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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다이노

6. 다이노

#129. 가시관

by 조이진

가시관

콜럼버스를 수행해 다이노의 생활상을 기록하여 스페인 국왕에게 보고한 직책을 맡은 가톨릭 사제는 이곳 사람들이 왕을 가시관Kassiquan이라고 부른다고 썼다. 그러나 사제들은 가시관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복모음을 쓰지 않는 유럽인들에게 복모음을 발음하는 일은 어렵다. 언어는 발음하기 쉬운 방향으로 변한다. 사제들은 처음에는 가시관을 ‘가시콰ka-siqua’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더 발음하기 쉽게 가시께Cacique라고 줄여 불렀다. 스페인어에는 ‘-que’로 끝나는 단어가 흔하기 때문이다. 가시께로 줄여놓고 보니 가시께가 스페인어에 가깝고 발음하기도 쉬웠다. 원주민 왕을 부르는 이름을 스페인어식으로 바꿔놓으니 제법 식민지 야만족의 추장, 미개인들의 두목 같은 이미지도 생겼다.


하지만 가시관이라는 단어에는 스페인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중요한 뜻이 담겨있었다. 스페인 국왕에게 제출된 보고서에 가시관은 원주민 말로 ‘집을 지키는 왕King to keep house’이라는 뜻이라고 기록했다. 스페인 사람들에게 집은 건물일 뿐이다. 하지만 다이노들에게 집은 달랐다. 가문이자 조상이기도 했다. 가온아보 왕은 큰 바위를 쌓아 올린 피라미드 위에 집을 지어 신주를 봉안하고, 그곳에서 하늘신과 땅신 그리고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집에 다이노의 조상신이자 하늘님을 모셨으므로 가시관은 그 집을 지키고 제를 봉행했다. 그러기 위해 바위를 쌓아 피라미드를 올렸다. 바위 위에 초가집이 있는 곳, 지바우에서 제를 올렸다.

지바우.1491.png 가시관이 하늘의 조상신에 제를 올리는 피라미드 지바우. 피라미드 위에 초가집을 세우고 신주를 봉안해 제사를 지냈다./멕시코 리오그란데 가오키아 지역 유적 재건축 현장 <1491>

신용하 교수는 한자어 ‘-관quan’은 ‘칸khan’에서 변한 말이라고 했다. ‘칸’은 ‘왕’이므로 ‘가시관’은 ‘집을 지키는 왕’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가시관은 ‘다이노 공동체를 지키는 왕’이다. 콜럼버스가 맨 처음 쿠바 땅에 도착한 곳 발해이 인근을 다이노들이 구바나칸Cubanacán이라고 불렀다. 구바나라는 이름의 가시관이 다스리는 땅이라는 뜻이다. 카리브와 미국 남부에는 구바나칸이라는 지명이 여러 군데 남아있다. 스페인 사람들은 구바나칸이라는 가시관의 이름을 다이노 왕국 이름으로 알고 ‘쿠바’로 줄여 불렀다. 다이노들은 어떤 특징이나 역할을 가진 자를 가리켜 ‘-보’라고 말했다. 가온아보는 히스파니올라섬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 정치와 군사 지도자이자 제사를 책임지는 다이노 사회의 정점이었다. 가온아보가 섬의 한가운데 지바우에서 제를 봉행했다. 가시관들은 모두 머리뼈가 눌린 편두를 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콜럼버스의 항해 일지에 나타난 것처럼 가시관은 그의 행동이나 치장에서 다른 계급과 분명히 구별되었다. 콜럼버스는 “이 신사들은 말수가 거의 없고 무척 아름다운 옷을 입고 가벼운 손동작만으로 통치하고 있으니 이는 놀라운 일입니다”라고 스페인 왕실에 보고했다. 가시관은 다이노 사회에서 최고 존엄이었다. 라스 카사스는 가시관을 이렇게 적었다. “왕은 모두를 보살폈다. 왕과 왕실 귀족들은 언제 무슨 작물을 심을지, 언제 어느 바다로 어떤 물고기를 잡기 위해 카누를 타고 나가게 할 것인지를 결정했다.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시관의 가장 중요한 사무다. 백성들은 수확한 것 전부를 가시관에 가져왔다. 그리고 가시관은 집집이 골고루 나누고 부족함이 없는지를 살폈다. 그들은 필요한 모든 것을 이런 방식으로 나누었다. 백성에게 부족한 것이 생기거나 필요한 일이 생기면 왕은 모든 사람을 명령하고 지휘하고 지도했다.” 다이노들은 대개 같은 조상을 둔 씨족들끼리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 작은 마을은 1,000명 정도, 뭍의 마을은 보통 10,000명 정도가 모여 살았다. 바닷가에는 10~20 가구만 사는 작은 마을들도 많았다. 다이노 사회의 생산 과정을 결정하고 그것을 관리하는 일이 가시관의 가장 중요한 사무였다.


