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래그타임
래그타임
고트초크를 빼면 남북전쟁 전까지 미국 태생의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음악가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뉴욕은 이민자들이 모인 도시였고 그때도 북부 음악의 중심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삶이 힘겨운 이민자 수만 명이 군에 들어갔다. 이민자라도 입대하면 시민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부대가 많아지니 군악대도 많아졌다. 1865년 전쟁이 끝난 뒤 많은 수의 군악대 연주자가 제대했고, 쓸모가 없어진 군악기를 구하기가 쉬웠다. 미국 대중음악이 폭발적으로 발전할 토양이 만들어졌다. 다시 군악기를 손에 든 제대군인 연주자들로 구성된 미국 초기 밴드들이 가장 많이 연주한 악보가 고트초크의 곡이었다. 고트초크의 곡을 연주하면서 북부의 흑인 뮤지션들이 쿠바 음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싱코페이션의 빈 공간이 만들어주는 리듬을 터득했다. 몇 세대를 거치면서 백인의 억압으로 아프리카 리듬은 잊었지만 그들의 몸에는 아프리카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피를 따라 아프리카인의 음악적 유전자도 잠복해 흐르고 있었다. 오랜 세월 다이노들이 북가락으로 빚어낸 싱코페이션이 사람을 얼마나 신명 나게 하고 또 춤추게 만드는지 흑인들은 본능과 직관으로 금세 깨쳤다. 고트초크의 오른손 탱고 리듬 파트가 그것을 일깨웠다.
래그타임ragtime은 1880년대 미시시피강과 미주리강 주변 도시의 흑인과 크리올 슬럼가 술집에서 유행한 피아노 음악이다. 밀고 당기는 싱코페이션 멜로디로 곡의 시작부터 끝까지 2/4박자 8비트의 빠른 리듬을 기본으로 피아노에서 왼손은 2/4박자나 4/4박자로 클래식 음악의 행진곡이나 왈츠의 박자를, 오른손은 싱코페이션이 섞인 주선율을 빠르게 연주한다. 이렇게 왼손 리듬과 오른손의 당김음 리듬이 만나면 래그타임 특유의 통통 튀고 신나는 리듬감이 만들어진다. 이런 리듬에 맞춰 흑인과 크리올들이 온몸을 흔들어 뛰듯 춤을 추는 시간을 래그타임이라고 했다. 래그타임은 주로 클래식 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들이 곡을 만들었다. 싸구려 술집에서 피아노 연주자가 래그타임을 신나게 연주에 맞춰 가난한 술꾼들은 마룻바닥을 쿵쿵 밟아 박자를 맞추었다. 스톰핑stomping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스콧 조플린이 시카고와 뉴욕에서 <단풍잎 래그Maple Leaf Rag>(1899)을 발표함으로써 래그타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스콧 조플린의 악보가 100만 장 이상 팔리며 큰 인기를 끌며 래그가 크게 유행하고 나서 1920년대에는 재즈가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초기 재즈는 래그타임과 차이가 없었다. 굳이 차이를 두자면 래그타임은 클래식 음악처럼 악보대로 연주하였지만, 재즈는 악보를 지키지 않고 즉흥성을 강조한 연주 방식이라는 점뿐이었다. 쉽게 말해 래그타임에서 악보를 덮으니 재즈가 탄생한 것이다. 100만 이상 팔린 악보는 미시시피강물에 실려 멤피스를 거쳐 뉴올리언스까지도 떠내려왔다. 흑인 음악의 소울과 그루브로 충만한 뉴올리언스에서도 악보를 집어던진 래그타임 연주자들이 나타났다. 북부든 중부든 남부든 미국의 흑인 뮤지션들은 빠른 박자의 싱코페이션에 금세 매료되었고 싱코페이션의 고향인 쿠바의 흑인 뮤지션들과 곧장 하나로 연결되었다.
