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에덴동산
에덴동산
그가 알지 못한 채 남아메리카 대륙 땅을 보고 서 있는 곳은 오리노코강 입구였다. 오리노코강은 콜롬비아에서 발원해 베네수엘라 아마존의 물을 담아 구불구불 대서양으로 흘러든다. 세계에서 4번째로 수량이 많은 강이다. 그런 만큼 카누를 젓는 노가 길다. 오리노코는 노라는 뜻의 기리güiri와 장소라는 뜻 노코noko라는 다이노 말을 합쳐 스페인인들이 부른 강 이름이다. 기리노코가 변해 오리노코가 되었다. 콜럼버스는 대륙 땅을 발견할 기회를 또 놓쳤다. 세 번째 기회를 놓친 셈이다. 그는 바다 한가운데서 솟아오르는 엄청난 양의 민물을 주목하고 있었다. 과연 이곳은 어디인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가 <창세기>를 떠올렸다. 에덴동산에서 4개의 큰 강이 흐르고 그 강이 땅의 모든 강의 근원이 된다고 하였다. 그는 이제껏 지금 보고 있는 강보다 더 큰 강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지상에 이처럼 크고 깊은 강은 있을 수 없다”라고 판단했다. 그는 놀라운 추론에 이르렀다. 그는 항해를 나설 때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을 신봉했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가 공 모양으로 둥글다고 했다. 유럽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를 보고 유라시아가 하나로 연결된 대륙이고, 그러므로 서쪽으로 가면 일본과 중국, 인도로 갈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콜럼버스는 그 이론이 맞지 않다고 깨우쳤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살았던 그리스 인근은 둥그런 모양이지만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둥글지 않고, 누워있는 서양배처럼 왼쪽으로 볼록 튀어나와 있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자신이 현재 4개 강의 근원인 에덴동산 근처에 와 있고, 에덴동산은 지구의 꼭대기에 있기 때문이었다. 중세 유럽인들은 에덴동산이 하늘에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믿었다. “…. 그리스 쪽이 둥글다는 것은 나도 의심하지 않지만, 그곳과 달리 이쪽 반구는 배처럼 생겨서 둥근 공 위에 여자 가슴의 젖꼭지 같은 모양이다….” 콜럼버스가 설명한 지구는 공 모양이 아니라 여자 가슴과 같이 생겼다. 그래서 전반적으로는 둥글지만, 젖꼭지처럼 솟아 나온 부분이 있고, 지금 있는 이곳이 지구에서 가장 높고 하늘에 가까운 지역이었다. 그는 적도 근처에 와 있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적도 인근에 있었다. 성서에는 에덴동산은 동쪽 끝에 있다고 했다. 그러니 그는 지금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와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에덴동산이 동쪽에 있다고 한 이유는 모든 땅 중에서 가장 좋은 방향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었다. 성 이시도르도 동방에 낙원이 있다고 말했다. 또 아퀴나스는 에덴에서 발원한 강물이 땅 밑으로 스몄다 다시 솟아 올라온다고 했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그런 곳이었다. 그러니 그의 생각에 지구는 적도를 중심으로 옆으로 뉜 서양배 또는 표주박처럼 생겼다. 그는 심지어 과거 지식인들은 지구가 둥글다고 잘못 인식했다고 단정했다. 그런 잘못된 지식은 그들이 지구의 이쪽 면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콜럼버스가 에덴동산을 발견했을 때는 7~8월이었다. 카리브가 한참 우기일 때였으니 아마존에 물이 많아질 때였다. 아일랜드 뮤지션 에냐Enya가 부른 <오리노코강의 물결Orinoco Flow>(1988) 뮤직비디오는 오리노코강을 발견한 카라벨 선의 시선으로 구성되었다. 영상에서 놀랍도록 아름다운 오리노코강과 아마존의 신비한 풍경을 카라벨 선이 탐험하고 있다. 이 뮤직비디오에도 원주민은 살고 있지 않았다. 만일 이 갤리선 안에 콜럼버스가 타고 있었다면 그는 지금 에덴동산을 발견한 경이로움과 신의 이적에 감사하고 있었을 것이다. 에덴동산을 발견했는데 지금까지 황금을 발견하지 못한 것쯤이야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자신은 거룩한 사명을 이루어냈고 스페인 국왕은 이제 천년왕국을 건설할 에덴동산을 얻었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에덴동산에 들어가 보려고는 하지 않았다. “…. 지상 낙원이 여기 있지만, 신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 아쉽게도 그의 믿음은 그에게 대륙 발견의 기회를 빼앗았다.
