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카리다드

#221 치노

by 조이진

치노

18세기 영국에서 존 웨슬리 성공회 신부가 영국 교회의 낡은 체제를 비판하며 감리교를 창시했다. 영국의 주도적인 교회가 된 감리교는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고,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자 미국의 성장을 억제하려는 의도로 영국은 1807년부터 노예무역을 중단했다. 그러나 실제로 영국 섬 바깥 식민지에서는 그로부터 약 30년 지난 1833년에서야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영국은 아메리카에 광대한 식민지를 두고 있는 스페인도 노예제를 폐지하라 압박했다. 영국이 아프리카 서쪽 연안을 포함한 대서양을 장악하고 노예무역을 독점했으므로 영국이 노예무역을 중단하고 금지하면 스페인으로서는 더는 식민지로 노예를 데려올 수 없었다. 영국은 북미 식민지에서 노예들에게 가족을 꾸리게 허용했다. 그러므로 결원이 생겨도 흑인 노예들이 낳은 자식을 키워 충원할 수 있었다. 따라서 노예무역을 중단해도 식민지 경제에 갑작스러운 타격을 받지 않았다. 반면 스페인은 노예들에게 가족을 꾸리게 허락하지 않았다. 설탕 플랜테이션의 강도 높은 노동을 여자 노예들은 견디지 못했다. 그러므로 여자 노예를 사 와서 먹이고 재우지 않았다. 죽어서 결원이 생기면 새로 노예를 사서 충원했다. 영국이 노예무역을 중단하기로 한 결정은 기독교인들의 뒤늦은 참회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카리브에서 설탕과 커피 공급에서 경쟁 관계에 있던 스페인에 심대한 타격을 주기 위한 영국의 노림수였다. 무적함대가 침몰한 뒤로 스페인은 패권국가 영국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러니 스페인은 이제 흑인 노예를 사 올 수는 없었다.

값싼 아시아계 노동자를 풍자하는 미국 만화. 주로 중국과 인도인들이 흑인노예들을 대체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곳이 인도, 중국, 조선, 일본, 필리핀 같은 아시아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노예들을 샀다. 아시아인들은 뜨겁고 습한 쿠바 기후와 가혹한 노동을 견디지 못했다. 치노, 쿨리라 불린 이들이 흑인들보다 더 빨리 죽었다. 쿠바에 온 치노들은 아시아에서 영국의 식민지 사업을 하는 동인도회사가 실어 왔다. 인도와 중국의 무역을 독점한 영국 동인도회사는 차와 면화의 수출입 무역 역조가 심화하였다. 영국의 은이 중국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영국 동인도회사는 노예무역을 계속했다. 감리교와 왕실의 입장을 고려해 아프리카 흑인 대신 중국 등 아시아인으로 노예를 바꿨다. 계약이라는 형식으로 노예라는 개념을 덮었다. 쿨리와 치노들은 계약서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계약서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서류에 서명했다. 노예 계약에 응한다는 고용계약서였다. 계약서는 영어나 스페인어로 작성되었다. 그들은 영어, 스페인어를 읽지 못했다. 치노 개인과 노예상 간의 상호주의에 따른 계약이므로 합법적인 거래라고 주장되었다. 상호 합의한 노무 제공 계약이므로 노예를 금지한 영국법에 저촉하지 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1800년대 말까지 20만 명가량의 치노들이 쿠바에 내렸다. 치노들은 도시든 시골이든 어디서든지 볼 수 있었다. 노예 판매상은 플랜테이션 농장주에게 이들은 아프리카 흑인들보다 훨씬 영리하다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자살하는 자도 많으니 잘 감독해야 한다는 사용법도 충실히 설명했다. 계약서 사례를 보면 수입업자가 치노 1명당 340달러를 받고 중간상에게 넘기고, 농장주는 중간상에게 매달 4달러씩을 임대료로 주며 고용계약 기간은 8년이라고 했다. 흑인 노예를 부려본 경험으로 노예들이 8년 이상은 생존할 수 없었으므로 계약기간이 8년이었다. 사용자가 치노에게 해줄 것은 먹을 음식과 1년에 옷 2벌을 제공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되돌아갈 방도가 없는 이들은 죄수처럼 취급받았고 카리브 기후에 적응하지도 못했다. 노예 주인들은 이들이 검은 노예들과 섞여 지낼 수 있을지 걱정했다. 이들은 얼굴과 체격도 흑인과 달랐다. 파란색과 노란색 천으로 된 헐렁한 옷을 입고 왔었고 그래서 어디를 가든 눈에 잘 띄니 도망칠 수도 없었다. 노예제를 폐지하라는 국제적인 압력으로 스페인 법은 노예에 대한 가혹행위를 절제시키고 있었다. 이에 따라 흑인들에 대한 가혹행위는 줄어들었다. 하지만 치노들은 노예 신분이 아닌, 상호 용역 계약으로 고용된 합법적인 노무자들이었다. 그러니 흑인 노예들에 비해 가혹하게 대해도 무방했다. 계약대로 8년 용역이 끝나면 이들을 내보내 주기만 하면 되었다. 다만 8년을 살아 견뎌야 했다.


치노는 1847년에 처음 아바나에 들어왔다. 그 무렵 청나라는 태평천국의 난에 이어 아편전쟁 중이었다. 유럽 제국주의가 중국을 마음껏 약탈했다. 나라는 망한 것이나 다름없이 혼란했다. 나라가 망하니 바닥 민중의 삶부터 허덕였다. 희망 없는 최하층민이 희망을 찾아 동인도회사의 배를 탔다. 아바나시는 쿨리를 수입한 20년 동안 아바나에 내린 치노만 142,000명이라고 기록했다. 군산, 목포항을 떠나 이 배를 탄 조선인들도 1,200여 명이 있었다. 마카오에서 출항하여 중남미 이곳저곳으로 실려 나간 치노가 1백만 명 이상이었다. 마카오에서 아바나까지 항해하는 동안 100명 중 28명은 배에서 죽었다. 또 쿠바에 내린 자 중에서도 곧장 죽은 사람이 11명이었다. 쿠바의 무덥고 습한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다. 그러니까 치노 100명 중 40명은 노역을 시작하기도 전에 죽은 셈이다. 스페인은 치노도 남자만 데려왔다. 여자는 애초부터 배에 태우지 않았다. 그러므로 순수 한인 혈통이 이어져 올 수는 없었다.

l_2021022201002267000202982.jpg 1921년 쿠바에 도착한 고려인들. 쿠바 한인 2세 마르타 림이 기록한 책 <Coreano en Cuba>는 "Adiós Corea. 잘 있거라. 내 조국 강토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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