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주공

12. 형

by 고귀한 먼지
언제쯤 우리 삼 형제는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용산주공아파트에 대한 추억을 나눌 수 있을까?


큰형


내 유년 시절, 큰형과 함께했던 추억은 많지 않다.

한때 용산주공아파트 14동 401호에 걸려 있던 작은 사진액자 속에는 30여 년 전 스포츠머리를 한 큰형과 환하게 웃고 있는 작은형, 그리고 순진한 표정의 내가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지만, 나는 그때의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나와 여덟 살 터울인 큰형은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이미 중학생이어서 집에서도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가끔 휴일에 가족들이 교외로 바람을 쐬러 가거나 친척들이 집에 찾아와 시간을 보낼 때 함께 했던 기억은 어렴풋이 나지만 가슴에 선명하게 각인된 큰형과의 추억은 많지 않다. 오히려 내가 성인이 되고 남들처럼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에 아버지와 셋이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큰형 앞에 놓였던 어색함의 벽을 조금씩 허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큰형은 내게 조금은 어려운 존재다.


유년 시절, 내가 기억하는 큰형은 약한 이를 괴롭히는 악당에 가까웠다. 작은형을 싫어하고 집안 분위기를 차갑게 만드는 나쁜 형. 자세한 사정은 지금도 모르지만, 큰형은 작은형을 싫어했다. 특히 작은형의 콧소리를 무척 싫어해 강박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비염이 심했던 작은형은 틱장애 비슷한 증세로 헛기침과 코를 푸는 듯한 소리를 습관처럼 냈다. 어떨 땐 심하다 싶을 정도로 소리가 큰 적도 있었다. 이걸 고치기 위해 병원에도 가고, 수술도 받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결국 고치진 못했다.


아버지를 비롯해 우리 가족은 대체로 작은형이 내는 소리를 참고 넘어갔지만, 큰형은 드러내며 짜증을 냈고, 아버지가 있어도 화를 참지 않았다. 그래서 점점 큰형과 작은형이 함께 밥상에서 밥을 먹는 모습은 줄어들었고, 작은형은 큰형을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사춘기 시절, 작은형이 오른손에 깁스를 한 채 한동안 지낸 적이 있는데 손이 다친 이유도 큰형에 대한 화를 참지 못해 벽을 쳐 스스로 낸 상처였다.


어린 나이에도 나는 큰형의 행동이 나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꾸중에도 고치지 않는 큰형의 모습을 보며 내가 나설 수 있는 상황은 없었다. 그저 속으로 큰형은 나쁘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가가지 않았다. 지금은 이제 큰형도 나이를 먹어 예전 같진 않지만, 여전히 나는 큰형을 볼 때마다 유년 시절 느꼈던 감정이 생각나 조금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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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지켜볼 때 큰형은 자존심이 센 편이지만 그 자존심을 유지할 정도로 노력은 하지 않는 성격이다. 조금 더 열심히 노력한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여건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더 게으른 편이다. 사람 좋아하고, 술 잘 마시는 건 아버지를 닮아서 나와 달리 중, 고등학교 친구와 여전히 교류하며 지낸다.

삼 형제 중 큰형이 유일하게 결혼해 가정을 꾸렸지만, 아이가 없다. 부모님이 아이에 대해 스트레스를 주는 편은 아니지만, 아버지는 이게 끝내 아쉬운 것 같다. 내가 고향에 올 때 가끔 작은형 없이 갖는 술자리에서 아버지는 큰형에게 2세 계획에 관해 묻는다. 그러면 큰형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모른다는 성의 없는 답변으로 질문을 피해 간다.


몇 년 전부터 고향에 내려와 지내고 있는 큰형은 예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부모님과도 잘 지내며 나와 작은형이 없을 때 부모님을 많이 챙겨드린다. 큰형은 얼마 전까지 용산주공아파트 14동 202호에서 지냈다. 401호에서 지내던 어머니는 첫째인 큰형이 매일 볼 수 있는 곳에서 같이 지내고 있는 점에 만족했다.

큰형은 작년 말에 용산주공아파트를 떠났다. 부모님이 이사 간 곳에서 멀지 않은 임대아파트에 새 둥지를 틀었다.


최근 몇 년간 큰형은 용산주공아파트에 살며 변해가는 아파트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학창 시절 이후 몇십 년 만에 다시 용산주공아파트에서 자고 일어나 출근을 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삶을 이어갔다.

큰형은 용산주공아파트를 떠나기 전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와 공유한 추억은 많지 않더라도 용산주공아파트에 관한 추억은 형도 분명 지니고 있을 텐데.

