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용산주공아파트에 처음 이사 올 때 어떤 기분이셨을까? 아직은 쑥스러워 물어보진 못했지만 용산주공에 관한 글을 마치기 전에 꼭 물어봐야겠다.
40여 년간 용산주공아파트에 살면서 나이를 먹은 건 나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내 가족들도 나처럼 용산주공아파트와 함께 세월을 보냈다.
아버지와 어머니, 큰형과 작은형, 그리고 나.
용산주공아파트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내 시작과 끝인 가족에 관한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제는 설 연휴, 추석 연휴가 아니면 다섯 명의 식구가 모두 모이는 것조차 힘들어진 우리 가족. 지금껏 살아오며 바라보고, 함께하고, 생각하고, 느꼈던 모든 걸 기록할 순 없지만, 가족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기억과 감정을 최대한 솔직하게 써보려 한다. 이것 또한 ‘용산주공’ 덕분이다.
아버지는 몇 년 전부터 배가 많이 나와 걱정이다. 혈압도 높으신데 좋아하시는 술을 여전히 즐기니 엄마의 잔소리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는 호칭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지만 사실 난 아직도 아빠와 엄마라는 호칭을 쓴다. 도저히 얼굴을 맞대고 아버지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수가 없다.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아마 계속 그럴 것 같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없다. 아버지가 세 살 때 의용군으로 차출돼 끌려가신 후, 지금까지 생사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세 살이던 때는 1950년이었다. 그리고 마을에서 가장 학력이 높다는 이유로 의용군 소대장이 된 할아버지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으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행방불명됐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들은 얘기에 따르면 원주의 한 고개를 넘어갈 때 미군의 폭격이 있었고, 그때 아마 돌아가셨을 거라고.
만약 할아버지가 그때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도 지금 연세가 100세에 가까우니 살아계실 확률은 높지 않다. 아버지는 몇 년 전에 납북피해자 신청을 하셨다.
할아버지가 의용군으로 끌려가신 얘기를 들어보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안타깝다.
할아버지의 형이셨던 큰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동남아시아의 어딘가로 징용돼 죽을 고생을 하시다 천운으로 조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해방된 후, 할아버지는 학업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늦깎이 중학생으로 입학을 하셨고, 학생 신분으로 결혼도 해 아버지를 낳았다. 하지만 그 시대는 평범한 이들에게 꿈을 허락하는 너그러운 시대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세 살이던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민족 최대의 비극이 시작됐다.
파죽지세로 남하한 인민군은 당시 할아버지와 큰할아버지가 계시던 충주시 소태면도 접수했다. 그리고 마을 초등학교로 건장한 남성들을 징집했다. 그때 할아버지는 징용을 다녀온 큰할아버지를 대신해 초등학교로 가셨고, 그렇게 가족들과 재회할 수 없는 이별을 하게 됐다.
지금 할머니는 원주에서 아버지의 이복동생과 함께 지내고 계신다. 우리 가족과는 거의 왕래가 없다. 내가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게 고등학생 시절이니 벌써 20년을 훌쩍 넘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세 살 된 자식을 남기고 떠나신 후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정신 이상 증세를 일으켰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안 친정에서 할머니를 다시 데려갔고, 재혼을 하시면서 아버지는 큰할아버지가 거두게 된다.
아버지는 나와 성격이 반대다. 내가 내성적이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면, 아버지는 활동적이고 사람들과의 자리를 좋아하신다. 아버지의 유년은 순탄치 않았다. 아마 그 유년의 기억이 아버지의 성격에 강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항상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면서 살아오셨기에 독립적이고 자기주장이 뚜렷하시다.
대학 시절, 국어국문학을 복수 전공하면서 ‘구비문학’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집안의 역사에 대해 채록하는 과제가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충주 탄금대로 가 벤치에 앉아 할아버지의 사연을 포함해 아버지의 인생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안에는 위에서 언급한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10.26과 IMF 등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들이 어김없이 들어있었다. 현대사의 주역은 아니더라도 우리 아버지 또한 당당히 그 역사를 관통하며 살아온 평범하고 위대한 한 명의 시민이었다.
요즘 아버지는 여유로운 나날을 보내고 계신다. IMF 외환위기 당시 명예퇴직으로 전화국을 그만두셨던 아버지는 이후에도 꽤 많은 일을 하셨다. 몇몇 공장에 다니기도 하다 충주에 있는 건국대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꽤 오래 일하셨다. 그 일도 나이 제한으로 그만두신 후에는 노인 일자리 사업과 용산주공아파트 통장으로 활동하면서 엄마에게 돈을 가져다주셨다.
퇴직 후의 삶은 경제적으로 힘겨운 삶이었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 그렇게 가족을 지탱하는 버팀목으로 여전히 아버지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주고 계신다.
평범하고 위대하게 삶을 개척해 온 아버지가 처음으로 장만하셨던 용산주공아파트. 난 30대 중반의 아버지가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집을 장만하셨을 때 어떤 기분이셨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40여 년의 시간이 흘러 자신처럼 나이 먹은 용산주공아파트를 떠나실 때 어떤 기분이셨을지도 궁금하다.
아직은 쑥스러워 아버지에게 물어보진 못했지만 용산주공에 관한 글을 마치기 전에 꼭 물어봐야겠다. 그래야만 용산주공에 관한 글을 제대로 썼다고 스스로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지금까지 잘 살아오셨다고, 말해야겠다.
이사 가기 전 용산주공아파트에서 몰래 찍은 아버지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