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배달
배달
캐나다는 아직 빙하에 덮여 있었다. 두께가 각 수천 미터씩이나 되는 2장의 얼음장이 붙어있었다. 빙하가 녹기 전 구석기시대 동북아시아인은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두 대륙을 오갔다. 빙하는 많은 물을 가두었고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두 대륙은 뭍으로 이어졌다. 유라시아인이 최초에 아메리카 대륙에 어떻게 왔는가를 연구하는 고고학계는 해안을 주목하고 있다. 해안이동 이론이다. 빙하가 녹기 전에 동북아시아인은 유라시아 태평양 연안 해안을 따라 카누를 타고 알래스카를 지나 아메리카로 이주했다는 이론이다. 고래 때문에 먼바다를 건넜다. 오리건주립대학 해양포유류 연구소는 사할린 앞바다에서 한국계 귀신고래 ‘바바라’에게 GPS를 부착했다. 한국계 귀신고래의 정확한 회유 경로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바바라는 베링해를 건너 한 달 뒤 알류샨 열도에 도착했다. 북아메리카 대륙 해안에 바짝 붙어 헤엄쳐 밴쿠버, 시애틀을 지나 멕시코 바흐칼리포르니아까지 내려갔다. 두 달 동안 로키산맥 서쪽 태평양 연안 바다에서 머문 뒤 봄이 된 알류샨으로 되돌아갔다. 고래는 울산 앞바다에서 멕시코 바다까지 태평양 양쪽 해안을 왕래했다. 그 가운데 베링해와 알류샨 열도가 있었다. 동북아시아 고래잡이들이 고래가 다니는 이동 경로를 따라 알류샨 열도에서 온돌 집을 짓고 구들장에 불을 넣어 몸을 덥혔다. 그리고 고래를 따라 아메리카에 드나들었다. 오리건 대학교 얼랜슨Erlandson은 다시마숲을 주목했다. 다시마는 동북아시아 한반도에서 알류샨 열도를 지나 채널제도를 거쳐 바흐칼리포르니아까지 해안을 따라 원시림 같은 바닷속 숲을 이루었다. 알래스카 해안 바위는 다시마로 뒤덮였다. 해저 다시마숲에는 바다 포유류, 어류, 조개류가 풍부하다. 고래는 다시마숲을 따라 이동했고, 아메리카에 최초로 정착한 이민자들은 고래를 따라 이 루트로 이동했다.
다시마는 하루에 50cm 정도 성장한다. 30~60m 나 되는 다시마가 밀도 높게 군집해 울산 바다에서 멕시코 앞바다까지 끝없이 이어진다. 다시마숲이 카누를 탄 고래잡이들에 고속도로가 되어주었다. 동북아시아인들이 이 고속도로를 타고 아메리카에 최초로 이주했다. 쌀과 콩 대신 다시마숲을 이룬 바다가 북미와 남미의 초기 거주자들을 보호해 주었다. 캘리포니아 앞바다에는 섬이 많다. 채널제도 해안이동 경로와 겹친다. 캘리포니아 본토와 가깝게 떨어진 이 섬은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13,000년 전에도 북아메리카에서 인간이 정착해 살았고 항해했던 최초의 증거가 있다. 이 섬을 다시마와 미역이 휘감고 있다. 이 섬 원주민들도 카누와 같은 쪽배를 탔다. 풀을 엮어 만든 카누 띠앗ti'at을 탔다. 빙하가 녹아 수면이 상승했고 채널제도 주위 바다는 물에 잠겼다. 신석기인이 살았던 오랜 흔적도 잠겼다. 신석기인이 걸었던 땅 위의 길들과 발자국들도 잠겼다. 얼랜슨은 해안선과 미역밭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는 이들을 위한 생태적 환경이었다고 했다. 알류샨의 족장도 염을 마친 시신을 미역으로 감아 수분을 흡수했다. 14,000년 전의 잉카문명 유적지인 몬테베르데Monte Verde 유적에서는 10가지 이상의 미역이 발굴되었다. 로키산맥 서쪽 채널제도에서 서식한 것들도 있었다. 해안에서 해안으로 고대인이 이동했다는 해안이동이론Beach to Beach Theory. 출발지 해안은 한반도 동해안이고 종착 해안은 아스테카 문명의 멕시코를 지나 마야와 잉카문명의 페루 해안이었다.
