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콜럼버스

5. 콜럼버스

#106. 두레

by 조이진

두레

라스 카사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콜럼버스가 오헤다를 보내 가온아보에게 라 이사벨라로 오라는 말을 전하게 했다. 가온아보가 대답하기를 “나는 그곳에 갈 이유가 없다. 너의 총독이 내게 오라 이르라. 올 때 하늘에서 소리를 내는 ‘두레turey’를 가지고 오라 이르라.” 첫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지만 가온아보는 다이노 연방 전체의 최고 통치자로서 여전히 도도하고 당당했다. 콜럼버스가 라 이사벨라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교회를 세웠다. 그 꼭대기에 큰 종을 매달았다. 예배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가온아보는 그 큰 종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 큰 둥근 것이 울리면 그 낯설고 피부 창백한 자들이 한 군데로 모여든다고 했다. 바다 너머 저승에서 온 사자들이 모여들었다. 사람을 모이게 한다는 큰 소리를 내는 그 물건도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 물건뿐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었다. 하늘의 아들 가온아보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가온아보가 그것을 일러 ‘두레’라 불렀다고 스페인 사람들이 기록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다이노 말 ‘두레’가 하늘이라는 뜻이라고 이해했다. 가온아보는 하늘에서 울려 퍼져서 하늘의 소리를 나게 하는 둥근 종을 ‘두레’라고 말했다. 다이노들은 쇳덩이를 다루지 못했다. 카리브해의 지표면에는 철이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다만 가시관만은 가슴에 둥근 ‘관인guanín’을 달고 있었다. 관인은 금과 구리를 섞은 청동 합금으로 만들었다. 그것들을 철과 금이 많이 나는 멕시코 같은 남아메리카 대륙의 다이노에게 받아서 가져왔다. 관인을 가슴에 매달면 가시관이 움직일 때마다 태양을 받아 반짝였다. 또 하나의 태양이 땅에도 있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관인을 단 자는 하늘의 아들이라는 상징이다. 하늘의 아들이 곧 땅의 왕이었다. 청동거울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신물이었다. 여러 다른 결이 새겨있어 각도마다 빛을 내서 반짝임이 크고 아름다웠다. 둥근 청동거울은 동북아시아에서도 왕권이자 신권을 상징했다. 단 임금들의 상징이었다. 가온아보는 수백 명의 저승사자를 한 데 불러 모으는 힘을 지닌 두레가 무엇인지 그 정체를 알아야만 했다.

ob-5c1955-agueybana-647x231.jpg 다이노 가시관은 '관인'이라는 청동 거울을 매달고 다녔다. 관인은 태양의 빛을 받으면 반사했으므로 태양신의 자손임을 상징했다. 다이노들은 태양신을 섬겼다.

