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과 철구 #4

단편소설

by 고귀한 먼지

철구는 미영이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지섭을 떠올렸다. 전역을 한 그 해, 철구는 처음으로 광주에 갔다. 낙엽이 흩날리던 11월 초순이었다. 광주역 앞 정류장에서 잘 오지 않는 시내버스를 타고 망월동으로 갔다. 초행길이라 한 정거장 앞에서 내린 철구는 적막한 길을 30여 분 정도 천천히 걸었다. 한적한 풍경을 바라보며 걷다 보니 국립묘지 정문이 눈에 들어왔다.

철구는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봤던 웅장한 조형물과 무덤들을 천천히 둘러보고 영정사진과 위패가 있는 유영봉안소에 들어갔다. 흑백사진 속의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아 철구는 머리가 쭈뼛 서며 소름이 돋았다. 귀신을 믿지는 않지만 분명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온이 내려가서 그런지 쌔 한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유영봉안소를 나와 철구는 구묘역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천천히 걸었다. 구묘역은 신묘역과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신묘역이 건물 안에 있다는 느낌이라면 구묘역은 거리 밖에 조금 방치된 듯한 느낌이었다. 곳곳에 날 선 현수막이 거칠게 묶여 있었고, 현수막에 쓰여 있는 글귀는 매서운 만큼 왠지 모르게 서러웠다. 철구는 구묘역의 무덤들을 천천히 둘러보다 한 무명 열사의 묘역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지섭을 생각했다. 그때 철구의 머릿속에 떠오른 지섭의 모습은 연필로 스케치한 것처럼 흐릿하면서도 투명한 느낌이었다.

지섭은 철구가 군복에 천주교 군종병 마크를 달고, 전역만을 기다리며 내무반을 어슬렁거릴 때 들어온 막내였다.


“어디서 왔어?”

“예, 서울에서 왔습니다.”

“고향도?”

“고향은,”


지섭은 충주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고 했다. 지금 충주에 계신 아버지는 친아버지가 아니라 양아버지라고 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작은아버지였다. 지섭은 태어나서 한 번도 친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친어머니의 얼굴 또한 보지 못했다고 했다.


“고향은, 광주라고 들었습니다.”

“들었어?”


지섭은 자신의 고향을 작은아버지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지섭의 친아버지가 실종된 후 두어 해 뒤, 지섭을 안고 친어머니가 작은아버지를 찾아왔다고. 지섭은 작은아버지 식구들에게 핍박을 당하거나 하진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많은 사랑을 받아 감사하면서도, 그러기에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고 했다. 그저 가슴속에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찾고 싶었다고.


“친아버지가 대학생이었을 때 말입니다.”

텅 빈 성당 안에서 무료하게 육공트럭을 기다리고 있을 때, 철구는 지섭의 과거를 들었다.

“그때 아버지가 고시 준비하신다고 전대 도서관으로 매일 공부하러 가시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날도 도서관으로 가셨다가 소식이 끊겼습니다. 제 어머니는 그때 결혼은 안 했던 것 같은데 암튼 그때 아버지가 사라지셔서 작은아버지도 그렇고 집안이 난리였다고 합니다. 제 생일이 1980년 12월 18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지섭은 중학교 때 이 사실을 알게 됐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가자마자 지섭은 친어머니를 찾으러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특히 친어머니의 고향이 여수라는 얘기를 듣고 여수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친어머니를 기억하는 이를 만나지 못했다. 대신 지섭은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달았다고 했다.

“미영 씨는, 행복하세요?”

“네?”

철구가 어색한 침묵의 시간을 깨뜨렸다. 미영은 철구의 질문을 바로 알아들었지만, 갑자기 뭔가가 훅하고 들어온 느낌이 들어 멈칫하며 본능적으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미영의 되물음에 철구는 말이 없다가 다시 천천히 미영에게 말했다.


“행복하냐고요.”

“뭐가요?”

“그냥…… 지금, 이런 거요.”

여전히 미영은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 질문이었다. 철구도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그럼, 철구 씨는요. 행복하세요?”

미영은 최대한 감정을 자제한 채 철구에게 되물었다. 철구는 반응을 보여준 미영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시비를 걸듯 질문을 툭 던진 것에 대해 사과할까 망설이다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 잠시 뜸을 들인 후 조용히 말을 꺼냈다.

“네. 전 행복해요.”

미영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해요. 지금 삶에 만족도 하고.”

“아, 그러세요.”

미영은 행복해서 좋겠다는 뉘앙스를 본의 아니게 대답에 섞은 것 같아 말을 하고 조금 후회가 들었다.

“근데, 그래서 불행해요.”

“네?”

미영은 다시 철구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뭐가요?”

“행복하기만 해서요. 그냥, 행복하기만 해요. 의미는 없고.”

“의미요?”

의미라는 말에 미영은 다소 혼란스러웠다. 그렇구나. 이 사람은 아직도 의미를 찾고 있는 사람이었구나. 의미라는 말을 오랜만에 들은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의미라. 어떻게 살아야 삶에 의미라는 단어를 쉽게 붙일 수 있을까?

“행복하기만 해서…… 죄짓는 기분이랄까?”

철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을 미영은 듣지 못했다. 의미라는 말에 그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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