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리브레

13. 리브레

#281 과라차

by 조이진

과라차

10년 전쟁 동안 멕시코 하층민 사회에서 유행한 음악 장르 과라차가 쿠바에 들어왔다. 과라차는 기타와 반두리아 같은 기타 계열의 악기로 노래하는 멕시코 특유의 유쾌한 음악으로 입으로는 경건할 삶을 외면서도 성적으로 타락한 성직자와 악랄하게 통치하는 스페인 관리들을 풍자 비난하고 최근에 일어난 사건과 사람을 속어로 묘사한 가사와 빠른 템포로 즉흥적으로 부르는 코믹한 스타일의 음악이다. 멕시코 독립 혁명 때 멕시코 민중이 과라차 노래를 불러 혁명 영웅들을 응원하고 지지해 혁명 성공에 상당한 역할을 했듯, 과라차는 쿠바에서도 10년 전쟁 때 춤추고 노래하는 해방군의 사기를 돋우었다.

멕시코 하층민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과라차 춤과 음악. 지금도 멕시코에서는 과라차가 매우 인기 있는 전통춤과 음악이다.

쿠바에서는 6/8박자 또는 2/4박자로 아주 빠른 템포의 음악으로 풍자와 유머가 가득한 4줄 가사가 여러 번 반복되는 형식이었다. ‘끝없을 것 같은 반복’은 쿠바 음악에서 가장 독특하고 강력한 특징이었다. 과라차는 빠른 템포와 코믹한 가사로 사창가 주변의 저급한 부류들이 모여 춤을 추는 살롱에서 연주되었는데, 이 장르가 19세기에 크게 유행하면서 스페인처럼 쿠바에서도 이탈리아 오페라의 인터미션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누가 누구랑 바람을 피웠다느니 잠자리에서 어찌했다느니 하는 퇴폐적인 유머와 음담패설이 주제였고, 성적인 은유•비유와 길거리 비속어가 많이 사용되었다. 저속하지만 과감하고 공격적인 풍자와 유머는 세태를 비판하는 데 유용했고 스페인의 식민 통치와 그 관료들을 거침없이 비판하고 흑인 노예 해방과 쿠바 독립투쟁 영웅담에 대해서까지 유머의 범위를 넓히면서 변화를 갈망하는 쿠바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흡수되었다. 옮기기 민망할 만큼 저속했지만, 사람들은 이 음악을 들었을 때 따분한 이탈리아 오페라를 듣는 것보다 즐거워했다. 이때까지 오페라 음악에서는 가사가 있었지만, 대중들이 춤을 추기 위한 음악에 가사가 붙여 노래 부르지는 않았다. 무도 음악의 역사에서 가사가 있는 음악이 탄생했다. 가사가 있는 가요를 부른 가수도 과라차 장르에서 처음 등장했다. 20세기에 들어서서는 아바나의 유흥가에서 분위기를 띄우는 음악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대중음악에서 가사가 있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역할이 중요해진 과라차는 아바나의 밤을 지배하면서 음악을 바꾸고 또 사회를 바꾸는 에너지가 되었다.

민스트럴 쇼. 불에 태 코르크를 얼굴에 바른 채 멍청하고 게으르다며 흑인을 조롱하고 비하해 백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스탠드업 코미디

남북전쟁 동안 유행했던 민스트럴도 10년 전쟁 때 쿠바에도 들어왔다. 민스트럴은 흑인과 백인이 섞여 연기했지만, 누가 연기하던 그 내용은 흑인들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무대였는데 이는 아바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스페인과는 분명히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한 쿠바에서 민스트럴은 쿠바식으로 스페인어와 흑인의 아프리카 언어를 섞어 쓰면서 미국과 달리 쿠바식 음악적인 요소를 많이 가미한 뮤지컬 코믹 민스트럴 쇼로 변형되었다. 뮤지컬적 요소는 미국의 것과는 분명히 다른 스타일이었다. 민스트럴과 과라차 두 장르의 영향으로 쿠바 음악 역사에서 중요한 음악 장르가 태어났다.