그런 그가 무릎을 꿇을 리 없었다. 모든 다이노의 ‘가운데를 맡은 자’라는 이름답게 가벼이 움직이지도 않았다. 침입자가 공격을 시작했다. 콜럼버스가 오헤다에게 470명의 군사를 주어 출병하게 했다. 다이노 군사는 10,000명. 스페인 기록자 라스 카사스는 스페인군 400명이 1만 명과 싸워 이겼다고 기록했다. 싸움의 전개는 이랬다. 가온아보가 저승사자를 불러 모으는 두레의 정체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스페인군이 알아챘다. 오헤다는 가온아보에게 비스카이아Biscay에서 만들어온 두레를 선물로 가져왔다고 거짓말을 꾸몄다. 오헤다는 하늘을 가리키며 비스카이아는 저 멀리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다이노들이 례도를 할 때처럼 하늘의 왕인 카스티야의 왕도 두레를 친다고 말했다. 다이노들은 하늘에 제를 지내는 례도 때 노래하고 춤을 춘다. 오헤다는 기독교인들이 교회에서 예배하는 의식을 례도에 비유했다. 그러면서 스페인 전통에 따라 가온아보가 강에 나와 몸을 씻어야 그 선물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가온아보가 그들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자기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선물을 받기 위해 호위무사 몇을 데리고 강에 들어갔다. 자기 거처인 가내caney에서 2km 떨어진 곳이었다. 오헤다가 꾀어 혼자 강에 들게 했다. 가온아보가 덫에 걸려들었다. 동생 마니가테새가 군사를 이끌고 돌칼과 화살, 죽창을 들고 항전했다. 쇠갑옷과 긴 창으로 무장한 켄타우로스인 스페인 20 기마의 파괴력은 놀라웠다. 카나리아에서 실어온 도고 프레사 카나리오 수십 마리가 도망가는 자들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기독교인들은 토끼 사냥을 즐겼다. 가온아보가 몸을 담근 강이 다이노의 피와 살로 넘쳤다. 다이노들이 믿고 의지했던 지도자 가온아보 형제가 스페인식 수갑에 채워졌다. 이제 스페인 정복자들은 최대의 위협인 왕과 동생을 묶었다. 대부분은 세비야 광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처형 방식으로 체포자들을 처리했다. 스페인에서 광장은 사람을 불태우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전에 그들의 귀를 자르는 곳이기도 했다. 스페인에서 귀를 자르는 것은 가장 가벼운 형벌. 다음은 팔을, 더 중한 범죄자는 팔과 다리를 모두 잘랐다. 가장 중한 범죄자라 여기면 산채로 목을 매달아 불에 태워 죽였다. 그것이 카스티야의 양형제도였다. 저항한 마을의 가시관과 친척들을 붙잡아 라 이사벨라로 끌어왔다. 오헤다가 지휘했다. 콜럼버스는 귀가 잘린 자들에게 추가 형벌을 내렸다. 귀 잘린 자들의 목도 잘랐다. 다이노들은 처음 겪는 잔인함에 오금이 저렸다. 피가 튈 때마다 신부는 이렇게 기도했다. “이는 하느님께 영광이요, 하느님의 성스러운 인도 하심으로 이 이교도들을 정복하고 성스러운 가톨릭 신앙으로 이끄심입니다.” 콜럼버스는 가온아보와 그 동생은 죽이지 않았다. 스페인 국왕과 로마 교황에게 승전 선물로 보내고자 함이었다. 앞으로 펼쳐나갈 식민지 정복전의 자신감을 보여줄 좋은 증거라 여겼다. 전리품 치고 이토록 의미 있고 멋진 전리품은 없을 터였다. 구가나가리의 외교는 예리하게 성공했다. 그로써 히스파니올라섬의 정치 시스템이 무너졌다. 쇠 수갑이 그를 옥죄었다. 가온아보는 처음 차가움을 느꼈다. 쇠가 전하는 날카로운 금속 부딪는 소리와 손에 묶인 무거움이 불쾌했다. 그가 처음 닿아본 철기 문명은 불행하게도 쇠 수갑이었다. 쇠 수갑은 쇠사슬과 함께 흑인 노예를 묶는 도구였다. 사제 도미니크가 이교도 순수파를 처단할 때 처음 발명했던 그 수갑이다. 가온아보는 문득 모든 다이노 백성이 기독교인들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불안한 생각이 스쳤다. 이것도 둥글게 작은 두레였다. 둥근 쇠가 가온아보의 심장을 날카롭게 찔렀다. 산토토마스 전투에서 가온아보를 처음 직접 눈으로 본 스페인 기록자는 그를 이렇게 표현했다. “세월의 깊이가 새겨있고, 경륜이 풍부하며 날카로운 위트와 지식이 가득한 남자”이자 “신체적으로 강하고, 권위가 느껴지며 무척 용감한” 사람이라고 적었다. 알람브라 벨라 타워의 기독교식 종은 이슬람 세력을 정복한 레콘키스타의 상징이다. 기독교의 종이 아메리카 정복 전투에서도 크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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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를 묶는 수갑에 묶인 가온아보.


콜럼버스와 구가나가리는 사이가 벌어졌다. 콜럼버스가 나비다드로 다시 오는 길에 다이노 여자를 탐하여 몇 명 잡아 왔는데, 구가나가리가 여자들을 놓아주었다. 그러고서는 그중 한 여자를 자기 첩으로 삼았다. 콜럼버스가 돌아오면 자신을 응징하겠다고 생각하여 숲에 들어가 숨어 나오지 않았다. 남의 여자를 빼앗는 일은 여자를 빼앗긴 남자를 멸시한다는 뜻이다. 그가 콜럼버스를 모욕했다고 생각하여 도망쳐 숨어버린 것이다. 콜럼버스는 자기 여자를 빼앗아 간 것에는 책임을 묻지 않되, 자신을 오래 기다리게 했다는 데 화가 났다. 식민지 정복 과정에서 요긴하게 그를 쓰려했는데 나타나질 않았으니. 그러나 둘은 다시 서로가 필요해졌다. 다이노들이 무장 봉기했기 때문이다. 이 전투가 콜럼버스의 식민지 침략 전쟁 승패에 분수령이 될 터였다. 콜럼버스가 내륙 안으로 진출했다. 한쪽에는 그의 동생 바르톨로뮤 콜럼버스가, 다른 한편에는 구가나가리가 진을 꾸렸다. 콜럼버스 군은 200명의 기독교인, 20마리의 말, 그리고 20마리의 도고 프레사로 구성되었다. 소요 사태에 대한 진압과 복수가 출병 이유였다. 이미 구가나가리는 다른 가시관들에 의해 민족 반역자로 취급되었다. 스페인군에 붙어 동족을 팔아먹고 다이노들을 적으로 삼은 부역자라며 침을 뱉었다. 다른 가시관들이 구가나가리의 첩 한 명을 잡아 죽였고, 다른 첩들을 잡아갔다. 그것이 구가나가리의 얼굴에 침을 뱉는 다이노의 사회적 징벌 방식이었다. 구가나가리가 콜럼버스의 여자를 첩으로 삼은 뒤 숲에 지레 겁을 먹고 숨은 것도 이런 풍속 때문이었다. 이 전투 중에 구가나가리는 명이 끊겼다. 적과 교전 중에 죽은 것도 아니었다. 콜럼버스와 함께 배를 타고 온 종교 심문관 사제에게 죽임을 당했다. 39명 나비다드 기독교인을 살리지 못했다는 명분이었다. 17척의 방주를 타고 다시 돌아온 콜럼버스에게 그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구가나가리가 죽고 그의 아들이 뒤를 이었다. 그는 콜럼버스와 기독교인들이 다이노들을 학살하는 저승사자인 것은 맞지만 염라대왕의 사자는 아니라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황금이라는 신을 좇아 바다를 건너와 다이노들을 황천길로 보내는 인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을 축출하려 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그는 마야보배새Mayabobex라는 가시관이 다스리는 이웃 나라로 도피했다. 하지만 이내 뒤쫓아 온 기독교인들에 의해 사냥당하고 말았다. 콜럼버스는 ‘카리브’가 사람의 피를 마시고, 살을 파먹는 야만인이라고 했지만, 정작 다이노들이 자신을 ‘카리브’로 알고 절을 하고 맞이했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원주민들의 신화처럼 그가 바로 하얀 얼굴을 한 저승사자로서 원주민들을 대량 학살한 저승사자 ‘카리브’였다.