지구가 더워졌다. 빙하가 녹고 있었다. 지구 온도가 올라가고 빙하가 녹고 수면이 상승했다. 베링해협은 50°에 가까웠다. 50° 가까운 온도에서만 살 수 있었던 딱정벌레 종 화석이 시베리아와 알래스카에서 발견되었다. 베링해는 봄이 되면 키 낮은 풀에서 핀 작고 붉은 꽃송이가 지천에 널리 피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알프스 산등성이와 비슷한 풍경이었다고 지구과학자들은 말한다. 사람이 걷기에 좋은 길이었다. 연륙교는 나비와 벌이 날았다. 따스하고 평화로운 길이었다. 학자들은 이 땅을 베링지아Beringia라 또는 베링육교라고 부른다. 동북아시아의 신석기인들이 베링육교를 건너 알래스카를 건넜다. 태양이 뜨는 환한 동으로 갔다. 북극성을 보고 방향을 잡았다. 북과 남, 동과 서를 잘 알 수 있었다. 알래스카에서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얼음이 녹아 알래스카 입구에서 시작해 미국 국경 근처까지 알래스카 전체를 관통해 흐르는 유콘강에 들어서기만 하면 그 강을 따르면 되었다. 오히려 캐나다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그때 캐나다는 수천 미터 두께의 큰 빙하 2장이 연결되어 뒤덮고 있었다. 빙하가 녹기 시작할 때 연결부위가 먼저 녹기 시작했다. 녹은 빙하 물은 남북으로 강을 만들어냈다. 캐나다 로키산맥 동쪽 사면을 따라 난 두 줄기 유콘강 계곡은 좁고 긴 회랑이 되어 먼 길 걷는 신석기 여행자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었다. 유콘강은 남으로 흘러 캘거리Calgary가 있는 남부 앨버타로 흐른다. 빙하가 만들어놓은 회랑으로 들어간 등짐 봇짐 진 나그네들은 물 따라 흘러 캐나다 로키산맥 동쪽 사면을 지나 빙하 회랑의 출구인 에드먼턴에 닿았다. 길고 긴 빙하 길이 끝났다. 따뜻한 이곳은 동식물이 풍부했다. 거대한 빙하 사이를 지나온 동북아시아인들. 큰 배낭을 메고 긴 여행이 끝나고 막 터미널에 내린 여행자들 같은 기분이었을 테다. 캐나다 에드먼턴이 그 회랑의 터미널이었다. 지금의 미국 땅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이리저리로 흩어졌다. 빙하기 이후의 아메리카에 도착한 동북아시아인들. 이들이 신대륙의 주인들이었다. 이 빙하 회랑이 생긴 지 700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 멕시코에는 벌써 많은 사람이 군집해서 살았다. 그 흔적을 간직한 대형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멕시코의 대형 마을 유적지가 만들어진 지 1,000년 만에 칠레 땅끝 파타고니아에도 사람들이 도착했다. 1년에 13km씩 내려간 셈이다. 아메리카에서는 벌써 동아시아에서 건너온 열정적이고 도전적이며 강인한 근성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작은 마을을 만들어 번성하고 있었다. 아직 유럽대륙은 남유럽을 제외하고는 빙하에 뒤덮인 채였다. 고대 이바르 또는 밝족이 중부 유럽을 덮은 빙하 남쪽 선을 따라 이베리아에 들어가기도 전의 일이었다.
가리부Cariboo 산맥과 로키산맥 사이가 또 다른 회랑이었다. 그 회랑 끝에서 시애틀 쪽으로 아래로 내려오면 워싱턴 주에 배달Bedal이라는 지명이 있다. 배달 옆에 왜 ‘가리부’라는 이름의 산이 있을까. 카리브해의 다이노들은 저승을 가리배라 했다. 이곳을 지나던 동북아시아인들, 훗날 다이노가 된 사람들은 저 산이 너무 높고 추운 산이라 그 산 너머 하늘에 저승이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배경이 된 강의 이름이 플랫헤드Flathead. 편두라는 이름의 강이다. 플렛헤드 강은 배달을 흐른다. 서양학자들은 몽골인을 포함한 동이족, 한족, 그리고 왜족을 몽골로이드라 한다. 몽골로이드 중에 편두를 하는 습속을 지닌 민족은 동이족뿐이다. 플랫헤드 강에는 지금도 4,000여 명이 사는 플랫헤드 인디언 보호구역이 있다. 이들은 사람이 사는 집을 디비tepee라 부른다. 배달이라는 민족이 여기에서 새로운 땅을 찾아 아메리카 대륙 전체로 흩어졌다. 터미널은 에드먼턴이 아니라 배달에 있었을 것이다. 편두를 한 배달민족이 아메리카의 첫 주인이었다. 이곳에서 로키산맥 동쪽 사면을 흐르는 강을 따라 곧장 내려가면 캘리포니아까지 닿을 수 있다. 이 강도 좁은 회랑이 되어주었다. 1938년에 발굴된 오리건주 포트 록 동굴Fort Rock Cave은 아메리카 대륙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고고학적 유적지다. 지금은 사막인 이곳에서 수십 켤레의 짚신sandals이 발견되었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9,500~10,500년 된 짚신이었다. 이 짚신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발 유물이다.
