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미영이 다녔던 학교 앞 대학로에는 낡고 허름한 주택을 개조해 장사를 시작한 술집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간판도 없이 ‘술 마시는 곳’이라는 낙서가 간판을 대신했다. 재밌게도 그 술집은 술만 팔았다. 안주는 술집 옆에 있는 할인마트나 치킨집에서 따로 사 와서 먹으면 됐다. 술집 내부 인테리어는 어설픈 명언과 곳곳에 붙어있는 낙서가 전부였다.
미영은 학생회 활동을 함께 하는 동기들과 그 술집을 종종 찾았다. 주로 1, 2차를 마친 후 헤어지기 아쉬울 때 마지막으로 남은 이들과 들르는 곳이었다. 그래서 가게에 들어서면 새벽 1시를 넘긴 시간일 때가 많았다. 그 시간에 그 술집에 가면 사람이 많을 때도 있었고, 사람이 적을 때도 있었다. 변함없는 건 술집을 운영하는 사장님이 항상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주인이 없는 가게의 냉장고에는 맥주와 소주가 가득 차 있었다.
미영은 단짝이던 한나와 그곳에서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은 적이 많았다. 한나가 미영에게 술집에서 털어놓은 속내는 대부분 혼자서 동현 선배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미영은 언젠가 새벽 5시가 넘어 한나와 함께 그 술집에 간 적이 있었다. 동이 터오기 바로 직전이었는데 술집은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두 사람은 새벽바람에 어느 정도 술이 깬 상태였다. 그냥 집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두려웠던 시절이었다. 한나가 호기심 삼아 술집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사장님으로 보이는 아저씨 한 분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약간 놀란 두 사람은 망설이다가 맥주 한 잔 마시고 가도 되냐고 사장님에게 기어드는 목소리로 물었다. 두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린 사장님의 눈빛은 뭔가가 빠져나간 공허한 눈빛이었다.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본 사장님은 후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주뼛주뼛 서 있던 미영과 한나는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걸 느낌으로 알면서도 무슨 용기가 났는지 딱 맥주 한 병만 비우고 가기로 했다.
두 사람이 어색하게 맥주잔을 비우고 있을 때 한 아주머니가 술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주머니는 미영과 한나를 잠깐 쳐다보더니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곤 사장님에게로 가 무언가를 얘기하는 듯싶더니 눈물을 훔쳤다. 사장님의 눈동자는 초점이 흐렸다. 무언가를 응시하는 것 같기도 했고,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기도 했다.
그곳에서 미영과 한나는 날이 밝아지는 걸 지켜봤다. 평범한 하루가 다시 시작된 것에 불과했지만 다시 시작되는 하루는 미영의 가슴을 두근대게 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열심히 무언가를 기다리며 밤을 새워본 적이 없었다. 조금 거창했지만, 세상을 바꾸는 일에 자신이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을 내 뜻대로 살고 있다는 믿음이 미영을 흥분시켰다. 그건 설명하기 힘든 설렘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누구나 스무 살은 찬란한 시기라고 말하지만 한 번도 그 말을 실감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여명이 사위고, 낡은 건물들 사이로 빛이 차오르며 세상이 드러날 때 미영은 자신의 삶도 어쩌면 찬란할 수 있다고 처음 생각했다. 그렇게 사장님을 잊은 채 미영은 처음 느껴보는 벅찬 가슴을 안고 자취방으로 향했다. 미영은 그날을 정확히 기억했다. 날짜를 정확히 기억할 수 있는 건 이틀 뒤인 5월 29일에 인문대학 학생총회가 열렸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