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하바네로
하바네로
1526년 2척의 배가 아바나 항에 들어왔다. 그리고 115명의 흑인이 쇠사슬에 묶여 부두에 하역되었다. 아프리카에서 아바나로 오는 첫 직항 노선은 1572년에 열렸다. 그로부터 100년쯤 지나면 아바나 인구의 절반이 흑인이 되었다. 흑인이 대거 수입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다. 하나는 다이노가 절멸되었다는 뜻이다. 또 하나는 흑인 노예로 경제를 지탱하는 사회가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도시 외곽에서는 백인들을 위한 농작물과 돼지, 닭 같은 식량을 생산했다. 17세기 중반이 되어서는 아바나 인근에 설탕 플랜테이션이 20여 개로 늘어났다. 모두 스페인 왕실이 자금을 융자하여 만든 플랜테이션이다. 다이노는 없으니 전적으로 흑인 노동으로 운영되었다. 아바나 세 개의 요새는 멕시코와 페루에서 원주민 다이노가 캔 금과 은으로 만들었다. 노동은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몫이었다. 흑인들이 산을 파헤쳐서 바위를 잘라 돌로 만들고 네모반듯하게 자르고 다듬었다. 아프리카의 신 은살라반다는 철의 신이다. 흑인들은 철을 녹여 칼을 만들었다. 마체테를 만들던 흑인들이 아바나에서 대포알을 만들고 성곽을 둘러싼 쇠사슬을 만들었다. 여자 노예들은 다른 일을 했다. 스페인 선원과 군인들을 위해 요리하고, 빨래하고, 방을 청소했다. 방을 임대하는 날 몸도 임대했다.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몇몇 노예는 옷도 사 입고, 닭도 사 먹고, 자유도 샀다. 자유 신분이 된 자들은 가족을 이룰 수도 있었다. 스페인의 이런 노예제 개념은 13세기 현명왕 알폰소 10세 때 정립되었다. 노예를 대하는 스페인의 법률이 아바나에서도 적용되었고, 아메리카 전역에서 적용되었다. 현명왕의 노예 법을 영국이 고스란히 전수해 미국 흑인 노예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아바나가 급성장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흑인 노예도 많아졌다. 여관과 매춘 같은 상업이 활발해지니 자유 흑인들도 많아졌다. 그들을 하바네로habaneros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610년에 흑인 중 8%가 자유 흑인, 하바네로가 되었다. 쿠바에서 첫 인구조사를 한 1774년에 흑인들이 전체 인구의 50% 가까이 되었다. 그중 10%가 하바네로였다. 하바네로들은 주로 아바나에 거주했으므로 아바나는 하바네로와 스페인인들이 거의 반반씩 거리마다 넘실댔다. 이제 하바네로들이 쿠바 역사의 주연으로 부상할 준비를 해가고 있었다. 현명왕 10세의 노예 법은 노예주들이 노예에게 잔혹한 형벌을 하지는 못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대서양 너머에서 그런 법은 통하지 않았다. 노예들이 도망쳤다. 쿠바섬 동부에는 산티아고와 바라코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시에라 마에스트라산맥이 있다. 오리엔테 지역 다이노들은 그 산맥으로 숨어 씨마루아보가 되었다. 반면에 아바나 주위에는 큰 산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룬 공동체에 숨어들지 못했다. 대신 아바나 도시 안에서 숨었다. 그리고 하바네로들에 섞여 들었다. 피부가 검은 이들끼리 있을 때 스페인 노예주들은 자기 소유의 노예를 구분하지 못했다. 자유 신분은 아니었지만, 자유 흑인과 비슷하게 살 수 있었다. 하바네로들은 돈이 있는 흑인들이었다. 도망자 흑인들은 돈이 없었다. 그들이 부두로 갔다. 