이 유물은 7,600년 전 화산재로 덮였으므로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었다. 원주민들은 겨울에는 동굴에서 지내며 짚신을 만들고 여름에는 이 짚신을 신고 동굴을 나와 초원 습지에서 사냥했다. 그 습지가 지금은 오리건과 네바다 사막이 되었다. 짚신이 있는 동굴은 북아메리카에서 인간이 거주했다는 가장 초기의 증거로 꼽힌다. 이 짚신을 만든 기법을 미국학자들은 길고 복잡한 문장으로 서술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매우 익숙한 짚신이다. 민속촌에 가면 볼 수 있는, 사극에 출연한 연기자들이 흔히 신고 나오는, 재래시장에서 쉽게 살 수 있는 그런 짚신이다. 포트 록 샌들은 우리 조상의 짚신과 디자인과 매듭 기법 등에서 일치한다.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동북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1만 2천 년 전부터 서기 후 8세기까지 크게 4차례 대규모 인구이동이 있었다고 한다. 이 짚신을 신었던 사람들. 이들이 첫 번째로 동북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이동한 사람들이다.
두 번째 인구이동은 8000년 전에 있었다. 빙하가 다 녹았을 때였다. 이동한 신석기인들은 빗살무늬토기를 지니고 왔다. 이들도 배달을 거쳐 같은 경로를 따라 멕시코까지 왔다. 그 일부가 콜롬비아에서 “┣” 모양으로 방향을 틀어 베네수엘라를 지나 오리노코강을 지나 소앤틸리스 징검다리를 건너 최초로 대 앤틸리스와 카리브해에 진출해 정착했다. 이들은 콜럼버스가 침략했을 때 진멸 당한 다이노의 먼 조상이다. 카리브해에는 이들이 쓰던 토기 유물이 아주 흔하다. 그래서 고고인류학자들은 토기 유물로 문화의 시대를 구분하는 중요한 자료로 삼는다. 이들도 동북 아시아인들과 마찬가지로 맨 처음에 빗살무늬토기를 쓰더니 나중에는 민무늬토기를 만들어 썼다. 이들이 메주와 감자, 고구마, 땅콩 같은 종자를 개량한 메소아메리카 농업혁명의 주역들이었다.