아직은 어색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흘러 큰형과의 관계가 나아졌을 때 물어보고 싶다. 용산주공아파트에 관한 추억들이 무엇인지. 혹시 그 추억 안에 나도 담겨 있는지를.




작은형


어머니의 아픈 손가락은 작은형이다.

어머니의 심정을 감히 내가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제법 나이를 먹으니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게도 작은형은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돌덩이 같은 존재다.


작은형과는 용산주공아파트에서 함께 했던 추억들이 여전히 선명하다.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머리를 감는 작은형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 작은형은 물에 떠 있는 비누 거품으로 나를 위해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줬었다. 그걸 재미있게 지켜보며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떠올리니 얼굴에 미소가 지어진다.


내가 유치원도 다니기 전, 네 살 어린 나를 돌보던 건 작은형이었다. 부모님이 외출하시고 큰형도 집을 나가면 난 작은형과 함께 이런저런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중학교 시절부터 나는 이미 작은형보다 키가 컸다. 한때 작은 농구 골대를 작은형과 같이 사용하는 방문 위에 설치한 적이 있었는데, 층간소음 따윈 생각지도 않고 작은형과 신나게 농구를 하며 덩크슛을 꽂아 넣던 기억도 생생하다.


작은형이 고등학생일 때에도 나와 작은형은 같은 방에서 잠을 잤다. 내가 아직 초등학생이던 때 사춘기에 접어든 작은형이 새벽에 창문을 열고 창틀에 걸터앉아 밤하늘을 바라보던 모습을 기억난다. 그때 차마 인기척을 내면 형이 혹시라도 4층에서 떨어질까 몰래 훔쳐보며 마음 졸였던 기억.

한 번은 본의 아니게 거실에서 밤늦게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내용을 엿들은 적도 있었다. 가슴 아프지만 좋아하던 여자에게 거절당하는 내용이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작은형과 나는 이성에게 그렇게 인기는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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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형보다 작은형과의 추억이 많지만, 지금은 오히려 큰형보다 사이가 멀어졌다. 내가 의도적으로 작은형을 멀리하고 그걸 아는 작은형도 내게 연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은형과 나는 서로의 안부를 엄마를 통해 묻는다.


성인이 된 후부터 작은형은 늘 빚에 허덕이며 살았다. 언제부터 빚을 지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늘 빚이 있어 주변에 아쉬운 소리를 하며 돈을 빌려야 했다. 그중에서 가장 부탁을 많이 한 사람들은 역시 우리 가족이었다. 아버지에게서 큰형에게로, 그리고 다시 내게로. 어쩌면 우리 가족 남자들은 작은형에게 데었는지 모른다. 특히 아버지는 작은형의 빚을 갚느라 꽤 많은 돈을 잃어야 했다.


언젠가 큰형은 술자리에서 작은형은 아직 정신이 덜 들었다며 고생을 더 해야 한다는 소리를 했다. 나는 이 소리가 유년 시절에 내가 봤던 행동의 연장이라 생각하며 큰형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 작은형과 함께 살면서 그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됐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옆에서 누가 계속 말을 하더라도 생활방식을 바꾼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장사를 해 돈을 벌고 싶었던 형은 고등학교도 상업고등학교 진학을 원했지만, 부모님의 고집으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아마 그때부터 작은형의 인생은 조금씩 비뚤어지지 않았나 싶다. 젊은 시절 도박에도 잠깐 빠졌던 작은형. 그때 진 거액의 빚을 아버지가 대신 갚았고, 도망치듯 고향과 용산주공아파트를 떠난 작은형은 그 후 20여 년이 넘게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은 언젠가부터 명절이면 작은형만 빠진 채 차례를 지내고 명절을 보낸다. 작은형은 다시 도박이나 술에 빠지진 않았지만, 여전히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간다. 작은형을 걱정하는 엄마의 기도는 그래서 오늘도 멈추지 않는다.





난 작은형이 용산주공아파트로 돌아오길 원했지만, 이제는 우리가 용산주공아파트를 떠났기에 앞으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제쯤 우리 삼 형제는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용산주공아파트에 대한 추억을 나눌 수 있을까?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날이 올 때까지 용산주공아파트가 여전히 자리를 지켜주었으면 좋겠다. 30여 년 전 용산주공아파트 놀이터 잔디밭에서 우리 삼 형제가 함께 사진을 찍었던 것처럼, 언젠가 같은 포즈로 다시 사진을 찍겠다는 작은 희망을 나는 여전히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 희망이 꼭 이뤄질 수 있을 거라 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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