룸바rumba다. 룸바의 성격은 너무 다양해서 압축해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한마디로“정신없이 어수선한 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타콘 총독의 악명높은 수용소 때문에 네그로 쿠로들은 거리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의 옷차림이나 장신구, 몸짓 같은 요소들은 백인들의 눈을 피해 흑인들의 실생활에 은밀하게 보존되었으며 특히 흑인들의 음악 무대에서는 화려하게 차려입고 요란하게 치장한 네그로 쿠로 문화가 온전하게 되살아났다. 오늘날에도 여러 겹으로 주름 잡힌 소매와 레이스 장식으로 부풀어 오른 흰 셔츠를 입고 라틴 춤을 추는 남자 댄서들을 볼 수 있는데 이 무대의상이 전형적인 네그로 쿠로의 무대 의상 패션이었다. 네그로 쿠로는 타콘의 단속을 피해 극장에서 공연되는 음악 무대와 댄스 사교장을 피난처로 삼아 살아가고 있었다. 무대 휘날레를 장식하는 가장 스펙터클한 순간에 화려한 패션을 한 네그로 쿠로 스타일의 공연자가 등장했다. 그때 노래로는 과라차를 불렀고 춤으로는 정신없이 어수선한 룸바춤을 추었다. 과라차는 저속하고 음란한 표현으로 모순적인 수도사들과 스페인 관리들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노래를 불러 하층민들의 음악으로 간주하였지만 유능한 작곡가가 지은 곡이라면 관객들이 극장을 나오면서 따라부르기도 하고 금세 길거리에서 유행하기도 했다. 과라차와 룸바가 쿠바 민중 문화 속으로 파고들었다.

요란하게 치장된 옷을 입고 어수선한 춤을 추는 것이 룸바 댄스의 이미지였다.

1800년대 들어서 스페인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이탈리아 오페라 부포는 쿠바로 건너왔고 1864년에 쿠바에서도 <부포 하바네로>라는 부포 공연팀이 생겨났다. 쿠바에서 부포는 스페인에서 유행한 스타일을 바탕으로 미국에서 유행한 민스트럴 쇼를 가미했다. 부포는 무엇이든 풍자하고 비웃었다. 쿠바 부포는 베르디 오페라 <여자의 마음La donna è mobile>를 쿠바 부포식으로 패러디해 공연하는 등 쿠바에서 부포의 인기는 폭발했다. 그 가운데 <멋진 네그로El negro bueno>라는 과라차 곡은 칸델라Candela라는 이름의 네그로 쿠로 캐릭터를 노래한 곡인데, 칸델라라는 인물을 은유와 이중적 의미로 가득한 가사로 네그로들의 성적 욕구를 묘사하고 풍자로 가득 채웠다. 극장에서 거리로 빠져나온 이 칸델라 캐릭터는 금세 쿠바 하층민들의 친숙한 캐릭터가 되었다. 풍자와 해학은 억압받는 자들에게는 저항의 중요한 무기다. 독립 전쟁을 치르는 이 시기에 부포는 스페인의 권위를 비웃고 풍자하는 유머와 독립 저항을 자극하고 혁명 영웅을 찬양하는 노랫말, 그리고 빠른 리듬으로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과라차로 노예 해방과 쿠바 독립운동에 한 몫을 보탰다. 스페인에서 이사벨라 2세 여왕이 폐위되었을 때 칸델라 과라차는 ‘칸델라가 왔다. 흑인 세상이 왔다. 타는 목마름으로 외쳐보자. 자유여 만세! ¡Viva la libertad!’라는 가사로 바뀌어 쿠바 독립 전쟁 내내 춤추며 싸우는 독립운동가로 불렸다.

