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 제국
제국
대서양 노예무역이 끝날 때는 모슬렘들도 역사상 가장 왕성하게 노예무역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하라 남쪽 서아프리카 흑인 500만 명 이상을 잡아다 사하라 북쪽 지중해 국가들에 팔았다. 노예무역을 먼저 끝낸 기독교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를 식민지 삼을 명분으로 모슬렘의 노예무역 종식을 치켜 들이더니 아프리카를 여러 조각으로 토막 내 나눠 가졌다. 그들은 그것을 제국주의라 불렀다. 식민주의는 침략한 영토에 자국민을 이주 정착시켰지만, 제국주의는 그보다는 경제적인 착취와 상업적 이익에 목표가 있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지중해성 기후로 연중 쾌적한 케이프타운을 빼고는 유럽 기독교인들이 아프리카에 살고자 이주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압정을 발명해 큰돈을 번 사업가이자 링컨 대통령의 벨기에 담당 외교 책임자이기도 했던 샌퍼드가 1876년에 다시 벨기에를 방문했다.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가 적도 아프리카를 문명화하여 노예로 고통받는 흑인들을 구원하겠다는 인도주의를 명분으로 콩고를 식민지로 삼으려는 유럽 회의에 미국을 대표해 참석했다. 샌포드는 레오폴드를 위한 미국인 로비스트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샌퍼드는 미국의 흑인들을 레오폴드 2세가 새로 건설할 “콩고 자유국Congo Free State”으로 대거 이주시켜 미국의 ‘검은 떼구름’을 제거할 수 있다며 콩고를 벨기에가 차지하도록 승인하자고 로비했다. 1884년 미국이 첫 번째로 나서서 아프리카에 기독교를 전파하겠다는 박애주의자 레오폴드의 콩고 계획을 승인했다. 영국과 프랑스도 충돌을 막을 완충지가 필요했으므로 미국 뒤를 따라 콩고를 레오폴드 사유지로 승인해 주었고 아프리카를 여러 토막으로 잘라내 하나씩 차지했다. 19세기에 독립한 소국인 벨기에가 콩고의 오랜 종주국 포르투갈을 제치고 차지한 콩고 땅을 미국이 주도해 개발했다.
콩고의 도살자 레오폴드가 콩고를 소유한 23년 동안 1천만 명 이상이 노예 노동으로 죽었다. 팔과 다리가 잘린 콩고 인들은 집계조차 되지 않았다. 레오폴드는 벨기에보다 75배나 넓은 개인 소유 식민지에서 고무 플랜테이션을 운영했다. 때마침 고무 타이어가 발명되었고, 자동차 산업도 성장해 고무 수요 폭증했다. 카리브와 아마존의 고무나무가 콩고 땅 절반을 덮었다. 손목이 잘려 뭉툭한 팔을 가진 소년들의 모습은 ‘콩고 도살자’의 극악무도한 착취와 수탈, 살육을 상징했다. 지옥이었다. 20년간 잔혹하게 원주민을 수탈한 수익으로 레오폴드는 벨기에 공공사업을 하고 브뤼셀에 궁전과 개선문 같은 아름다운 아르누보 건축물을 쌓아 올렸다. 영국 언론이 팔다리가 잘린 콩고인의 사진을 싣자 국제사회가 벨기에를 비난했다. 1904년 강대국인 영국과 미국이 간섭해 콩고를 왕의 개인 재산에서 벨기에 정부가 식민 통치하게 했다. 사지 절단은 멎었지만 독립할 때까지 75년간 콩고는 식민 통치에 질식했다. 잔인한 수탈로 콩고에서 카카오를 채취한 벨기에는 지금 세계적으로 유명한 초콜릿 업체들을 여럿 갖고 있다.
미국이 레오폴드의 콩고 사유지를 승인한 2년 뒤 쿠바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레오폴드의 가혹한 식민 정책을 우려하여 쿠바에 팔려 왔던 ‘검은 떼구름’은 해방되었어도 ‘콩고 자유국’이 된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쿠바에서 혁명전쟁에 뛰어들어야 자신들의 해방을 만들어내야 했다. 쿠바 노예 사회에서 카빌도는 오랜 세월 동안 아프리카 문화를 유지하는 중요한 조직이었다. 스페인은 반군 조직으로 변질할 것을 의심해 여러 카빌도들을 폐쇄하고 가톨릭교회에 등록하게 하고 카빌도 명칭도 아프리카식 명칭을 빼고 스페인의 가톨릭식으로 교체하도록 명령했다. 카빌도가 이때 대다수 폐쇄되었고 교회에 등록된 흑인 조직은 백인들의 향우회를 닮은 소셜클럽 성격으로 바뀌었다. 카빌도가 문을 닫았다 해서 그들의 종교의식이 가톨릭교회로 들어가지 않고 가정 속으로 파고들었다. 스페인의 의도와는 반대로 아프리카 종교가 오히려 좋은 도피처를 찾아 숨은 셈이 되었다. 1820년대에서 1860년대까지 노예로 팔려 온 아직 젊은 요루바 출신 노예들에게 아프리카 종교는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춤과 리듬, 드럼 사운드도 생생했다. 해방된 노예들은 대개 아바나와 마탄사스 같은 큰 도시로 몰려들었다. 뉴올리언스로 옮긴 자들도 꽤 되었다. 10년 전쟁이 끝날 때쯤 양철 지붕을 올린 널판때기 집이 밀집한 아바나의 슬럼 지역이 확대되었다. 설탕 플랜테이션의 바라콘을 떠난 아프리카 문화는 아바나에서 자유를 느끼기 시작했다. 말라리아와 황열병으로 뒤덮인 판자촌에서 쿠바 음악의 빅뱅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