가온아보가 붙잡힌 1494년 가을에 과리오네새Guarionex가 그 뒤를 이었다. 그는 기독교인들과 싸워 이길 수 없음을 인정했다. 다이노 백성들은 기독교인들이 먹을 식량과 각종 공물과 여자를 가져다 바쳐야 했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하여 견디지 못한 그들은 다시 전쟁을 계획했다. 다이노들은 밤에는 귀신이 나다닌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밤에는 돌아다니지 않는 관습이 있었다. 이를 안 스페인 기병이 15,000명이 모여있는 과리오네새의 진영을 한밤에 급습했다. 14명의 가시관이 한꺼번에 생포되었다. 그중에는 과리오네새도 있었다. 과리오네새는 추방되었다. 이 전투 이후로 히스파니올라에서 스페인 침략군에게 저항하는 대규모 전투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과리오네새는 추방되면서 “우리는 지금 외적의 침략에 직면해 있소. 이제 이 자들이 우리 모두를 죽이고 파멸시킬 것이오”라고 말하며 떠나야 했다. 그의 말대로 다이노들은 거침없이 죽고 파멸되었다. 스페인 정복군은 다이노들을 제압하는 요령을 이곳에서 확실하게 터득했다. 그리고 쿠바, 푸에르토리코, 자메이카에서 그대로 적용했다. 식민지 정복에 자신감이 붙었다. 히스파니올라섬이 안정을 찾았으니 콜럼버스는 이제 쿠바와 자메이카로 식민지 정복 전쟁을 확대할 수 있었다. 과리오네새가 패배하자 이 전투를 함께 한 해태이가 쿠바 바라코아로 카누를 타고 넘어왔다. 그리고 쿠바 다이노들을 규합하여 무장 항전에 돌입했다.

전염병은 다이노 멸종의 아주 작은 요인일 뿐이었다. 히스파니올라와 쿠바 같은 카리브해에서는 1517년까지 천연두 같은 전염병이 팬데믹 수준으로 퍼진 적이 없었다. 카리브해에서 첫 팬데믹은 1518~1519년에 있었다. 가온아보가 포로가 된 전투 이후 10년도 채 되지 않아 다이노 인구는 이미 전멸하였다. 다이노들이 굴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리브의 모든 섬에서 무장 항쟁은 계속되었다. 자유를 위해,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그들은 기꺼이 투쟁했다. 이것도 주요 인구 급감의 원인이었다. 패배한 다이노들은 학살되었고, 노예가 되었다. 광산으로, 엔코미엔다로 끌려가 노예살이 하느라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카리브 지역에서 첫 번째로 발생한 팬데믹인 천연두는 그나마 마지막까지 살아있던 다이노 중 90%를 사망하게 했다. 히스파니올라와 쿠바, 푸에르토리코 같은 카리브해 식민지에서는 학살과 노예 착취, 전투, 기아가 가장 중요한 원주민 멸종의 원인이었다.


정복지가 넓혀질 때마다 교회당의 종이 늘어났다. 종소리가 넓게 퍼져나갈수록 정복자들에게도 문제가 커졌다. 콜럼버스가 두 번째 도착한 다음 해인 1494년에 벌써 히스파니올라섬에는 식량자원이 부족했다. 콜럼버스가 침공한 지 단 1년 만에 다이노들은 금 채취 노역으로 대거 동원되었다. 그러므로 농사를 지어 식량을 생산할 다이노도 없었다. 기독교인들이 먹을 것을 샅샅이 빼앗아 먹었으므로 다이노들은 광범위하게 기아를 겪었다. 먹지 않고 살아남을 자는 없다. 노동력이 빠르게 고갈되었다. 이런 상황이었음에도 기독교인들은 히스파니올라, 쿠바, 푸에르토리코 같은 서인도제도에서 다이노들을 노예로 잡아 스페인으로 보내 팔았다. 그러니 엔코미엔다에 투입할 다이노가 없었다. 콜럼버스가 카리브를 침략한 지 12년 만인 1505년에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이 노예로 쿠바와 히스파니올라에 대량으로 하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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