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오를레앙

#218 아이티 혁명

by 조이진

아이티혁명

프랑스는 생 도맹그에서 설탕과 커피를 재배하여 프랑스 전쟁 예산의 70%를 생 도맹그에서 확보했을 정도로 큰 수익을 내고 있었다. 전쟁을 좋아한 나폴레옹에게는 꼭 필요한 자금원이었다. 설탕도 커피도 노동집약적이니 많은 노예를 수입했고, 생 도맹그는 철저하게 노예에 의존한 사회였다. 1789년 조사에 따르면 백인이 40,000명, 자유 유색인이 40,000명, 노예가 500,000명이었다. 백인 한 명당 노예가 12명꼴이었다. 백인 수와 비교할 때 지나치게 노예의 비율이 높았다. 호남과 충청남도를 합친 면적 정도의 생 도맹그에서 플랜테이션은 자그마치 8,512개나 되었다. 플랜테이션 농장을 하려면 숲을 불태워야 한다. 사탕수수 즙을 끓여 설탕을 분말로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땔감을 넣어야 한다. 그 땔감을 모두 플랜테이션 주변 산에서 베고 끌고 왔다. 플랜테이션 1곳이 있으면 그 일대 산은 모두 벌거숭이가 되어 자연재해에 매우 취약해진다. 같은 시기 히스파니올라섬 동쪽의 스페인 식민지 산토도밍고에는 비슷한 숫자의 백인이 있었지만, 노예는 15,000명이었다. 백인 1명 당 노예가 0.5명이 되지 않았다. 프랑스혁명 직전 생 도맹그에서는 5년 전에 비해 설탕과 커피 산출량이 2배가 되었다. 가렴주구가 극에 달했다. 아이티는 파피용의 수용소 같았다. 생 도맹그는 그때 지구상에서 백인 한 명당 소득이 가장 높은 곳이었다.


생 도맹그에 돈이 가득하였다. 카디스처럼, 아바나처럼 있어야 할 것은 다 있었다. 댄스홀도 많았고 카페, 카바레, 도박장도 많았고 쪽문을 열고 옆방으로 나가면 사창굴이었다. 카리브의 구름처럼 흰 회를 칠한 멋진 대형 주택도 많았다. 문학을 토론하는 사교 클럽도 있었고 큰 가면을 쓰고 무도회를 하는 전용 무도회장도 있었다. 파리에서 공연된 오페라는 생 도맹그에서도 곧바로 무대에 올려졌다. 연기자들도 파리에서 오리지널 연기자들로 캐스팅해 데려왔다. 비제의 스승인 몽시니Monsigny나 루소도 자신들이 파리에서 세팅한 무대를 실어와 공연했다. 이 시기 생 도맹그의 수도 카프 프랑수아는 문화 수준이나 영향력에서 파리와 견줄 정도였다. 콘서트도 자주 열렸다. 대개는 군악대들이 연주했고, 대형 사교댄스홀에서는 늘 군악대가 공연했다. 댄스홀에서 악단이 연주하는 공연 개념이 아이티에서 처음 나왔다. 이것이 뒷날 클럽의 공연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문화가 생 도맹그의 플랜테이션 타운에서 처음 비롯되었다. 생 도맹그에서도 기타는 중요한 악기였다. 이 무렵의 마르세유에서 기타가 오늘날과 같은 6줄로 개량되었다. 생 도맹그에서도 6줄 기타가 연주되었다.

노예 경제가 꽃을 피울 때 계몽사상도 함께 꽃을 피웠다. 프랑스 사람들의 ‘악의 꽃’은 그 결실이었다. 프랑스는 노예 수입에 적극적이었다. 생 도맹그의 50만 명이 넘는 노예 가운데 셋의 둘은 방금 도착한 노예들이었다. 노예 수급이 무척 쉬웠고, 획득 비용도 매우 낮았다. 프랑스인들에게 흑인은 일회용 상품 같은 것이었다. 노예를 예술의 재료로도 소비했다. 노예에게 가하는 고문은 계몽주의 예술 장르의 하나였다. 살인도 미학적 관점으로 접근했다. 잔인하고 악랄할수록 아방가르드라며 칭송했다. 생 도맹그에서 태동한 가학성의 예술과 고통의 쾌락이 프랑스로 수입되었다. 가학 스타일은 프랑스 계몽주의의 일부가 되었다. 프랑스 계몽주의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상가는 볼테르, 몽테스키외가 아니다. 그들보다 더 널리 알려진 사람이 있다.

가학성애 사디즘을 창시한 사드 후작. 그는 루이 1세 시대에 대해 “프랑스 제국 역사에서 이때만큼 이 엄청난 부유함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시기는 없다”라고 했다.