아메리카의 황금열쇠가 된 아바나의 부두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하바네로가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인 17세기 초에 쿠바 인구는 2만 명쯤 되었다. 그중 절반이 아바나에 살았다. 그 말은 쿠바섬의 다른 지역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다는 뜻이다. 수도인 산티아고 데 쿠바도 정복자들이 모두 멕시코로 떠난 뒤 텅 비었다. 그들이 멕시코와 니카라과, 콜롬비아, 페루, 볼리비아를 차례로 정복해가고 있을 때였다. 그들이 캐낸 금은보화가 아바나만으로 들어와 스페인의 물류 거점이 되었다. 1607년에 아바나가 쿠바의 수도가 되었다. 아바나는 서부의 거점도시로, 산티아고 데 쿠바는 동부의 거점도시로 나뉘어 관리되었다. 산티아고는 비록 텅 빈 도시였지만 그때까지 쿠바의 수도였고 식민지 총독부와 가장 큰 교회가 있었다. 1649년에 쿠바에 전염병이 돌았다. 아프리카의 풍토병이 노예선을 타고 아메리카로 들어왔다. 아바나 인구 1/3이 죽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많은 원주민도 이때 대거 죽었다. 아바나를 지키는 인구가 줄어들었으므로 아바나의 금고는 열려 있는 상태나 진배없었다. 해적이 공격했다. 이때는 카리브해 해적들의 세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다. 1663년에 아바나가 해적으로부터 도시를 방비하기 위해 도시를 둘러 성벽을 쌓았다. 이 성벽 안이 지금 아바나 비에하La Havana Vieja라 부르는 올드 아바나다. 이 성벽을 쌓는 데 8년 걸렸다. 18세기가 시작될 때 쿠바 인구가 5만 명쯤 되었다. 흑인 노예와 함께 백인 노예도 수입되어 인구가 급증했다. 그중 절반이 아바나에 살았다. 쿠바의 식민지가 아바나 안에서 점차 외곽으로 확산하고 있었다. 설탕 플랜테이션 때문이다. 설탕 농사와 설탕 제조를 위해 카나리아섬에서 백인 기술자들을 데려왔다. 스페인 왕실은 그동안 카스티야 사람 외에는 카리브와 아메리카에 발을 못 딛게 했다. 그러나 무적함대가 침몰한 뒤로 재정이 악화한 스페인 왕실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쿠바 설탕 플랜테이션 업자에게 자금을 융자해 주었다. 설탕 플랜테이션이 빠르게 확장되었다. 그 과정에서 10년 시한만 거주할 수 있다는 조건을 붙여 카나리아 백인을 이주할 수 있게 했다. 카나리아도 카스티야의 식민지였다. 그러니 백인일지라도 카스티야인이 아니어서 노예였다. 그래서 그들을 ‘섬놈들isleños’이라고 불렀다. 카스티야인들은 남자들만 왔다. 반면에 카나리아 사람들은 가족 단위로 이주했다. 이제야 쿠바에 처음으로 가정이 살았다. 카나리아 사람들도 카스티야 이달고와 하급 인생들의 성공 사례를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카나리아도 신세계로 가는 밀항자들이 많았다. 백인 노예들이 들어온 이때 흑인과 백인이 섞인 혼성밴드가 등장했다. 두 명의 백인 노예는 정복군인 복장을 하고 류트와 리코더를 불었다. 두 명의 흑인 노예는 드럼을 두드렸다. 고향을 떠나온 자들의 외로움이나 자연의 아름다움 같은 것들을 노래했다. 흑과 백의 노예들끼리 스페인과 아프리카의 음악을 아바나에서 섞기 시작했다. 서로 상대 인종의 음감과 박자, 리듬, 소리를 알아갔다. 흑인이 퍼커션만 다룬 것은 아니다. 스페인 노래도 하고 유럽의 악기를 다루었다. 이런 밴드가 아예 스페인에서 만들어져 오기도 했다. 밴드에서 노래하는 흑인들은 자유 흑인, 하바네로였다. 이들이 아바나 비에하의 술집에서 노래하고 돈을 받았다. 타향살이에 고단한 자들이 이들의 노래를 좋아했고 또 새로운 노래를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