음악사학자들은 스콧 조플린의 래그타임에는 고트초크나 쿠바 뮤지션들이 즐겨 사용했던 코드 전개와 베이스라인, 멜로디를 끌고 가는 장치 같은 것들이 모두 재현되었다고 했다. 클래식 음악과 곧 재즈로 발전할 음악인 래그타임 사이에서 고트초크는 언어가 되었고 다리가 되었다. 그가 미국에서 연주한 지 50년 뒤 그의 음악은 재즈를 낳았고 재즈는 빠르게 진화했다. 재즈는 블루스를 비롯한 미국 대중음악 장르의 모태다. 그러니 재즈를 낳은 래그타임이야말로 미국 현대 음악의 가계도에서 가장 꼭대기에 당당하게 자리 매겨지는 음악이다. 고트초크의 영감 안에서 유럽 음악과 뉴올리언스의 흑인 음악, 그리고 쿠바와 중남미의 싱코페이션 리듬이라는 격류들이 합쳐지고 융화했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뉴올리언스에서 블루스가 시작되었다. 고트초크는 유럽에서 쇼팽, 리스트, 베를리오즈, 비제와 교류한 음악가였지만 그의 음악은 아메리카 대륙을 두루 돌며 받은 인상과 영감들을 반영했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유럽 음악을 바탕으로 미국 남부의 흑인과 광대들의 서커스와 쿠바와 카리브 섬들의 리듬과 악기, 멕시코와 브라질 등 중남미의 전통 음악들이 풍부하게 조화되었다. 그의 영감 안에서 세상의 모든 음표와 악기와 삶들이 하나로 해석되고 표현되었다. 그는 피아노 건반을 여러 피부색이나 민족들의 수만큼 다양한 이국의 색으로 채웠다. 그의 음악은 유럽과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음악을 융화한 혼혈 음악이었고 그 혼혈성Creolity이 오늘날 미국 음악의 바탕이 되었고 그래서 재즈는 진정한 미국적인 음악이다. 세상의 모든 음악을 한 몸 안에서 융합하고 꿰어낸 열쇠는 다이노의 싱코페이션이었다. 1869년 고트초크는 리우데자네이루로 떠났다. 그곳에서 음악감독으로 활약 중이던 호세 화이트가 그를 마중했다. 황열병으로 쇠약해진 고트초크가 인터미션을 지휘하다 무대에서 쓰러졌다. 세상에 없던 음악으로 세계 음악계에서 하나의 현상이었던 그의 마지막 콘서트가 끝났다. 40세였다. 음악사는 그를 아메리칸 크리올 뮤직의 전통을 처음으로 세운 음악가이자 아프리칸-아메리칸 음악과 유럽 음악의 전통을 융합시킨 음악가로 평가한다. 유럽 클래식 음악계가 아메리카의 크리오요와 아프리카인들의 음악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을 두게 된 것도 고트초크 때문이었다. 오늘날 공연에서 그의 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를 찾기도 어렵고 파리음악원의 입학 경연곡 목록에서 그의 곡은 지워졌다. 지금은 미국에서마저도 그의 음악은 호텔 라운지 배경음이나 아침의 명상 센터에나 어울릴 편안한 피아노곡을 작곡한 피아니스트쯤으로 격하되었지만, 그는 미국 음악이 가게 될 길을 보여 주는 창문이었다. 그의 창문 너머로는 아메리카에 강제로 끌려와 노예로 살아온 사람들과 그들을 아메리카로 끌어온 인간들의 삶과 생명을 융합하고 조화한 음악의 본질이 풍경으로 담겨있었다. 400년 넘도록 피부색을 구분해 왔던 신을 대신해 음악은 고트초크를 통해 아메리카에서 톨레랑스를 이루었다. 사람과 사람, 생명과 생명을 음표로 조화한 그의 영감이야말로 쇼팽도 리스트도 베를리오즈도 이루지 못한, 오직 그가 이루어낸 가장 위대한 예술적 업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