이제 누구도 나를 비난하지 못하리라. 콜럼버스는 베네수엘라 앞바다 여러 섬에 이름을 붙였다. 로스 테스티고스Los Testigos. 증인들이라는 뜻의 섬 이름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적그리스도는 적그리스도를 기다린 증인들을 죽였고, 증인들도 죽은 지 사흘 뒤에 부활했다. 로스 테스티고스 가까운 해협을 뱀의 주둥이la boca de la Sierpe라 했다. 다른 해협은 용의 주둥이la boca del Drago라고 이름 붙였다. 계시록에서 뱀과 용은 사탄을 상징했다. 콜럼버스는 에덴동산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가톨릭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이 지역의 지도를 상세하게 그려서 스페인으로 보냈다. 지도와 편지를 식민지 사업을 총괄하는 폰세카가 받았다. 폰세카가 오헤다에게 이 지도를 몰래 쥐여 주었다. 오헤다가 베스푸치와 함께 이 지역을 탐험했다. 베스푸치가 트리니다드에서 시작해 브라질 해안까지 남하해 탐사했다. 교황은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고 인정했다. 폰세카는 명백하게 콜럼버스의 독점적 탐험권을 침해했다. 국왕 부부가 늙자 신대륙을 사실상 폰세카가 통치했다. 라스 카사스는 쿠바에서 스페인 정복군이 한꺼번에 어린이 7,000명을 학살한 사건을 스페인 대주교인 폰세카에게 호소하자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콜럼버스가 그나마 행운을 만났다. 원주민들의 몸에 진주로 만든 장식품이 있었다. 황금을 찾지 못한 터에 진주는 그나마 꽤 돈이 될 듯했다. 진주가 많이 나는 섬이니 섬 이름을 라 마르가리타La Margarita라 했다. 이때부터 300년간 베네수엘라 앞바다 섬들은 스페인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식민지가 되었다. 그들은 이 바다에서 원주민들을 진주조개잡이 노예로 몰아넣었다. 물에 들어간 자는 마지막 숨에 이르기 전에 바다를 나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마지막 숨을 물에서 쉬게 된다. 섬의 마지막 다이노까지 물숨을 쉬었다. 라 마르가리타에 원주민이 모두 사라지자 이웃 여러 섬에서 원주민을 잡아다 진주조개잡이로 삼았다. 그렇게 끌고 온 노예 가운데는 콜럼버스가 최초로 상륙해 구세주San Salvador라 이름 붙인 과나하니 섬의 원주민들도 있었다. 콜럼버스의 구세주는 관용한 자들을 진멸했다. 진주조개도 함께 진멸했다. 이때부터 과나하니 섬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200년간 주인 없는 빈 섬이라는 것을 안 영국이 아프리카인들을 데려와 플랜테이션을 운용했다. 지금 그 섬에는 흑인들만 700여 명이 살고 있다. 1510년에 에덴동산이 있을 것이라던 베네수엘라에 아프리카인들도 노예로 끌려오기 시작했다. 콜럼버스가 에덴동산을 발견한 지 12년 만이었다.