  오리엔테는 전쟁으로 불탔지만, 전화를 입지 않은 아바나와 마탄사스는 늘 그랬던 것처럼 춤추고, 도박하고 매춘이 계속되었다. 이때 아바나시에 등록된 매춘업소만도 200곳이 넘었다. 아바나는 춤의 홍수에 뒤덮인 도시였다. 아바나 사람들이 아는 춤의 종류만도 10여 개가 넘었다. 그중에서도 단존이 눈에 띄게 유행했다. 단존은 유럽의 시퀀스 댄스인 단자를 탱고 리듬에 맞게 맞추되 느린 춤곡으로 변형한 음악이다. 독립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타난 단존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쿠바의 국민 댄스로 자리 잡았다. 이때 단존 곡을 연주한 앙상블은 코넷 한 대, 밸브 트롬본 한 대, 오피클리드 한 대, 클라리넷과 바이올린 두 개씩, 콘트라베이스와 팀발레스 한 대씩, 그리고 다이노 악기 기러 하나로 이런 악기 구성은 19세기 쿠바에서 오르케스타 티피카 편성이었다. 입으로 바람을 불어 소리를 내는 악기가 주축이 된 전통이 형성되었다.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 음악의 전형적인 악기 편성으로 이때 이루어졌다. 최초의 티피카는 ‘쿠바의 꽃Orquesta Flor de Cuba’이라는 이름의 오케스트라로 이들은 10년 전쟁 초기에 독립군들을 위한 자선 공연 때 스페인 국기를 내걸지 않았고 대신 쿠바 국기를 극장에 걸었다. 그리고 미국의 남부 국기가 아닌 노예를 해방한 북부 양키들의 성조기를 나란히 걸었다. 공연에 함께 출연한 연기자는 빨강과 하양, 파랑으로 디자인된 공연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가슴에는 별 하나를 큼지막하게 붙였다. 쿠바 국기가 아바나 대중들에 처음 등장한 순간이었다. 동부 쿠바에서는 독립군들이 들고 싸우고 있는 깃발이었지만 아바나에서는 보지 못했던 깃발이 수도 아바나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공연이 끝날 때 오케스트라 ‘쿠바의 꽃’은 청중들과 함께 “사탕수수의 땅이여, 영원하여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 그룹은 흑인과 백인으로 구성된 8인조 그룹이었다. 아바나의 파티와 춤, 음악이 있는 곳에는 이런 악기로 구성된 그룹들이 쿠바 음악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이 편성의 특징은 혼horn과 퍼커션 악기들이 내는 낯설고 혼을 빼놓을 듯한 사운드였다. 고막을 찢을 것처럼 큰 소리는 무척이나 귀에 거슬렸다. 뉴올리언스 거리의 재즈밴드도 이와 비슷하게 소란스럽기는 했어도 거기서는 거리에서 불었지, 쿠바에서처럼 실내 파티장에서 불어대는 연주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런 음악을 차랑가charanga라고도 불렀다. 차랑가란 스페인에서 브라스밴드가 중심이 된 군악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쿠바의 꽃’의 연주를 일종의 군악대 음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까지는 혼과 퍼커션을 가장 큰 소리를 내는 악기로 간주하던 시대였으므로 차랑가 또는 단존은 무척 큰 소리를 내는 음악이었고, 하늘을 찢을 듯한 트럼펫이 주도하는 뉴올리언스 음악도 아바나 단존에 비하면 작은 소리에 불과했다. 연주자들은 대개 군대의 취주악대나 마을 밴드에 소속된 이들로 글과 악보를 읽지 못하는 문맹자들이어서 낮에 군대나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 무도회장에서 연주해 돈을 벌었다. 단존을 최초로 작곡한 작곡가도 마탄사스의 소방대 취주악대에서 12살부터 코넷 연주자로 음악 인생을 시작했다.


단자에 비하면 단존은 느린 편의 음악이었다. 화려한 옷을 길게 차려입은 댄서들에게 단존의 박자와 호흡은 여유로웠다. A-B-A-B의 프레이즈 패턴으로 단자가 반복적이어서 단조로운 편이었다면 단존은 A-B-A-C-A로 유럽 음악의 론도 형식을 가져왔다. C섹션에서 다른 악기를 사용해 다른 분위기로 만들면서도 A섹션을 반복함으로 곡의 주제부를 표현할 수 있었다. 가령 B섹션은 클라리넷을, C섹션은 바이올린을 연주함으로써 섹션마다 다른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었다. 1920년대에 손son 붐이 일 때까지 쿠바에서 단존은 독보적인 음악 형식이었고 1940년대까지 그 인기는 압도적이었다. 단존의 인기가 절정일 때 맘보와 차차차가 파생되어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쿠바와 미국에서 크게 유행했고 유럽과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까지 유행했다. 단존은 최초의 발상지인 멕시코 전역에서 쿠바 스타일로 크게 유행했다.


