붙였던 것 같은데 시간이 꽤 지나있었다. 몸이 무거운 게 아주 먼 곳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미영은 낮잠에서 깨어나니 허기가 느껴졌다. 밖으로 나가려고 스마트폰을 챙겨 화면을 보니 읽지 않은 카카오톡 메시지가 쌓여있었다. 미영은 그 메시지를 차마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미영은 밖으로 나가 밀린 숙제를 하듯 대충 저녁을 먹고, 어둠이 깔리는 동안 옛 기억을 더듬으며 시내를 거닐었다. 2년이 지났지만, 다행히 철구와 함께 갔던 카페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미영은 불이 켜진 카페에 들어가 그때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