신분에 따라 3가지 가시관이 있었다. 기초단체에 해당하는 작은 단위 영역을 다스리는 가시관, 광역단체를 통치하는 지방 장관 격의 가시관, 그리고 섬 전체를 다스리는 최고위 가시관으로 나뉘었다. 라스 카사스는 가시관을 부르는 칭호가 달랐다고 했다. 섬 전체를 다스리는 최고위 가시관은 ‘마튼허리Matunherí’이고 유럽의 “Your Highness”에 해당한다고 했다. 지방 장관 가시관은 바하리Baharí라고 하여 “Your Honor”와 같고, 마을을 다스리는 가장 낮은 가시관 과세리Guaoxerí는 기사knigts를 부르는 “Your Mercy”와 같았다. 다이노들은 첫 번째 항해 때 콜럼버스에게 왕 중의 왕, “Great Lord”이라는 뜻인 과미끼나Guamiquina라는 최고 호칭도 부여했다. 마튼허리와 바하리 가시관들은 연방제 같은 국가연합체로 관계했다. 서로 독립적으로 자기 영역을 다스리되 광역 가시관 중에서 용맹하고 지혜로운 가시관을 뽑아 최상위 가시관인 마튼허리로 추대하여 연방 전체를 군사 외교적으로 통치하게 했다. 가온아보가 마튼허리였고 구가나가리는 바하리였다. 만일 전쟁에서 패하거나 백성이 굶주리면 마튼허리 가시관을 탄핵하고 바하리 중에서 새로 선출했다. 혈연인 1만 명 정도 되는 니다이노가 60만 명가량의 쿠바 다이노 사회를 통치했다. 가시관끼리는 가문 간 혼인을 통해 하나의 군장국가로 통합했다. 예를 들어 저라과Xeragua 지방의 바하리 가시관 비치오Behechío는 30여 명의 부인을 두었다. 그 부인들은 서로 다른 지역, 다른 가문 출신들이다. 혼인으로 혈연관계를 맺어 가시가즈고를 통합했다.


가시관 지위는 모계를 통해 상속되었다. 가시관의 누나의 큰아들이 후계자가 되었다. 새로 상속받은 가시관은 모계 출신을 중용하여 새로운 지배 세력을 형성했다. 스페인 기록자는 이렇게 적었다. “그들은 큰누이의 큰아들을 왕국의 상속자로 뽑았다. 만일 그런 조카가 없다면 둘째 누이의 큰아들을 뽑았다. 그 누이도 아들이 없다면 세 번째 누이의 큰아들을 찾았다. 누이들의 아들이 없다면 죽은 왕의 동생에게 왕위가 돌아갔다. 만일 동생도 아무도 살아있지 않다면 그들의 살아있는 아들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이 섬에서 가장 권능이 강한 신성으로 모셨다. 새로 선출된 가시관은 전임 가시관인 외삼촌이 어렸을 때부터 집으로 데려와 양육했다.” 모계사회의 전형적인 상속 방식이다.


