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네 번째 항해
4번째 항해
콜럼버스는 쇠사슬에 묶인 채 배에서 내렸다. 선장이 사슬을 풀어주겠다고 했으나 거부했다.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그 쇠사슬을 방에 걸어 두었고, 자신이 죽으면 관에 이 사슬을 넣어달라고도 했다. 모세가 하느님이 맡긴 일을 한 때는 예수가 오기 1500년 전. 예수가 온 지 1500년이 지난 지금 자신은 새로운 예루살렘과 에덴동산을 찾아냈다. 그런 자기를 핍박하다니. 그 부당함을 고발하고픈 심산이었다. 국왕 부부는 콜럼버스를 오래 가둬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시 히스파니올라로 돌아가도록 허가하지도 않았다. 국왕은 보다디야의 후임 총독으로 오반도를 새로 임명했다. 오반도가 32척의 배에 2,500명을 태웠다. 왕은 오반도의 항해에 콜럼버스도 끼워주었다. 이번이 콜럼버스의 생애 마지막 항해였다. 오반도의 항해에 콜럼버스가 자리를 얻어 타고 간 셈이다. 1502년에 그는 카디스를 떠났다. 오반도의 항해는 이전의 항해와 비교해 규모가 현저히 커졌다. 본격적으로 식민지를 확장 정복하겠다는 스페인의 전략이 들어있었다. 특히 관료들이 많았다. 스페인은 탐험의 시대를 지나 이제 본격적인 식민 통치 단계에 들어갔다. 유대인이나 무슬림 같은 이교도는 새로운 예루살렘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 승선자 중에는 아프리카인도 있었다. 주인을 따라나선 노예들이었다. 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인 노예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했다. 그때 공식적으로는 국왕은 현지 원주민들을 노예화하는 것을 금지했었다.
콜럼버스는 이번 항해 때 인도를 돌아 스페인으로 귀환하겠다는 세계 일주 계획을 세웠다. 국왕 부부도 이에 찬동해서 한 통의 편지를 그의 손에 쥐여 보냈다. 인도에서 바스쿠 다가마를 만나면 전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번 항해에서 그는 돈키호테 같은 열정을 보였다. 포르투갈이 차지한 모로코의 성 하나가 모슬렘 군에 포위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모로코로 향했다. 기독교인을 구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탐험을 떠나는 배에는 전투 무기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의 동생이 건설하고 자신이 이름 붙인 히스파니올라의 항구 산토도밍고에 도착했지만, 입항도 거부당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이런 배에 함께 탄 선원들이 형편없는 인간들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는 수 없이 자메이카 남쪽 해안을 지나 서쪽 쿠바를 향해 나갔다. 그는 지금 그가 발견한 바다 위에서 길을 잃었다. 자기 소유로 여겼던 카리브 바다가 지금은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중앙아메리카 온두라스와 파나마 일대 해안을 항해했다. 머릿속에서는 그는 지금 중국을 지났고, 열흘만 더 항해하면 갠지스강에 도착할 참이었다. 낡은 배는 좀조개가 갉아먹어 구멍이 송송 뚫렸다. 결국 콜럼버스의 배 두 척이 파나마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콜럼버스의 긴 항해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1503년 6월 25일의 일이었다. 그의 마지막 항해는 이런 모습이었다. 35일을 부서진 배에 의지해 바다를 떠돌던 그는 쿠바 트리니다드 앞바다 이름 없는 작은 섬에 표류했다.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가 이사벨라 여왕을 기려 여왕의 정원Jardines de la Reina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군도다. 그래도 자신을 살려준 신께 감사하는 기도를 잊지 않으며 그 이름 없는 작은 섬을 산타 글로리아Santa Gloria라고 명명했다. 그 섬에서 부서진 배 조각으로 움막을 삼아 1년을 지냈다. 그가 유럽에 노예로 팔았던 다이노, 어린아이까지 광산에서 굶기며 일을 시켰던 원주민들이 가져다주는 끼니로 명을 잇는 신세가 되었다. 1년 동안 콜럼버스는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끝내 오만한 기독교 백인 인종주의자였다. 그의 ‘인디오’에 대한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첫 항해에서 그를 만난 다이노들이 그에게 해준 따뜻한 환대 그리고 최후의 항해에서 1년간 비렁뱅이인 그를 보살펴준 다이노들의 인정을 겪었으면서도 그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원주민들은 이교도이자 날 때부터 백인들의 노예일 뿐. 그러므로 죽여도, 빼앗아도, 노예로 팔아도 마땅한 미물일 뿐이었다. 그것이 그의 마음의 씨앗이었다. 그는 1년 만에 구조되었다. 그해 겨울 이사벨라 여왕도 죽었다. 여왕은 그에게 많은 재산을 되돌려주었다. 콜럼버스는 2년 뒤인 1506년에 죽었다. 그는 자신이 이룬 성취를 남들이 몰라준다는 점에 괴로워했다. 날마다 세 번씩 성 삼위일체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위해 미사를 드려달라고 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