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 밴조
밴조
1739년에 영국 식민지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일어난 흑인 폭동은 남부에서 가장 크고 사상자가 많은 노예폭동이었다. 백인들의 신문을 읽을 줄 알았던 재미Jemmy라는 이름의 노예가 더욱 강화될 노예법이 곧 입법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흰 깃발을 들고 드럼을 두드려 반란을 주도했다. 재미는 카리브에서 ‘표백되고 양념에 절인’ 뒤에 남부로 다시 팔려 온 흑인이었다. 재미가 이끄는 무리는 무기상점에서 탈취한 총으로 영국인 플랜테이션 주인들을 쏘았다. 당시 기사는 폭동 사건을 이렇게 기록했다. “마리아 탄신 축제일인 일요일 아침 22명의 콩고 출신 니그로 놈들이 군집했다……. 놈들이 두 대의 드럼을 두드렸다. 드럼 소리를 듣고 여남은 놈들이 가세했다. 그들은 자유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함성을 지르며 큰길을 행진했다. 가게를 습격해 총포로 무장했다. 그놈들은 울긋불긋한 차림새에 북을 두드려대며 길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을 뒤쫓았다.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주변에 있던 검둥이들이 가세해 80놈 넘게 불어났고, 백인 군대와 전투 때는 100마리도 넘었다. 플랜테이션 여섯 군데에 불 놓았고, 서른 명 가까운 사람을 살해했다. 그놈들은 습지에 멈춰서 술을 퍼마시고 춤추고 노래를 불러댔다. 드럼을 시끄럽게 두드려대면서 드럼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드럼 두드리는 소리는 더 많은 니그로 놈들을 불러들였다…….” 이 집회를 콩고 출신들이 주도했다. 스페인은 그때 플로리다에서 흑인일지라도 가톨릭을 믿는 자들에게는 자유를 주고 있었다. 이미 250명이 넘는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예들이 플로리다로 도망친 적도 있었다. 그 일로 영국과 스페인은 전면전을 벌일 준비를 할 만큼 위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반란자들은 스페인이 통치하는 플로리다로 향했지만 영국 정규군과 노예 소유주의 흑인 군대를 만나 패배했다. 전투 최후의 순간에 재미가 ‘우리는 지금 항복하지만, 결코 신교로 개종하지는 않겠다’라고 크게 외쳤다. 노예들이 다 함께 아멘을 외었다. 백인들도 아멘을 외고 50여 흑인을 처형해 목을 자른 머리를 큰 길가에 내걸었다. 죽이지 않은 흑인은 카리브의 섬으로 다시 팔았다. 이 폭동은 백인들을 두렵게 해 노예법은 더 엄격해졌고 노예를 처벌할 더 많은 권한이 주어졌다. 노예들이 한 곳에 모이는 것을 금지했고, 흑인들은 글을 배우지 못하게 했다. 재미처럼 신문을 읽어 폭동을 일으키는 자가 다시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흑인들의 드럼은 악기가 아닌 무기로 분류했고 드럼을 두드리는 것도 금지했다. 흑인들의 숙소 헛간을 검열해 드럼은 물론이고 입으로 부는 혼을 비롯한 크게 소리 내는 것이라면 모두 끄집어내 불태웠다. 나무 막대기일지언정 두드리는 무기로 간주했고 나무를 깎을 칼도 빼앗았다. 두드리는 소리는 춤추는 소리가 아니고 저항의 소리, 폭동을 신호하는 불순한 소리로 들렸다.