스페인어 마요라즈고mayorazgos라는 단어가 있다. 우두머리가 다스리는 땅을 말한다. 스페인어 마요르mayor는 ‘연장자, 장남’이라는 뜻이고, ‘-azgo’는 지엄한 신분을 뜻하는 라틴어 접미사다. 스페인 사람들은 카리브의 가시관이 스페인의 마요르와 비슷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가시관이 다스리는 땅’을 스페인 사람들 말로 가시가즈고Cacicazgos라고 했다. 다이노 사회가 고대 국가로 발전하기 바로 전 단계의 군장국가chiefdom였고, 군장의 왕국을 국읍이라 하므로 가시가즈고는 ‘가시관이 다스리는 국읍Caciquedoms’라는 뜻이 된다. 다이노들은 국읍의 이름 끝에 ‘-코아coa’를 붙였다. ‘-코’, ‘-코아’로 끝나는 지명은 쿠바를 비롯한 카리브해 섬뿐만 아니라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브라질, 칠레, 멕시코, 캘리포니아, 플로리다 등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서 숱하게 있다. 아바나 한가운데 있어 쿠바의 이름이 된 구나바코아, 스페인이 세운 최초의 쿠바 도시 바라코아가 그 예고, 멕시코Mexico, 옥자가Oaxaca, 쿠스코Cusco 같은 이름도 다 가시가즈고 즉 고을의 이름이다. 콜럼버스가 상륙했을 때 쿠바는 29개의 가시가즈고로 나뉘었으며, 아바나, 바타바노, 까마궤이, 바라코아, 바야모와 같은 도시 이름도 오래전부터 있었던 다이노 고을의 이름이다.

images (33).jpeg 잉카의 가시관 투팍 아마루

가시관은 옷차림도 달랐다. 가시관이 입었던 옷은 튜닉 스타일이다. 튜닉은 소매가 없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일종의 긴 조끼다. 흰 면으로 짠 튜닉을 입었다. 가시관들은 쾌자의 목 주변에 새의 깃을 꼽아 장식했다. 새 깃은 자신의 가문을 상징했다. 가문마다 숭앙하는 새가 달랐으므로 다른 깃이 들었다. 가시관들은 순금으로 된 왕관을 썼다. 또 괴자guaizas라는 탈을 썼다. 다이노 말 괴자는 얼이 사는 곳인 얼굴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탈은 옥으로도 만들었고, 나무로도 만들었고, 면으로도 만들었다. 나무틀에 옥을 붙인 아름다운 탈도 있다. 마야나 잉카에서는 청동 탈도 만들어졌다. 카리브와 마야에는 옥으로 만든 아름다운 탈들이 많다. 강력한 왕권일수록 옥을 가공해서 탈을 만들었다. 탈에 새의 깃을 달기도 했다. 또 탈에 여러 색상의 보석과 금을 붙여 치장했다. 진줏빛 자개 조각을 여러 모양으로 박아 붙여 나전 장식한 것도 있다. 옥 문화는 다양했다. 옥으로 여러 인형을 만들었다. 옥으로 만든 편두를 한 인물 인형이 유독 많았다. 면으로 짠 허리띠를 찼다. 허리띠에 가문을 상징하는 토템 이미지를 수놓아 새겼다. 얼굴 전체를 가리는 탈도 있었지만 눈 주위만 가리는 작은 탈도 썼다. 탈들은 웃는 얼굴이 많았다. 살포시 배시시 야릇 웃는 산호로 만든 여인 얼굴을 한 탈은 경주박물관의 ‘신라의 미소’ 무늬 기와와 거의 흡사하다. 가체를 얹은 두상 표현도, 가체의 형태도 같다. 멕시코의 아스텍 여인들은 동북아시아 여인들처럼 어여머리를 얹어 몸단장했다. 콜럼버스는 구가나가리 가시관의 탈을 선물 받았다. 구가나가리가 자기 탈을 선물로 준 것은 콜럼버스를 자신의 혈맹으로 삼는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콜럼버스에게 그것은 단지 이단 사탄의 우상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스페인 박물관에는 그런 유물이 남아있지 않는다.

달의 여신_과달루페섬.png 산호로 만든 여인상. 농사에 중요한 달의 여신으로 추정된다.

+ 영어권에서는 마약 폭력조직 같은 불량한 무리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말로 '카시크'라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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