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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다이노

6. 다이노

#144. 이랑

by 조이진

이랑

다이노들은 당시 유럽과 비교해 진보된 농업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재미가 농사를 잘 돌봐준 덕이기도 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농사 기술이 있었다. 여기에 자연을 이용하고 밤하늘 별밭을 보아 절기의 반복을 터득한 지식이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켰다. 콜럼버스가 상륙하기 전에 다이노들은 몇 가지 농업 관개 시스템을 갖추어 활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작물 심은 밭을 무릎 높이까지 흙을 두둑이 돋워 이랑을 쌓았다. 이랑과 이랑 사이로 고랑을 만들어 물흐름이 잘 되게 했다. 라스 카사스는 다이노들은 어디서든 작은 막대기 하나만큼의 높이와 3m쯤 되는 폭으로 두둑을 쌓아 이랑을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고랑은 폭이 50cm 정도 된다고 했다. 물이 잘 빠져 작물의 씨가 썩지 않기 위해 그렇게 한다고 했다. 다이노들은 비탈에서도 경사를 따라 땅을 갈고 고랑을 파서 비탈밭을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 철마다 땅을 갈아 부드러워진 이랑은 적절한 습도와 영양을 작물에 주었다. 달리 농사짓는 밭은 보통 50,000 이랑에서 80,000개의 이랑을 한 단위로 해 만들어져 있었다. 물막이 보를 막아 거기서 작고 좁은 도랑을 내서 밭마다 물을 끌어대 작물을 키웠다. 그렇게 물을 끌어오는 작은 밭도랑을 아새끼아acequias라고 스페인 사람들은 기록했다. 동북아시아 밭의 모습과 다를 게 없다. 쿠바 사람들은 지금도 두둑과 두둑 사이 고랑으로 물 빠지는 밭에서 작물을 키운다. 정복자들은 이 이랑을 다이노 착취에 잘 이용했다. 이랑의 수를 세서 기독교인들에게 밭을 나누어주었다. 기사에게는 20만 이랑을 영지로 주었다. 돈키호테가 쿠바에 왔으면 그도 20만 이랑은 받았을 것이다. 산초 같은 하급 군인도 상당한 이랑을 주었다. 땅을 부쳐 먹고사는 밭 근처 마을에 사는 다이노들도 모두 노예로 삼았으니 젊은 다이노 여자 두어 명도 데리고 살 수 있었다. 밭고랑 사이로 눈물이 흘렀다. 다이노들에게 농사를 가르쳐준 신 유가후과마의 눈물도 흘렀다.

다이노들은 이랑을 이용해 농사를 지었다. 유럽인들에게는 낯선 농법이었다.

고랑을 내기 위해 자귀xagüeyes를 썼다. 구멍을 낸 나무토막에 긴 자루를 박아 손으로 쥐고 밭을 갈게 만든 농기구를 다이노들도 자귀라고 했다. 자귀로 땅을 갈아 알뿌리 작물을 심었다. 동북아시아 농부들도 밭을 갈고 고랑을 파고, 감자나 고구마를 심고 캘 때 그런 도구를 쓴다.

마을 앞 농사짓는 밭을 고누고conuco라 한다고 스페인 사람들은 기록했다. 너른 밭을 도랑을 내서 같은 면적의 여러 배미로 나누어 구획하였다. 그중에 큰 배미는 마을 사람들 전체가 울력하여 공동으로 경작하고 공동으로 소유했다. 그러니 누구라도 헐벗고 굶주린 마을 사람은 없었다고 스페인 사람은 기록했다. 우리말 ‘고누다’도 쿠바 다이노들과 같은 뜻이었다. 땅에 금을 그어 나누는 일을 고눈다고 했다. 밭고누는 정사각형 모양으로 도랑을 쳐서 같은 면적으로 반듯하고 공평하게 분할한 밭을 말했다. 전라도 사람들은 어떤 일을 신중하게 염두에 둔다는 뜻으로 ‘고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1970년대까지도 흙바닥에 선을 긋고 말판을 만들어 돌멩이와 나뭇가지로 말을 만들어 놀았다. 이런 놀이를 고누놀이라고 했다. 고누놀이는 우리 조상들이 땅바닥에 선을 그어 고누판을 만들어 즐겼던 놀이다. 12세기 고려 시대 때 풍속을 그린 문집 <공방전>에도 등장하고 김홍도의 풍속화에는 볏짐 지게를 내려놓고 가을 사내들이 고누놀이하고 있었다. 500년 전 쿠바 조상들은 밭을 고누어 나눈 고누고를 기반으로 공동경제 체제로 살았다. 소와 철기가 없었던 아메리카에서는 콜럼버스가 올 때까지 고누고 공동경제 체제가 유지되었다.

maiz-siembra-hectareas-venezuela-produccion-lluvias-portuguesa-federadiove.jpg 쿠바의 고누고. 이랑을 기준으로 여러 배미로 나누어 토지를 나누어 경작했다. 가운데 고누고는 마을 공동으로 경작하여 가난한 마을 사람을 위해 울력했다. 동북아시아의 정전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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