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가온아보
가온아보
콜럼버스가 1493년 11월 27일에 라 나비다드로 돌아왔다. 라 나비다드에 두고 온 선원들을 데려가는 것도 목적이었지만 1차 항해 때 산타 마리아호가 침몰해 일찍 탐사를 접어야 했던 앤틸리스 제도 일대의 항해를 이어가고자 했다. 라 나비다드 바닷가에 사체가 나뒹굴었다. 잡풀 더미에는 유럽인의 옷이 버려져 있었다. 시체가 버려진 지 꽤 되었으니 죽은 자를 식별할 수는 없었지만, 옷가지로 보아 스페인 선원의 시체인 것은 분명했다. 39명 선원 전원은 이미 죽었다. 좌초한 산타 마리아호를 뜯어다 세운 모래밭 집은 불탄 채 재만 남았다. 물론 병으로 죽은 자도 있었다. 콜럼버스는 이렇게 적었다. “내가 떠나자마자 그들은 누가 얼마나 많은 여자를 차지할 것인지, 그리고 누가 얼마나 많은 황금을 차지할지를 놓고 서로 싸웠다.” 싸움에 진 수컷 짐승이 무리를 떠나는 것처럼 싸움에서 진 자들이 다른 곳에 가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나비다드를 떠났다. 이런 일은 예견된 일이었다. 콜럼버스는 나비다드를 떠나 스페인으로 돌아갈 때 경험 많은 뱃사람을 골라 배워 태웠고, 쓸모없는 인간쓰레기들을 남겼다. 이들이 구가나가리의 영역을 벗어나 가온아보 가시관이 직할하는 땅에 들어간 일이 화근이 되었다. 다이노 남자를 죽이고, 여자를 강간하고, 재물을 약탈하며 온 섬을 휘젓고 다녔다. 기독교인들이 저마다 5명씩의 여자를 데려가서 “욕구를 채우고 기뻐”했다. 가온아보는 그런 자들을 용인하지 않았다. 이들이 섬에 올라와 악행을 일삼을 때부터 가온아보는 이들에 관해 소문을 보고 받고 있었다. 가온아보는 콜럼버스와 스페인 선원을 대하는 시각에서 구가나가리와는 완전히 달랐다.
가온아보는 그들을 저승사자로 보지 않고, 살아있는 인간 이방인, 침입자로 보았다. 이 섬의 최고 통치자인 가시관 가온아보에게는 처음 보는 굉장한 무기로 무장한 침략자들이 자신의 영토에 정착하도록 그저 지켜보기만 할 일이 아니었다. 그것을 묵인하고 조장하는 지방 장관 구가나가리도 언제까지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섬 전체의 군주로서 당연했다. 먼저 자신의 영토에 들어와 분탕질을 한 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 그 가운데 몇을 바닷물 속에 머리를 밀어 넣었다. 그들의 숨이 끊어졌다. 저승사자라면 숨이 끊어지지 않을 터. 저들은 새로운 침략자일 뿐임을 직접 확인했다. 그런 다음 많은 군사를 이끌고 라 나비다드를 공격했다. 라 나비다드 모래밭 집과 스페인 선원들이 추가로 세운 집을 불 질렀다. 살아있는 콜럼버스의 마지막 선원 7명을 바다로 몰아갔다. 그 바다에는 상어가 많았다. 가온아보는 해안을 떠나지 않았다. 누구나 살아 뭍으로 오르지 못했다. 바다를 노려보는 그의 눈빛은 분에 찼지만 어두웠다. 영웅적인 조상들의 위대한 승리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이런 경우는 들어보지 못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런 혼란의 근원이 무엇인지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다가올 위협의 깊이도 가늠할 수 없었다. 조상들은 바다 저 너머에 저승이 있다고 했다. 그 바다 너머에서 온 저승사자인지 무엇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자들, 또 우레칸 신이 치는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며 바다에서 용오름처럼 솟구치고 큰불을 만들며 터지는 저승사자들이 쏘아대는 낯선 대포 소리. 적의 무기 같기도 했고 하늘신의 분노 같기도 했다. 다이노 민족의 앞날이 가늠되지 않았다. 위계 상으로는 가온아보가 상위였지만 정치적으로는 갈등 관계였다. 가온아보가 대거 군사를 이끌고 구가나가리의 영토에 진입한 것은 구가나가리에 대한 무력 경고였다. 구가나가리가 콜럼버스와 기독교인 저승사자들을 등에 업고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이미 간파했기에 출병하고 나선 일이다. 그는 이제 낯선 저승사자들과 일전을 계획해야 했다. 유령을 상대로 싸우듯 적의 정체마저 불확실한 전쟁. 우레칸이 내는 우렛소리처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쟁, 도무지 근본을 알 수 없는 전쟁이 임박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