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s Montgomery 「The Incredible Jazz」
https://www.youtube.com/watch?v=VjIaYCjy8yE&list=PLL-NbN8uTOiir3S5NqZM30YtiwR0Pbp0G&index=6
일요일 저녁..
주말의 끝을 달리며, 적적함과 서운함이 공존하는 시간
딱히 누군가와 뭘 하기에도, 술 한 잔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
난 그냥 약간의 답답함에 집을 나서 한 시간 가량 동네를 돌아다녔다.
딱히 배가 고프지도, 부르지도 않은 어정쩡한 위장 상태..
여느 때처럼 혼자 소주나 한 잔 할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국밥집 이름이 '국밥집'이라니..
너무나도 정직한 가게 상호를 보곤, 피식 웃으며 기웃거렸다.
"가?"
"말아?"
"가?"
"말아?"
평소 국밥에 담긴 '개똥철학'을 타인에게 과분히 펼쳐왔던 난
"그래.. 국밥부 장관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밥부 장관의 비서관쯤은 될 내가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오래된 미닫이 문을 열어제끼고 당당히 가게로 들어섰다.
2000년 대 초반.. 시간이 멈춘 듯한 허름한 건물과 실내...
마치 이곳만 그때 그 시간에서 단 하루도 지나지 않은 채 손님을 기다리는 듯..
구수~한 국물 냄새와 거북하지 않은 돼지 비린내를 풍겨댔다.
"요즘 4000원짜리 국밥이 어딨어라며?"
비아냥거리는 놈들에게 뺨 한대 후려갈길 만한..
아니 인중에 카운터 펀치를 멕이는 듯한 가격까지 레트로 한 '시뻘건 메뉴판'...
아... 이건
"국밥 철학 논문 심사 조사 자료에 등재될 만한 모범적인 사례야.."
그렇게 난 앞으로의 삶을 '국밥충'으로 연명하기를 굳게 다짐했다.
사실 물가가 오르면 가격이 오르는 게 당연한 건데..
인상된 소주값이 '3000원'이라니
아니 막걸리가 '2500원'?
이게 "정"이다!!
이게 서민의 삶을 담고 있는 "국! 밥!"이다!
어디 가서 레트로 레트로.. 말만..
난 8000원짜리 '국밥'은 '국밥'이 아니라는 신조를 뼛속 깊이 가지고 있는 '음식 개꼰대'여서
진짜 기립박수를 칠..정도로.. 아니 감사패를 만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깊이 감명받았다.
배가 너무 불러서 도저히 못 먹겠는데..
"내가 당뇨나, 고혈압으로 생명에 큰 위협이 없는 이상 절대 국밥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100% 진심 어린 다짐..
그리고 할머니 두 분의 환상 케미에 기가 눌려..
남기진 못하고 억지로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그릇까지 다 먹었다.."
소개한 음반은 [ Wes Montgomery ] 'The Incredible Jazz Guitar'
나에게는 국밥 같은 정겨움과 고소함으로 끊을 수 없는 음반 중 하나이다. '몽고메리'의 다양한 색을 골고루 즐길 수 있는.. 그런? 음반이라 생각한다.
'Wes Montgomery' (1923~1968)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즈 기타리스트로 꼽힌다. '몽고메리'는 6현 기타를 사용한 재즈 기타리스트였고, 엄지손가락으로 현을 튕기는 독특한 기술과 옥타브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폭넓은 소리를 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음반 'The Incredible Jazz Guitar'는 미국 의회 도서관에서 역사·문화·예술적으로 상당히 가치 있는 음반으로 채택됐다.
사실 '국밥' 이야기에 '몽고메리'를 담았던 건 나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저명한 재즈 아티스트이기도 했지만, 한 가정을 책임졌던 '가장'이었다. 그는 음악기 집안에서 태어났다.
'몽고메리'의 이린시절을 보면, 그의 어머니는 그가 어린 나이에 이혼해 가정을 떠났다. 가난했던 그의 가정형편에 '기타'는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허드렛일을 해야만 살 수 있는 악기였다.
그의 형 '윌리엄 하워드 몽고메리'는 학교를 그만두고 석탄과 얼음을 팔아 '테너 기타'를 샀고, '몽고메리'에게 그 '기타'를 넘겨주었다. 아마 그때부터 기타리스트의 꿈을 키우지 않았을까..
여담이지만, 그의 형 '하워드 몽고메리'는 일렉트릭 베이스를 연주했던 첫 연주자로 이름을 알렸다.
1943년 '몽고메리'는 용접공 직업을 얻고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아내와 함께 클럽 댄스파티에 참가해 들었던 'Charlie Christian'의 레코드 한판은 그의 기타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게 만들었다.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악보도 읽을 줄 몰랐지만, 거의 1년 동안을 밤낮으로 모방하고 독학하려 땀 흘려 노력했다.
사실 그는 음악에 자신의 많은 시간을 투자할 여력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낮에는 일을 하며, 가족들을 보살펴야 했었기에, 밤에 클럽을 다니며 공연하며 기타에 전념했다.
어쩌면 그의 '삶'은 역사적 재즈 기타리스트이기보다, 아버지의 따뜻함 그리고 책임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삶'이 아닐까 싶다. 클럽에서 공연하기 전 가장 먼저 했던 행동이 아내와 자신의 일곱 아이들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던 만큼 가족에 대한 사랑이 넘쳤던 '재즈 아티스트'이자 한 '가장'이었던 만큼..
우리의 삶을 위로해주는 '국밥'같이 그의 기타 연주엔 '고소하고 따뜻한 국밥 냄새'가 녹아들어 있다. 비록 그는 1968년 6월 비록 그는 45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지만 재즈 아티스트로서의 훌륭한 업적과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의 행적은 아직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그의 연주 속에 살아 숨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