가학성애 사디즘의 원조 마르끼스 드 사드 후작이다. 그의 첫 작품 <소돔에서 120일>은 로마 가톨릭교회 주교와 귀족들이 젊은 남녀 수십 명을 성에 가둔 채 온갖 가학적인 성애를 즐긴다는 내용이다. 그는 이 쾌락을 ‘약자에게 힘을 남용할 때 맛볼 수 있는 전제와 지배라는 기쁨’이라 묘사했다. 사드는 루이 14세 시기 프랑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 제국 역사에서 이때만큼 이 엄청난 부유함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시기는 없다.” 모호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부유함은 생 도맹그에서 노예의 피와 뼈를 뽑아 들여온 덕이었다. 베르사유궁도 그때 그렇게 지어졌다. 사드가 1791년에 소설 <쥐스틴Justine>을 발표했다. 사드는 이 소설에서 포르노그래피 변태 성욕 행동을 마음껏 묘사했다. 그 해는 아이티혁명이 일어난 해다.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신 역사학자는 그 시절 생 도맹그에서 자행된 프랑스 기독교인들의 노예 처벌의 일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매질은 몇 시간 만에 잠시 그쳤다. 이제 노예의 항문에 끓는 물 한 바가지를 끼얹을 참이다. 매질로 피가 흐르는 상처에 여러 가지 것을 부었다. 뜨거운 숯을 올려놓기도 하고, 소금과 고춧가루를 뿌리기도 했다. 시디신 유자즙을 발라주어 비명을 지르게 했다. 송곳처럼 뾰족한 알로에로 꾹꾹 찌르기도 했다. 중세부터 있던 테크닉이었던 손목 자르기 같은 기술은 별로 흥미를 주지는 못했다. 그래도 자른 손목의 개수를 세고 서로 칭찬했다. 이왕이면 넷이서 동시에 사지를 도끼로 내리쳤다. 그런 방법은 새로웠다. 귀를 자르기도 했다. 노예 놈들이 돈 한 푼 치르지 않고 자위로 쾌감을 느끼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성기는 잘라버려야 했다. 노예 주인은 불붙은 기름을 노예의 어깨와 손에 끼얹었다. 펄펄 끓는 사탕수수 물엿을 머리에 솥 채 천천히 들이부었고, 그대로 산채로 불태웠다. 돼지구이 하듯 걸어 두고 숯으로 천천히 오래 구워 죽였다. 노예의 내장을 파내고 대포알에서 뺀 화약을 채운 후 성냥을 붙여 폭파했다. 이것은 아주 창의적인 방법이라 평가받은 방법이었다. 목까지 땅에 묻고 노출된 얼굴과 머리에 설탕 진액을 잔뜩 발라 두었다. 파리, 모기가 모두 빨아먹게 했다. 설탕을 몸에 발라 말벌 통 옆에 묶어 두었다. 주인이 대변을 누는 동안 그것을 밑에서 모두 받아먹고 삼키게 했다. 노예들끼리 마주 세워 놓고 다른 노예의 침을 핥게 했다.” 프랑스인들은 매일 식사 중에 이런 사디스트 행위들을 즐겼다.


프랑스혁명에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가 선언되었다. 여기에는 노예 해방을 요구하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생 도맹그에서는 관심 없었다. 자유liberté니 평등egalité이니 하는 단어들은 백인들끼리 대화에는 늘 거론되는 단어들이었다. 그 말은 프랑스 왕과 자신들이 평등해야 하고, 왕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였다. 노예들도 주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1770년에도 큰 규모의 지진이 있었다. 대혼란 속에서 플랜테이션 노예들이 탈출해 산속으로 숨었다. 농사지을 자가 없으니 기근이 들었다. 30,000명이 넘는 노예들이 굶어 죽고 역병으로 죽었다. 배고픔은 또 다른 병을 초래했다. 먹을 것이 부족한 틈을 타 스페인 사람들이 큰돈을 벌고 싶었다. 따스오tasajo는 다이노의 전통 요리다. 다이노들은 바짝 말린 자르기ch’arki를 물에 넣고 불려 따습게 끓여 먹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따스오 요리법을 배워 카리브에서 노예들에게 주식으로 먹였다. 따스오는 지금도 멕시코와 쿠바 등에서 많이 먹는 토속 음식이고, 스페인 사람들도 즐겨 먹는다. 따스오 요리는 높은 온도로 끓여 완전히 살균 처리해야 했다. 상한 동물 단백질에는 내장을 썩게 하는 치명적인 탄저병 세균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를 알 리 없는 스페인 상인들이 먹을 것이 부족한 틈을 타서 끓이는 둥 마는 둥 하여 팔았다. 상한 따스오를 먹고 많은 아이티 노예가 죽었다. 이 일은 마른 장작개비처럼 바싹 말라붙은 노예들의 오장육부에 부싯돌을 켠 것과 같았다. 세계사를 바꾼 또 하나의 불길이 뜨겁게 일었다.

고기를 자르기 해 훈제 요리해 보존하는 아메리카 원주민들. 썩은 자르기가 아이티혁명을 촉발했다.


