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어머니
세상에서 가장 정리하기 힘든 감정이 엄마에 대한 감정이 아닐까 싶다.
사랑, 존경, 미안함 같은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엄마에 대한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사실, 이 글을 구상하던 때부터 진지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봤다. 그렇게 내린 결론은 엄마와 나는 확실히 잘 맞지 않는다는 거다.
생각이라든지, 생활 방식이 다르기에 사소한 일로도 싸울 때가 참 많았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그저 누구 하나가 참아야 겨우 갈등이 봉합되는 적도 꽤 많았다. 그 과정에서 누구는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가 쌓이고 쌓여 가슴에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가족이라는 인연으로, 더구나 엄마와 자식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관계로 묶였기에 늘 가까이 서로를 지켜봤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엄마와 나는 그리 가까운 인연을 맺긴 힘들었을 거다.
그런데 또 신기한 건 내 성향은 분명 엄마와 많이 닮았다는 거다. 외향적인 아버지와 달리 엄마는 내향적인 편인데 나도 그렇다. 살아가면서 매번 깨닫는 건 내 성향은 분명 엄마의 성향을 물려받았다는 거다.
같은 성향의 두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행동 방식이 다르기에 빚어질 수밖에 없는 갈등이라고나 할까? 그럼에도 그 갈등마저 끌어안은 채 서로를 생각만 해도 울컥해지는 감정.
이게 바로 겨우 내가 생각해낸 엄마에 대한 감정이다.
미운 정이 더 무섭다고 했던가?
용산주공을 떠나 다시 내가 살아내야 할 곳으로 돌아오면, 그래도 가장 많이 생각나는 건 엄마였다.
대학교에 입학해 용산주공을 떠나 대전으로 갔을 때도, 강원도 인제군 민통선 안의 부대로 군 복무를 하러 떠났을 때도, 그리고 꿈을 찾겠다고 서울로 떠났을 때도, 나는 용산주공의 좁은 부엌에서 가족을 위해 밥을 짓고 있을 엄마를 생각했고, 엄마의 따뜻한 밥이 늘 그리웠다.
이제 다들 마흔이 넘은 중년이 됐지만, 여전히 엄마는 물가에 놓은 아이처럼 우리 형제를 걱정하신다. 사실, 어떨 땐 좀 과하다 싶을 정도다.
나는 엄마의 관심과 사랑이 고마웠지만 그만큼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적도 많았다. 때론 더 넓은 세상으로 가기 위해 도전이 필요할 때, 제일 먼저 넘어야 할 벽은 엄마였다. 조금이라도 불안정한 길에 들어설까 그게 두려워 엄마는 문지기처럼 내가 나가려는 문 앞을 지킬 때가 많았다. 그러면 나는 또 그 문을 뚫기 위해 엄마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화를 내야만 했었다. 그러면 다시 엄마와 나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멀어지곤 했다.
예전에는 이게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엄마나 내가 달라진 건 아니다. 그저 세월이 흐르면서 무뎌졌을 뿐이다.
엄마는 육 남매의 맏이로 태어나셨다. 남아선호 사상이 엄연했던 시대, 엄마의 이름은 그 시대의 아픔이라고나 할까? 그런 걸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첫째가 여자였기에 둘째는 귀한 남자를 낳으라고 엄마의 이름은 ‘귀남’이 됐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건 한 사람의 인격에 대한 폭력이었지만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이 같은 폭력의 연장으로 엄마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늘 엄마를 부끄럽게 만들었던 건 국민학교조차 모두 마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군에 있을 때 정말 많이 울었던 적이 있는데, 그건 훈련소에서 엄마의 편지를 받았을 때였다. 틀린 맞춤법으로 정성스레 눌러쓰신 엄마의 글자를 보고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도 엄마는 당시 외할아버지가 번듯한 직장을 가지셨던 덕분에 남들보다 배부르게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지난날을 회상하신다. 당시 외할아버지는 집배원이셨는데 외할아버지 밑으로 들어온 신입 집배원이 바로 우리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외할아버지 집에서 하숙을 했고, 그렇게 엄마와 만나게 됐다.
엄마가 용산주공아파트 14동 401호에 처음 올 때 나이는 서른 초반이었다. 이미 세 아이의 엄마로서 가정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던 때였다.
엄마에게 용산주공은 평생을 함께할 운명공동체를 만난 소중한 공간이었다. 이후 지금까지 40년이 넘게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친구분들을 이곳, 용산주공에서 만나셨기 때문이다.
바로 14동 103호와 104호 아주머니. 미연이 아주머니와 수남이 아주머니다. 그야말로 평생의 단짝들이다.
두 분도 모두 지금은 용산주공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 가셨지만, 여전히 세 분은 용산주공에서 함께 했던 추억을 바탕으로 계속 인연을 이어가고 계신다.
나도 엄마와 두 아주머니가 늘 함께 지내시던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삼십 대 중반의 젊은 모습에서 칠십 대에 접어든 지금의 모습까지 내가 용산주공에서 살았던 그 시간 속 곳곳에 두 분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다.
확실히 내가 고등학교를 용산주공에서 다니던 시절까지만 해도 아파트에 이웃사촌이라는 공동체 개념이 지금보다는 강했다. 동별로 마음이 맞는 아주머니들이 언제나 집을 돌며 마실을 다녔고, 함께 김장을 하거나 서로의 대소사를 함께 준비하는 모습이 흔했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 집에 문이 잠겨 있으면 나도 두 아주머니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거나 잠시 쉬면서 놀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런 모습은 점점 사라져 갔다. 물론, 용산주공을 떠날 때까지 세 분은 계속 예전처럼 똑같이 교류했지만, 아파트 안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점점 누가 이사 오고, 떠나는지 알 수 없고, 그만큼 아파트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할 사람들이 줄어갔다.
다행히 엄마는 지금 이사 온 곳에 무척 만족하고 계신다. 용산주공보다 부엌이 넓기에, 용산주공보다 물이 잘 나오기에, 용산주공보다 웃풍이 심하지 않기에, 그리고 위층과 이웃 아파트에 미연이 아주머니와 수남이 아주머니가 여전히 계시기에 새로운 아파트에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계신다.
비록 몸은 떠났지만, 두 아주머니와 함께 하는 한 이곳에서의 생활이 결코 용산주공에서의 생활과 다르지 않기에 엄마의 현재도 용산주공에서의 삶의 연장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인생의 절반 이상을 보내며 소중한 선물을 엄마에게 준 용산주공이 그래서 고맙다.
물론, 나에게도 소중한 추억을 선물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