세 번째 민족이동은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 무렵이었다. 이때 동북아시아에서는 단군이 주변 군장 고을을 통합하여 처음으로 국가를 세웠다.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부족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새로운 땅을 찾아 어디론가 떠났다. 이들은 지도자가 죽으면 매장하고 고인돌로 덮었다. 이들이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날 때 고인돌 문화도 함께 따랐다. 고인돌이 서쪽으로는 고대 이베리아까지 퍼졌다. 포르투갈 포르투 항 주변에도 고인돌이 많이 있는 이유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바르Ibar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기록한 밝족이 이때 이베리아에 왔다. 이베리아는 로마 사람들 말로 ‘이바르의 땅’이라는 뜻이다. 이바르 사람들이 그리스 사람에게 ‘밝은 곳’에서 왔고, 그곳은 물과 풀이 많은 곳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중앙아시아 초원 지역은 물과 풀이 많은 곳이다. 얼음으로 덮인 추운 곳이 아니었다. 서기 전에 작성된 로마 문서에 “농사짓는 바스코 사람들 Vasconum agrum”이라는 기록이 있었다. 밝족은 동북아시아에서 쌀과 콩, 보리, 밀, 깨를 종자 개량해 재배한 농업혁명의 천재들이었다. 농사짓는 밝족이 이베리아에서도 첫 번째 주인이었다. 서기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했다. 동북아시아 유일 강국인 고조선이 유지해 온 2,800여 년의 동북아시아 지역 평화 체제가 붕괴하고 불안정해졌다. 만주에서 중앙아시아 초원에 걸친 방대한 영토의 연방이 해체되었다. 제후국들은 각자 독립적으로 살길을 찾았다. 동북아시아인은 중화족에 굴종하지 않았다.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고조선 때부터 수천 년 동안 동북아시아인이 이동했다. 말을 탄 유목 동북아시아인은 서쪽 초원을 따라 새로운 농경지를 찾아 떠났다. 고조선 서쪽 연방을 담당하던 훈족이 게르만족을 이동하게 했고, 이탈리아를 넘었다. 발칸은 ‘밝은 산’이라는 뜻이고, 불가리아는 ‘밝족의 땅’이라는 뜻이다. 이들도 ‘아바르Abar’라 기록된 밝족이다. ‘훈’이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 이베리아반도의 피레네산맥을 넘었다. 밝족은 중세 이베리아에서 나라를 세우고 고을 이름 끝에 ‘-코ko’를 붙였다. 그래서 나바라Navarra 왕국의 문장에 윷판 문양이 들어 있었다. 나바라 왕국의 바스크식 이름은 나바로아코 이러서마Navarroako Erresuma다. 아라곤의 바스크식 이름은 아라고이코 이러수마Aragoiko Errusuma. 또 아라요 코로아Aragoiko Koroa라고도 쓴다. 아라곤 사람들은 Aragó라고 쓰고 ‘아라요’라고 발음한다고 전술한 바 있다. 바스크 지역 마을 이름에는 ‘코리– cori’로 끝나는 곳이 여럿이다. 바스크들이 세운 네 왕국 중에 카스티야 왕국이 스페인을 통일했다. 스페인 최전성기 펠리페 2세 국왕을 상징하는 깃발의 문양에도 윷판 문양이 새겨있다.
동쪽으로 간 밝족은 유라시아를 지나 아메리카에서 가장 일찍 해가 뜨는 곳 카리브해까지 갔다. 다이노들도 나라 이름에 ‘-코아coa’를 붙였다. 바라코아, 과나코아 등 ‘코아’로 끝나는 지명은 쿠바는 물론이고 중앙아메리카 전역에서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남아있다. 지명은 살았던 이들이 남긴 역사의 지문이다. 이때 모계사회인 맥족도 동쪽으로 떠났다. 저라과Xaragua 가시관 비치오가 스페인군에게 살해당하자 누이인 안아가온아가 저라과의 가시관이 되었다. 인류학자들은 남자 가시관보다 안아가온아가 더 높은 신분이었다고 밝혔다. 가시관은 모계를 통해 승계되었고, 재산도 모계를 따라 상속되었다. 다이노 사회는 동북아시아 모계사회의 특징과 매우 일치했다. 양주동 박사는 한자어 ‘맥’은 ‘밝’을 음차 한 이두식 한자라고 했다. ‘발해’도 마찬가지로 ‘밝은 해’의 음차라고 했다. ‘배달’도 ‘밝은’이라는 뜻을 음차 한 이두식 한자다. 모두 ‘해가 뜨는 밝은 땅’이라는 뜻이다. 그 뜻을 한자로 바꾼 이름이 조선이다. 조선, 아름다운 이름이다. 동쪽으로 간 밝족이 사람을 살리는 꽃, 그래서 꽃 중의 꽃인 목화씨를 품고 아메리카로 갔다. 카리브에서도 흰옷을 입고, 흰 무명실 꾸러미로 만들어 콜럼버스가 상륙했을 때 물건을 바꾸자며 끝없이 가져왔다. 그들도 백의민족이었다.