그의 배는 히스파니올라 남쪽 해안 식민 거주지로 돌아갔다. 그의 동생이 라 이사벨라를 포기하고, 거점을 옮겨 온 곳이다. 라 이사벨라를 버린 것은 금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무렵 로마 교황청은 이베리아에서 알비파를 섬멸한 도미니크 사제를 성인으로 시복했다. 도미니크를 숭앙한 콜럼버스가 이 새로운 거점에 산토도밍고라는 이름을 내렸다. 산토도밍고는 지금 도미니카공화국의 수도다. 도미니카공화국이라는 나라 이름은 이 도시 이름에서 파생되었다. 라 나비다드, 라 이사벨라는 지금은 흔적도 없다시피 소멸하였다. 그러므로 이 도시가 유럽인이 아메리카에서 건설한 가장 오래된 식민도시다. 산토도밍고로 거점을 옮겼어도 금이 기대했던 만큼 나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린아이까지 광산에 끌어갔어도 소용없었다. 도미니크처럼 콜럼버스는 잔인했다. 그는 다이노들에 할당한 양의 황금을 채우라고 명령했다. 이 양을 채우지 못한 다이노들의 팔을 도끼로 내리쳤다. 마을에는 한쪽 다리가 없는 이들이 숱했다. 마을 가운데서는 반항하는 자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이거나 불에 태웠다. 산토도밍고에만 설치된 교수대가 340개였다. 황금으로 부족하니 노예를 팔았다. 1498년 9월 콜럼버스는 항해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팔 수 있는 모든 노예를 잡아 스페인으로 보낼 것입니다.”
선원을 배에 태울 때 콜럼버스는 에덴동산과 솔로몬의 금, 많은 여자를 약속했었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스페인 거류민이 굶어 죽고, 부자가 되지도 못했다. 살아남은 자들이 자주 콜럼버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돌아가고 싶은 자는 떠날 수 있게 해주었다. 많은 자들이 되돌아갔다. 되돌아갈 때 다이노 1명씩을 노예로 가져갈 수도 있게 해주었다. 콜럼버스의 오랜 친구이자 2차 항해 때 함께 왔던 롤단Francisco Roldán은 섬의 서쪽 지역에 콜럼버스에 대항하여 반군 정부를 세웠다. 콜럼버스는 롤단 무리를 달래기 위해 반란자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고는 원주민 노동력을 징발해 노역시킬 수 있는 권리까지 주었다. 악명높은 엔코미엔다encomienda 체제가 콜럼버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왕은 노예제를 허락한 바 없는데 콜럼버스가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왕의 허가 없이 시행했다. 가혹한 착취가 자리를 잡아갔다. 라스 카사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달고들은 가시관을 붙잡은 뒤 그들을 통해 그들의 마을 주민들을 노예처럼, 사냥해 온 짐승들처럼 대했다…. 일을 늦게 수행한 다이노들을 때리고 귀를 자르고 죽였다.” 콜럼버스의 능력은 이미 판가름 났다. 폰세카가 콜럼버스의 권한을 몰수하고 넘겨받을 관리자를 보냈다. 관리자는 보다디야Francisco de Bobadilla. 그 관리자는 신세계에서 돌아가는 현실을 파악하여 왕에게라 마르가리타 보고했다. 원주민 노예 사용과 원주민 사회의 지옥보다 못한 실상을 담았다. 이에 분노한 국왕 부부는 콜럼버스 3형제를 쇠사슬에 묶어 스페인으로 소환했다. 1500년의 일이다. 보다디야가 후임 총독이 되었다. 콜럼버스는 폰세카에게 넘겨졌다. 폰세카는 그를 투옥했다. 늙은 페르디난드 왕은 콜럼버스가 가졌던 식민지를 총괄 통치하는 지위를 폰세카에게 넘겼다. 콜럼버스와 국왕 부부가 맺은 식민지 통치와 수익배분, 부왕이라는 엄청난 신분상의 권한을 포함한 모든 계약은 파기되었다. 콜럼버스가 식민지에서 소유한 모든 재산도 몰수했다. 폰세카 대주교도 황금을 좋아했다. 보다디야가 총독이 되자 금광은 다이노들의 최우선 노역장이 되었다. 보다디야는 롤단과 함께 1502년에 스페인으로 되돌아가는 배를 탔다. 허리케인이 그들의 배를 부쉈다. 저라과 지역 다이노들은 아직도 항쟁하고 있었다. 보다디야가 콜럼버스를 체포했을 때 콜럼버스 형제들은 저라과 지역에서 다이노와 한창 전투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