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 그리오
그리오
아프리카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복선율의 음악을 해왔다. 흑인들이 중세 교회의 성가대처럼 노래 부르는 모습은 상상하기도 힘들지만, 악기를 빼앗긴 이들은 단선율의 가창법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드럼이 없어진 흑인들은 노래할 때 손뼉을 쳐서 드럼 비트를 대신했고 곡괭이로 땅을 두드렸다. 끝없이 펼쳐진 남부의 목화 농장에서 흑인들은 목화를 따면서 느릿한 노래를 함께 불렀다. 누군가 선창 하면 일행들이 이어받았다. 목화 꽃송이처럼 하얗게 들판을 덮은 노랫소리가 반투족의 목소리다.
반투족이 잡혀 오면 이들 중에는 그리오라는 자들이 꼭 섞여 있었다. 반투족 사회에는 집단마다 마을마다 그리오가 있었다. 그리오는 부족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신분으로 지도자 역할을 했다. 그리오의 혈통은 신성한 것이었고, 신분은 상속되었다. 그리오는 서아프리카에서 그들의 부족에게 전해 내려오는 신화, 조상들의 계보, 역사와 영웅에 관한 이야기, 부족 대대로 전해오는 시와 음악을 부족원들에게 노래해 주는 가수이자 역사가들이었다. 중세 이베리아의 트로바토르와 같은 존재였다. 아프리카 음악은 대개 드럼을 중심으로 그룹이 연주하고 춤을 추었지만 그리오는 코라와 같은 현이 있는 악기를 혼자 연주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앉아서 주의 깊게 들을 수 있게 굵은 목소리로 천천히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다. 노래보다는 읊조림에 가까웠다. 그들의 내러티브는 때로는 시이기도, 때로는 노래이기도 했다. 부족은 그리오를 통해서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 전통적 가치와 문화를 이어갔다. 반투족의 목화밭에도 그리오는 있었고, 그가 흑인들의 리더이자 선창자였다. 그리오는 노래로 참혹한 반투족의 삶을 위로했다. 남부 흑인들이 드럼이 없이 성가대의 찬송가 같은 단선율의 음악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오가 단선율 음악을 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잡혀 온 1세대 그리오가 죽고 세대가 몇 차례 바뀌었다. 본래 그리오는 가문에서 오래 기간 수련받아 탄생하지만 남부의 목화밭에서는 그리오의 노래를 배워 흉내 낸 젊은 그리오들이 밴조를 연주하며 수단 모슬렘의 음악 전통을 이어갔다. 그리오 문화가 노래하는 자들을 배출해 냈고 그리오의 음악적 전통을 거의 온전하게 보존해 낸 남부의 목화밭에서 그리오 음악이 유럽 음악과 만났다. 그리고 블루스를 낳았다. 초창기 블루스 음악은 아프리카에서 살던 부족의 옛이야기나 초원에서 자유롭게 살던 삶을 주로 노래했다. 그리오 음악과 별 차이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그리오 음악의 틀에서 점차 이탈한 블루스 음악은 삶의 현실을 노래했다. 뙤약볕 같고 허기진 저녁 같은 노예의 일상을 거친 음색으로 읊조렸다. 가혹한 노동과 슬프고 암울한 현실의 비애와 한탄으로 흐느꼈다.
현악기 코라Kora는 21줄로 된 현악기다. 서아프리카에서 그리오 신분만 연주할 수 있었던 이 악기는 두 손 열 손가락으로 플러킹하여 연주한다. 그리오의 연주에는 재즈의 느낌feel이 담겨있다. 아프리카에서 그리오들은 이 그루브를 가슴에 담아 연주하고 노래했다. 목화밭의 노예가 된 그리오들이 21줄씩이나 되는 코라를 만들어 연주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리오들은 카리브에서 연주했던 밴조를 사용해서 그들의 그루브를 표현해냈다. 그리오의 그루브는 뒷날 남부에서 재즈라는 꽃으로 활짝 피었다. 그래서 음악사학자들은 코라의 감성이 재즈의 조상이라고 보기도 한다. 1800년대가 끝날 때까지도 흑인 음악은 악보로 기록되지 않았다. 녹음 기술이 발명되기도 전이니, 녹음 기록도 없다. 20세기 초반까지도 흑인 음악은 기록이라는 측면에서는 선사시대였다. 그 시절 음악에 스윙 필feel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기록이 없다고 해서 흑인 음악에 스윙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음악은 마음에 그리는 풍경화다. 마음에 그려둔 음악은 마음으로, 입으로, 귀로, 다시 마음으로 전해진다. 악보라는 상자에 담지 않고 마음이라는 자루에 필feel과 그루브를 담은 음악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