네 번째는 서기 후 6세기부터 10세기까지 일이다. 6세기부터 수, 당은 고구려를 공격했다. 동북아시아 세력과 중화 세력이 전쟁을 거듭했다. 고구려가 패했다. 당나라가 동북아시아의 동이족을 해체하려 했다. 수십만 명의 고구려인들이 강제로 이주당했다. 굴종하지 않는 고구려인들이 동쪽으로 먼 길을 나섰다. 고구려 유적지 집안에는 장군총 같은 적석총들이 수 백기가 있다. 석촌동 방이동 일대에도 백제의 피라미드가 많았다. 돌을 쌓은 무덤 피라미드는 왕의 능이기도 했고 하느님이자 조상신 가까이에서 하늘에 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했다. 서기 후 10세기는 발해가 멸망할 때다. 발해 멸망은 역사학자들도 그 원인을 설명하지 못한다. 발해가 멸망한 시기에 카리브해에는 새로운 세대의 다이노들이 끊임없이 밀려 들어왔다. 이들이 어빙 로즈가 말한 ‘코리언Courian’이다. 인류학자들은 콜럼버스가 상륙한 뒤로도 카리브에 다이노들이 계속 유입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들이 ‘밝’, ‘까마궤이’, ‘집바우’, ‘가시관’, ‘해태이’, ‘가온아보’ ‘저가’, ‘마라과’, ‘고려’, ‘발해’ ‘신라’, ‘발해이’, ‘포도시’ 같은 숱한 우리말을 중앙아메리카에 흔적으로 남겼다. 한자식 용어도 많이 사용하였는데 고구려에서는 한자를 2~3세기부터 사용했다. 그러므로 8세기부터 이주한 다이노들 중 귀족 지배층은 이미 한자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아메리카에서는 한자를 문자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에 각각 한 사람씩을 세워서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천군이라 부른다. 또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이 있으니 그것을 소도라 한다. 그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라고 기록했다. 가시관이 가시가즈고를 다스리며 밭Batú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보이게가 당산나무 아래서 굿이라 할 수 있는 코르돈 댄스를 하는 풍경과 같다. 라스 카사스와 여러 스페인 기록자는 카리브해에 “사람이 들판의 풀잎처럼 많다”라고 적었다. ‘들판의 풀잎’처럼 많은 사람은 동북아시아에서 이주한 동이족이었다.
히스파니올라섬은 군주제 국가이면서 동·서·남·북으로 4명의 제후 군주를 둔 일종의 연맹제국이었다. 섬의 가운데서 가온아보가 최고 통치자로서 제후 군주를 통제하였고, 네 명의 제후 군장은 제후국 통치의 일정한 자치권을 갖는 왕족이었다. 고조선과 정치체제가 같았다. 고조선은 최고위 관료 귀족이자 지방 장관직에 [가加]라는 호칭을 붙였다. 고조선의 제후국이었던 부여국에서는 관직명에 ‘가’를 붙여서 ‘마가’, ‘우가’, ‘저가’, ‘구가’를 두었다. 그와 같이 히스파니올라에서도 마가Magua, 이가Higua, 저라가Xaragua, 구가Guga라는 이름의 4가가 동서남북을 맡았다. 그 한가운데 가온아보Caonabo가 있어 4가를 아우르고 섬 전체를 다스리는 최고위 가시관이었다. 4가의 이름은 북쪽의 구가나가리Guganagari, 남쪽의 마가요Maguayo, 동쪽의 이가요Higüayo, 서쪽의 저라가Xaragua다. 최고위 가시관인 가온아보를 마튼허리Matunherí라고도 불렀다. 고조선은 말, 소, 돼지, 개, 닭 가축을 사육했다. 가축은 농업생산과 식용 자원으로 중요했다. 그래서 마가, 우가 같은 이름으로 귀족 계급을 칭했다. 하지만 카리브해에는 소, 돼지, 닭 같은 동물이 없었다. 그런데도 귀족의 계급을 부르는 전통을 그대로 유지했다. 단 민족의 후손임을 자부하며 전통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신용하 교수는 제후국 부여국이 “여러 가加들이 별도로 사출도四出道를 주관하는데, 큰 곳은 수천 가家를 주관하고, 작은 곳은 수백 가를 주관하였다”라고 하였다. 집을 지키는 왕이라는 뜻이므로 다이노 사회에서는 가시관들인 셈이다. 고조선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이노 사회에서도 이들 고위 관료 귀족 아래서 크고 작은 읍락을 다스리는 군소 군장, 읍장, 촌장 같은 지위의 하급 귀족 신분이 있었다. 이들이 제왕의 통치를 보위하면서 아래로는 평민 지배를 담당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군사의 장교 또는 지휘관이 되어 국방을 담당했다. 다이노 사회는 고위 가시관-촌장 가시관과 보이게 세 집단으로 귀족 신분이 형성되었다. 이는 귀족관료-하급 귀족-천군(신관)으로 구성된 고조선의 귀족 신분 구성과 같다. 고조선에서 천군은 신관이었다. 조상신이며 하느님인 단군 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자손들의 가호와 안녕을 기원하면서 영적으로 소통했다. 다이노 사회에서는 보이게가 이런 역할을 했다. 이들 지배계층은 단군의 직계 자손이었으므로 니다이노라 했고, 피지배층은 나보리야라 했다.