루이지애나가 프랑스 식민지였을 때는 세네감비아 출신들이 들어와 흑인 문화의 뿌리를 내렸고 미국 땅이 된 뒤로는 콩고 초원 지대의 반투Bantu족이 주로 노예로 들어왔다. 반투족은 농경 부족이었다. 농사짓는 부족들은 땅에 둥지를 틀고 붙어살면서 씨를 뿌리고 밟아주고 곡식 얻을 날을 기다리니 떠돌아다니지 않았다. 그들은 똑같은 장소에서 붙잡혔고 잠시 도망을 쳤더라도 다시 그곳에 돌아오니 또 잡혀갔다. 노예 사냥꾼들에게 반투족을 붙잡는 일은 뒤뚱거리는 오리를 잡는 일처럼 쉬웠다. 반투족 노예들은 미국 남부에서 개신교와도 조화하고 노예로 사는 법에도 적응했다. 그들의 기독교에도 아프리카 토속신앙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농사 기술이 좋았던 반투족에게는 노동요와 노동 춤도 농사짓는 기술 중 하나였다. 플랜테이션에서 반투족은 고유의 노동 춤 주바Juba를 추었다. 주바는 흑인들이 노동할 때 손뼉을 치고 발바닥으로 땅을 두드리거나 두 손으로 두 팔이나 가슴, 뺨 등을 때려 비트를 만들어 노래하는 집단 춤이었다. 몸을 정보를 소리로 전환한 토킹 드럼talking drum으로 사용했다. 카리브해에서 시작된 이 춤은 기독교 양념이 밴 카리브 노예들이 미국 남부의 목화와 쌀, 담배 플랜테이션으로 재판매되면서 루이지애나에서도 추었고 남부를 상징하는 전통춤이 되었다. 춤은 손뼉을 마주쳐 내는 박자에 맞춰 개가 느릿하게 걷거나 펭귄이 걷듯 짧게 걸으며 옆으로 좁게 스텝을 밟는다. 이 춤을 출 때 구하기 쉬운 나무 널빤지를 두드리거나 만들기 쉬운 다이노 악기 기러를 마찰해 리듬 공간을 만들었다. 반투족과 만딩가족은 카리브해 플랜테이션에서 밴조banjo라는 5현 악기를 써왔다. 밴조는 사하라 남쪽 서아프리카 모슬렘 지역의 음반자m'banza라는 악기를 생 도맹그에서 반투족과 만딩가족 흑인들이 개량한 악기다. 이들이 아이티 혁명을 피해 뉴올리언스와 루이지애나로 왔을 때 밴조를 들고 왔다. 백인들은 주바 춤을 따라 출 때 밴조를 피들과 탬버린 같은 친숙한 악기와 함께 연주했다. 밴조는 남부의 목화밭에서 북부에도 알려졌고, 백인들이 흑인으로 분장해 광대극을 펼치는 민스트럴 쇼를 상징하는 악기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밴조는 서부의 카우보이는 물론이고, 백인 도시 문화 속으로도 퍼졌고, 가정 속으로도, 천막 아래 유랑 곡마단의 악기로도 자리 잡았다. 반면 백인들의 드럼에 대한 탄압은 길고 끈질겼다. 노예들의 숫자가 백인과 비교해 많아질수록 드럼은 더욱 탄압당했다. 열대우림의 사운드를 상징하는 드럼은 미국 남부에서 사하라 모슬렘 악기에 밀려났고 점차 손으로 두드리는 북류는 미국에서 그렇게 잊혔다. 흑인들은 드럼 대신 밴조banjo와 피들을 즐겨 연주했다. 수단 출신 아프리칸-아메리칸들이 특히 그렇다. 이런 특징의 미국 남부 흑인 음악을 수단-아메리칸 스타일이라고 한다. 루이지애나와 텍사스, 조지아 지역의 음악이 수단-아메리칸 스타일 음악이었다. 이곳은 재즈와 블루스의 고향이다.
아프리카와 카리브에서는 박을 말린 다음 동물 가죽을 얇게 다듬어 씌워 밴조의 소리통을 만들었다. 현은 동물 창자를 말려 만들었다. 프렛fret도 없었다. 프렛이 없는 밴조는 바이올린처럼 연주해야 했다. 밴조가 미국에 들어갈 때는 ‘명백한 운명’을 부여받은 미국인들이 한참 서부로 진격하고 있을 때였다. 악기가 없던 서부 시대 말 탄 백인들이 흑인들의 밴조를 개조했다. 깨지기 쉬운 말린 박 대신 튼튼한 금속으로 소리통 틀을 바꾸고 기타처럼 프렛을 붙였다. 바이올린은 현의 위치를 정확하게 짚어야 정확한 음을 낼 수 있어서 어려운 악기다. 밴조에 프렛이 붙으니 이제 어림잡아 현을 눌러도 소리를 인토네이션으로 표현하는 쉬운 악기로 바뀌었다. 서부의 총잡이들이 기타처럼 쉽고 다양한 테크닉으로 밴조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밴조는 존 웨인 시대를 상징하는 악기였다. 그래서 서부영화의 주제곡에는 밴조가 많이 연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