아이티혁명은 1791년 8월 14일 한밤에 일어났다. 부두교 제례 의식 중이었다. 마체테로 흑돼지의 멱을 땄다. 심장에서 머리로 가는 대동맥에서 뿜어져 솟는 뜨거운 피를 받아 나눠 마셨다. 신의 이름으로 백인들을 응징할 것을 다짐했다. 붉은 피를 나눠 마신 자들이 거사를 일으켰다. 두 달 동안 1,000명의 백인을 학살했다. 수백 개의 플랜테이션을 불태웠다. 플랜테이션의 흰색 저택과 무도회장도 불태웠다. 한 달 뒤 투생 브레다Toussaint Bréda가 폭동에 뛰어들었다. 투생은 본디 다호메이 왕의 손자이었다.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그의 아버지가 생 도맹그에 노예로 팔려 왔다. 글을 읽을 줄 알았으므로 노예주의 흰 저택에서 집사로 일했다. 그의 아들 투생도 글을 배웠다. 노예 혁명군의 초대 지도자가 된 뒤 브레다가 이름을 투생 루베르튀르L’Ouverture로 바꿨다. 긴 전투를 이끌었다. 그가 아이티의 독립을 선언했다. 프랑스는 안틸레스의 진주를 잃었다.

아이티의 독립을 선언하는 투생 루베르튀르. 그의 이름 L’Ouverture는 '시작'이라는 뜻이다.

이제는 생 도맹그에서 설탕과 커피를 공급받을 수 없게 되었다. 유럽은 아우성쳤다. 북미도, 라틴 아메리카도, 스페인도 그랬다. 모두가 쿠바 설탕을 원했다. 프랑스의 사람도 자본도 생 도맹그를 떠나야 했다. 빠져나온 사람들은 일부는 뉴올리언스로, 또 일부는 쿠바 여기저기로 몰려들었다. 쿠바는 아이티혁명 전까지는 두드러진 노예 수입국이 아니었다. 프랑스인들이 쿠바로 이주한 아이티혁명 이후로 쿠바 항마다 노예선이 자주 출입했다. 아이티혁명이 있은 1790년부터 대서양으로 수입된 노예 중 75~90%가 쿠바로 왔다. 스페인은 아이티에서 있었던 일이 쿠바에서도 일어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노예가 필요한 스페인은 이제 유럽에서 백인 노예를 실어 오기 시작했다. 유럽 해적들은 남유럽과 영국, 노르웨이 등에서 백인들을 노예로 잡아 지중해에서 사고파는 일이 흔했다. 백인 노예다. 흑백 노예에 힘입어 쿠바는 콜럼버스가 침략한 뒤로 이때부터 경제가 가파르게 성장했다. 1792년부터 시작된 설탕 붐으로 쿠바에 돈이 넘쳤다. 막일하는 저급 노동자 말고도 새로운 인력 수요가 생겨났다. 예술 분야다. 대개는 물라토나 자유 흑인들이 백인 예술가의 조수나 문하생이 되었다.


설탕 경제가 활발해질수록 콜럼버스가 천국이라 감탄했던 숲과 생태계가 사라졌다. 그럴수록 쿠바는 스페인에 돈도 벌어다 주는 식민지로 탈바꿈했다.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설탕 돈맛을 본 스페인 왕실은 이제 온 섬에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업을 하겠다고 나섰다. 쿠바의 크리오요들이 반발했다. 이미 미국의 자본이 충분히 들어와 있었고, 설탕을 판매할 시장도 유럽, 북미 등에서 무한하게 넓어졌으므로 스페인 왕실의 설탕 산업 개입이 달갑지 않았다. 갈등 끝에 1805년에 쿠바 크리오요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이 벌목권을 확보했다. 숲을 베 땔감을 확보해야 설탕 플랜테이션을 운영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세금을 받고 허락했던 스페인 국왕의 권리였다. 스페인이라는 해는 이제는 쿠바에서도 서산을 바랐다.

사탕수수 농장은 거의 1년 내내 농사가 계속된다. 심고 벤 자리에 다시 심는다. 덥고 습한 날씨라 가능하다. 쿠바의 흑인 노예들은 수확기에는 하루 20시간을 노동했다. 죽어야 마체테를 내려놓고 쉴 수 있었다. 미국의 흑인들은 노예 처지였을지라도 삶의 모습은 쿠바 노예들과 아주 달랐다. 미국의 노예 주인은 노예들이 ‘새끼 치는’ 것을 허락했고, 그 ‘새끼’들을 키워 노예로 부리는 방식을 선호했다. 미국에서는 사탕수수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에 그런 차이가 생겨났다. 가령 루이지애나의 목화 농장은 일 년 중 겨울 농한기가 있었다. 가정부가 필요했으므로 여자 흑인도 필요했고, ‘새끼’ 노예에게도 잔심부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쿠바에서는 그런 노예 따위는 필요 없었다. 오직 10대, 20대의 건장한 남자 노예만 필요할 뿐이었다. 쿠바에서는 짧고 굵게 노예를 사용한 다음 죽으면 새로 신선한 노예를 사 오는 게 더 가격이 싸게 먹혔다. 어린 노예를 키우느라 비용과 시간을 들일 이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노예들에게 가정을 갖게 할 이유도 없었고, 여자 노예도 필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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