다이노들이 콜럼버스에게 지바우라고 했던 피라미드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에도 많았다. 중국에는 이런 무덤 양식은 없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릉과 장수왕릉인 장군총이 피라미드형 거대 적석총이다. ‘큰 바위 위에 있는 집house on stony mountain’이라는 뜻의 지바우는 히스파니올라에도 푸에르토리코에도 자메이카에도 많다. 카리브해에 있는 피라미드 대다수는 고구려 장군총과 규모가 비슷하다. 멕시코의 치첸이트사 같은 피라미드는 고구려의 것 보다 훨씬 크다. 플로리다와 루이지애나, 오하이오 등 과거 거대한 인디언 문화가 있었던 지역에도 이런 피라미드들이 많았고, 그 주변에 경주 왕릉처럼 흙을 덮어 봉분을 올린 큰 토구mounds가 수백 개씩 군락 해 있는 곳이 북미 지역 여러 곳에 있다. 고구려와 아메리카 전역에 흩어져 있는 피라미드는 맨 위 꼭대기가 평평하다. 마치 끝을 잘라낸 듯하다. 끝이 날카롭게 뾰족한 이집트의 피라미드와는 다르다. 미시시피 인디언들은 피라미드 꼭대기를 편평하게 만들어 나무로 울타리를 두른 초가집에서 제사장이 하늘과 조상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집이 있는 큰 바위가 이것이다. 치첸이트사 피라미드의 꼭대기도 편평하다. 그리고 사각형이다. 별을 관측하는 첨성대의 꼭대기도 편평한 사각형이다. 편평한 사각형 바닥은 땅을 상징했다. 둥근 하늘 아래 네모난 피라미드 꼭대기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초현실적 중간자인 가시관의 공간이었다. 치첸이트사 피라미드에 바람이 스치면 신전의 네모난 꼭대기에서 신비로운 새소리가 난다. 이 지바우를 세운 사람들은 새를 토템으로 신앙하는 민족이었다. 쿠바섬 서쪽 끝과 유카탄반도 사이 깊은 바닷속에도 돌로 쌓은 피라미드가 잠겨있다.. 2001년에 해저탐사 전문가들이 찍은 인공구조물을 과학자들이 분석하니 거대한 화강암 피라미드였다. 이 피라미드도 아스텍의 전형적인 도시처럼 거대한 둥근 원형 구조물과 네모난 피라미드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구과학자들에 따르면 아주 오래전 멕시코 유카탄반도와 쿠바는 하나로 연결된 땅이었다. 유카탄반도 끄트머리에는 아스텍과 마야 문명의 중심지가 있다. 이곳에는 치첸이트사를 비롯한 거대한 피라미드가 많다.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생활 도구들을 전시했다. 나무로 만든 절구통과 공이, 베틀, 그물, 광주리, 소쿠리, 삼태기, 물레 같은 물건들이 전시되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지붕chipung, 가시네kasine, 바구리pakuri, 아버지ap’achi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에드먼턴에는 씩시카Siksiká, 가이나Káínaa, 아파도씨피카니Aapátohsipikáni 같은 인디언 부족이 살고 있다. 이들은 동북아시아인처럼 상투했다. 이들도 윷을 논다. 그들의 윷말과 윷판은 우리 것과 원리가 같다. 윷말을 존 알Zohn Ahl이라 한다. 아스텍인들은 광장 어디서든 팥톨patole 놀이를 즐겼다. 여섯 개의 팥톨 윷을 던지는 윷놀이다. 마지막 황제 목테수마도 밭에서 귀족들이 하는 팥톨이patolli 놀이를 지켜보곤 했다고 스페인 정복자들은 기록했다. 팥톨이는 지금의 멕시코 사람들도 즐기는 전통 놀이다. 멕시코 윷판도 피레네산맥의 나바라 왕국 국장에 그려진 윷판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