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미뉴에트
미뉴에트
루이 14세가 베르사유궁에서 미뉴에트라는 춤을 처음 추었다. 이 춤은 스텝의 폭이 좁았다. 작은 발걸음으로 조금씩 움직이니 우아하다는 이 춤은 3/4박자의 약간 느린 템포의 편안한 리듬을 가진 미뉴에트 곡에 맞춰 추었다. 바스크들이 추었던 춤 조타는 빨랐지만, 아직 빠른 춤에 적응하지 못한 프랑스에서는 춤이 느려졌다. 이 느린 템포로 스텝을 좁게 움직이는 춤은 16세기부터 있었지만 춤을 좋아하는 프랑스 왕 루이 14세가 즐겨 추어 유명해졌다. 파리가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은 17~18세기에는 유럽 전체로 퍼져 크게 유행했다. 새로운 춤을 위해서는 새로운 음악이 필요했다. 미뉴에트 춤을 위해 바흐도, 보케리니도, 모차르트도, 베토벤도 미뉴에트 곡을 여럿 작곡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무곡은 무척 느린 리듬이지만, 놀랍게도 그렇게 느린 곡도 춤을 출 때 연주하기 위해 작곡된 곡이다. 생 도맹그에서 독립 혁명이 일어날 즈음 오스트리아에서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미뉴에트가 한창 인기를 얻고 있었다. 생 도맹그의 프랑스인 노예주들이 베르사유궁에서 미뉴에트를 추고 있던 때 생 도맹그의 흑인들은 보름달 아래서 부두교 제사 의식을 치르며 산 돼지의 목을 쳐 붉은 피를 하늘과 대지에 뿌리며 프랑스인들을 척살할 거사를 결의했다.
분노한 검은 노예들의 혁명은 성공했다. 프랑스인들과 부역자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보복 학살이 시작되었다. 많은 프랑세스francés들이 생 도맹그를 탈출했다. 백인은 물론이고 자유 유색인, 흑인들도 있었다. 선상난민은 카리브해 여기저기 흩어졌다. 자메이카, 푸에르토리코는 물론이고 뉴올리언스, 모빌 등 미국 남부 해안 도시까지 퍼졌다. 타운마다 흑인들이 가득 찼던 사우스캐롤라이나에도 들어갔다. 1793년에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당국은 난민으로 들어온 흑인과 물라토들에게 10일 안에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떠날 것을 명령했다. 미합중국이 발동한 첫 추방령이다. 백인은 추방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생 도맹그 흑인들이 백인들을 대상으로 한 불순한 반란 소식을 사우스캐롤라이나 흑인들에게 퍼트릴 것을 염려했다. 배를 대지 못한 생 도맹그 난민들이 보스턴까지 올라갔다. 가장 많은 숫자의 생 도맹그 난민이 도착한 곳은 쿠바였다. 많은 수가 산티아고 데 쿠바와 관타나모에 정착했다. 일부는 바라코아로 들기도 했다. 또 다른 자들은 아바나로 향했다.
쿠바에서는 프란세스francés라면 프랑스 사람이라는 뜻만이 아니다. 생 도맹그는 카리브에서 가장 파리 같은 스타일을 갖고 있던 곳이었다. 옷차림도 음악도 춤도 생각도 새로운 유행의 발상지였다. 쿠바로 유입된 생 도맹그의 파리 스타일은 스페인보다 음울하고, 퇴폐적이며, 덜 가톨릭적이었다. 쿠바가 프란세스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 무렵 쿠바를 방문했던 한 영국인은 볼테르와 루소가 순진한 쿠바 사람들을 망쳐놨다고 썼다.
오리엔테의 시에라 마에스트라산맥은 아바나가 있는 서부와 동부를 분리했다. 아바나로서는 가로지른 그 산맥이 방파제였다. 아이티를 덮쳤던 피에 절은 혁명 또는 반란의 파도를 막아주었다. 이즈음 산티아고 데 쿠바 인구는 1만 명 정도였다. 1766년의 지진으로 도시는 무너졌다. 산티아고만으로 떨어지는 노을의 광경은 아름답다. 만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티볼리Le Tívoli라는 프랑스 마을을 세웠다. 생 도맹그에서 했던 대로 프랑스적인 춤과 음악을 즐겼다. 그때 산티아고에 물라토와 흑인들로 이루어진 2개의 오케스트라가 있었다. 오케스트라가 1개 또는 2개의 클라리넷, 바이올린 2~3대, 트럼펫 2개에 콘트라베이스와 탐보라tambora라고 부르는 베이스 드럼으로 구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