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과 철구 #6

단편소설

by 고귀한 먼지

미영과 충주에서 하루를 보내고 수원으로 올라와 철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이제 곧 사라질 오래된 아파트단지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이었다. 수많은 삶을 품고 버틴 지 40년이 지난, 상처투성이의 몸을 웅크리고 있는 단지 내 건물들을 철구는 최대한 어루만지며 셔터를 눌렀다. 무표정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건물 앞에서 철구는 조용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여러 소리가 바람에 실려 철구에게 다가왔다. 김장하는 아주머니들의 분주한 소리와 학교 가기 싫어 떼쓰다 엄마에게 혼나는 소리, 놀이터에서 비비탄총을 쏘며 신나게 놀고 있는 소리, 밤에 소리를 지르며 귀가하는 아버지의 고함이 들렸다. 소리를 듣고 눈을 뜨면 철구는 어떻게 사진을 찍어야 할지 알았다. 아파트의 앞모습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찍기도 하고, 길 건너편에서 어깨를 웅크린 단지의 모습을 담기도 했다. 귀퉁이가 깨진 보도블록 틈새로 피어난 민들레를 향해 셔터를 누르고, 더러운 모래가 깔린 놀이터에 홀로 덩그러니 남아 있는 그네의 뒷모습을 여러 번 찍기도 했다.

그렇게 철구는 자신의 고향을 박제시켰다. 이 아파트단지는 지명(地名)으로 뭉뚱그린 추상적인 고향이 아니라 철구의 삶이 곳곳에 배어있는 진정한 고향이었다. 생각해 보면 철구는 태어난 후 한 번도 이곳을 제대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언제나 탈출을 꿈꿨으면서도 몸과 마음이 상처받으면 보잘것없는 곳으로 기어들어 와 웅크린 채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렸다. 그런 곳이 이제 곧 영영 사라져 버리게 됐다. 소멸할 고향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하는 것은 일종의 장례 준비와 비슷했다.

사진을 찍고 돌아온 철구는 이제는 창고처럼 변해버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철구는 불도 켜지 않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던가? 천장에 붙여놓은 별과 달 모양의 야광 스티커를 바라봤다. 20년이 지났는데도 아주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우주가 팽창하듯 20여 년의 시간 동안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철구는 지섭의 얼굴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 청춘이라 불린 철구의 시간을 지배한 건 지섭이었다.

동계 혹한기 훈련으로 대대 인력이 모두 떠나고 텅 빈 부대에는 열외자와 전역 대기자만이 머물렀다. 철구는 군 생활의 마지막 이틀을 부대의 모든 곳을 돌면서 보초를 섰다. 한 번에 몇 시간씩 똑같은 사람과 함께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그때 철구는 지섭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전에도 많은 얘기를 나눴지만, 그 이틀의 시간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속 깊은 얘기들을 나눴다. 그리고 지섭이 깨달은 해야 할 일이란 게 무엇인지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철구는 부대를 떠날 때 지섭에게 전역하고 만나면 친구로 지내자고 약속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역을 한 후 바로 복학을 하고, 학생회를 기웃거리던 2004년 봄이었다. 대학가에서 우연히 휴가를 나온 후임을 만났는데, 그 후임을 통해 한 달 전 포격 훈련을 받다가 지섭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보이저호 아세요?”

“네?”

“보이저호요.”

“그게, 뭐예요?”

철구의 질문은 역시 앞뒤 없었다.

“행성 탐사선이에요.”

“행성, 탐사선이요?”

“네.”

철구가 말했다.

“보이저 2호가 끝이 없는 우주를 향해 날아간 날이 1977년 8월 20일이에요. 지금도 우주 어딘가를 날고 있겠죠. 자신만의 항로로.”

말을 마친 철구는 고개를 들고 미영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게 웃는 모습을 미영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철구의 수줍은 미소에 미영은 설렜다.


“보이저 2호처럼 목적지가 어디가 될지 모르지만, 저도 이제 묵묵히 제 길을 한 번 만들어가 보려고요.”

“그 길이 무슨 길인지 물어봐도 돼요?”

철구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말을 꺼냈다.


“제게 소중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이루지 못한 일을 제가 대신할까 해요. 거기까지만 말씀드릴게요. 미영 씨도 미영 씨의 길을 가세요. 아직 늦은 건 아니니까.”


미영은 알았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아 꾹 참느라 입을 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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