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 프로듀서
프로듀서
뉴올리언스는 오페라도 좋아했다. 이 시대에 오페라를 공연할 수 있는 곳은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아바나와 뉴올리언스 뿐이었다. 타콘 총독 재임기에 미국에서 순회 공연한 아바나 오페라 컴퍼니의 첫 공연지는 뉴올리언스였고 8개의 이탈리아 오페라 레퍼토리가 공연되었다. 타콘이 총애한 ‘예술인’ 판초 마르티가 57명의 오케스트라와 30명의 합창단원의 초대형 규모로 뉴올리언스에 들어왔다. 이탈리아 오페라답게 몬스터급 공연이었다. 다음 해에는 9개월간 뉴욕과 워싱턴 등 미국 동부 도시에서 공연했다. 이들이 미국 동부를 처음으로 순회 공연한 이탈리아 오페라단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초연된 베르디의 오페라는 시차 없이 뉴욕에서 초연되었다. 이것도 판초 마르티가 제작했다. 미국 평단은 그를 이제까지 미국 공연계의 수준을 뛰어넘은 완벽한 역량의 프로듀서라고 극찬했다. 당시 아메리카에 이탈리아 오페라단은 아바나와 뉴욕에만 있었고 뉴올리언스에는 프랑스 오페라단이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제일은 아바나 오페라 컴퍼니였다. 프로듀싱의 핵심은 캐스팅이고 캐스팅의 열쇠는 돈이다. 판초 마르티는 이탈리아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음악감독, 작곡가인 루이지 아르디티Luigi Arditi도 지휘자로 캐스팅해 인터미션에 연주하게 했다. 이탈리아 가곡 <입맞춤 Il Bacio>은 아르디티가 아바나에서 인터미션 공연용으로 작곡해 초연한 칸초네다.
아르디티는 아바나에서 쿠바 볼레로를 직접 경험했다. 그리고 그의 볼레로 <가볍게, 보이지도 않게Leggero, invisibile>를 작곡했다. 쿠바의 분위기로 물씬한 볼레로가 유럽에 전파되었다. 더블베이스의 파가니니라 불리던 보테시니G. Bottesini도 아바나에서 인터미션에 연주했다. 보테시니는 만큼 대단한 연주자였다. 그는 여러모로 더블베이스 연주를 혁신했다. 그가 처음으로 더블베이스를 바이올린 연주하듯 오른손으로 활을 사용했다. 그가 활을 다루는 솜씨를 보고 사람들은 그를 현의 파괴자라고 했다. 가장 낮고 무거운 음역인 더블베이스도 바이올린처럼 활발하고 자유로워졌다. 보테시니가 더블베이스도 얼마든지 다재다능한 악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그때부터 아바나 좁은 골목길에서는 무게 20kg이 넘는 악기를 들고 다니는 뮤지션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더블베이스 연주자들은 보테시니의 연주 테크닉을 배운다. 아르디티와 보테시니가 아바나에서 만났다. 이런 거물급 연주자들이 아바나에서는 인터미션 중에도 공연했다. 아바나 오페라 컴퍼니는 인터미션 동안에도 관객들을 화장실에 보내 주지 않았다. 아바나에서 인터미션이 하나의 독립적 장르로 발전했다. 이 또한 아바나의 프로듀서 판초 마르티가 해낸 일이다. 판초가 캐스팅해서 아바나의 더블베이스 주자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던 보테시니는 아바나 오페라 컴퍼니의 뉴욕 투어가 크게 성공하면서 널리 유명해졌다. 아르디티와 보테시니가 지휘자이자 또 연주자로 활약한 이 오케스트라는 뉴욕 평단으로부터 단연 세계 최고의 앙상블이라 평을 받았다. 아르디티와 보테시니가 감독한 아바나 컴퍼니 오케스트라는 세계 최고의 악단으로 등극했다. 아바나 오페라 컴퍼니의 뉴욕 공연의 흥행은 아바나에 달렸다. 아바나에서 얼마나 박수받았는지, 아바나에서 흥행 성적을 다룬 보도가 뉴욕 공연의 티켓 파워를 결정했다.
파리나 이탈리아에서 공연단이 뉴욕까지 오려면 증기선으로 두 달이 넘게 걸렸다. 괴로운 뱃멀미를 견뎌야 하고 위험천만한 폭풍우를 만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아바나든 뉴욕이든 장기 계약해야 파리나 이탈리아의 오페라 연기자와 연주자들을 데려올 수 있었다. 아바나 오페라와 경쟁하고 싶었지만, 뉴욕은 이탈리아 오페라단을 캐스팅하기는 아직 역량이 못 미쳤다. 아바나의 공연 수준은 압도적이었다. 과감한 캐스팅으로 독보적인 수준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아바나 컴퍼니도 고민은 있었다. 쿠바의 우기는 무척 덥고 습하다. 냉방 시설도 없는 공연에 관객을 채우기는 어려운 일이다. 비싼 개런티를 지불하고 데려온 단원들을 우기라고 놀릴 수는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판초는 아바나에 우기가 되면 뉴욕에 단원들을 데려가 공연했다. 마구간과 말 장사들로 붐비는 브로드웨이는 아바나 오페라 컴퍼니가 오는 시즌을 기다렸고 공연에 환호했다. 아바나 오페라 컴퍼니는 갈라 공연을 자주 열었다. 이탈리아 오페라 제작자이자 거물 아티스트가 된 판초 마르티는 포크 대통령을 초대했다. 포크 대통령에게 아바나 오페라 컴퍼니의 공연은 수준 높고 화려한 쿠바 문화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쇼케이스였다. 뉴욕 언론은 이 위대한 성과를 지휘하는 판초 마르티를 주목했다. 그의 능력이 세계 음악계를 강타하고 있다고 했다. 세계에서 그를 능가할 프로듀서는 없다고도 했다. 쿠바의 설탕 경제, 뉴욕의 노예무역과 월스트리트 산업, 동부의 선박 제조업이 서로 톱니바퀴로 맞물리며 뉴욕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뉴욕의 성장으로 쿠바 음악도 동반해 발전했다. 정치와 예술이 교차하는 공간이 있었고 판초 마르티는 쿠바 병합의 국면에서 중요한 플레이어로 변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