10년 전쟁 동안 단존같은 하층민들의 춤과 음악만 활발하게 변한 것은 아니다. 네덜란드 출신 음악가가 작은 전쟁이 끝나고 휴지기에 들었을 때 쿠바 음악원을 설립했다. 이로써 유럽 음악 지망생은 정규 음악 교육을 받기 위해 유럽에까지 가지 않아도 되었다. 이후에 여러 음악원이 연달아 문을 열었고, 이들 음악원에서 쿠바 음악을 이끌어간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10년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유럽에서는 하바네라가 히트했다. 1875년 세비야의 시가 공장에서 담배 마는 집시 여공 카르멘이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빨간 드레스를 입고 붉은 장미를 입에 물고 ‘하지만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조심해야 해요’라는 가사의 하바네라 ‘사랑은 반항하는 새’를 불렀다, 아바나에서는 고트쵸크에게 배운 이그나시오와 호세 화이트가 콘서트를 열어 독립 기금을 모았고, 스페인 총독은 이들을 추방했다. 이들 음악가는 라틴 아메리카 내셔널리즘을 최초로 의식한 음악가로 오늘날에도 존경받고 있다. 독립 전쟁이라는 화산활동이 잠시 멈추었을 때인 1890년에 아바나 타콘 대극장에서는 역사에 남은 문학회가 열렸다. 푸에르토리코의 독립혁명운동가인 여류 시인이 역사에 길이 남은 시를 낭독했다.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는 두 날개로 나는 한 마리 새. 우리 둘은 꽃잎도 총알도 하나의 가슴으로 받는다”라는 이 시는 ‘아름다운 보린켄이여. 쿠바를 따라 우리도 독립을 위해 총을 들자’라고 노골적으로 선동하고 있었다. 음악원 출신 연주자들이 아바나 음악을 주도하고 있을 때 사탕수수밭이 불타는 오리엔테에서는 배고픈 소년 노동자들이 음악을 주도했다. 막노동이나 양복집, 담배공장의 담배 말이 노동을 마친 소년들이 직접 만든 기타로 연주했다. 매우 적은 급료를 받는 배고픈 소년공들은 곡을 연주해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했다. 칸타도레스라 불린 이들은 스스로 시어를 지어 노래하거나 기성 시인의 시를 노랫말 삼아 두 명이 기타를 연주하며 듀오로 화음을 만들어 노래했다. 중세 스페인에서 노래한 방랑 음유시인 트로바도르라는 호칭이 쿠바에서 되살아날 때는 1930년대였지만, 이들 칸타도레스들이 쿠바의 초창기 트로바도르였다.

산티아고데쿠바에서 일어난 이런 음악 흐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뮤지션은 페페 산체스다.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던 페페는 그는 머릿속으로 작곡한 곡을 음표로 남길 줄 몰랐다. 많은 곡을 작곡했지만, 그의 작품은 20여 곡만 남았는데 그의 동료들이 악보를 기록해 준 것들이었다. 산티아고에서 양복점 바느질꾼으로 자란 그는 상류사회와 하층민의 음악을 모두 경험해 자기 음악에 두 계급의 음악적 요소들을 섞었다. 어린 시절 그의 집은 쿠바 역사에서 길이 존경받을 마세오 장군 형제, 몬카다 장군 같은 쿠바 독립 전쟁의 지도자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그가 살았던 산티아고는 아이티 혁명을 피해 도망을 온 프랑스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으므로 그는 자연스럽게 프랑스풍의 아이티 음악을 들으며 자랐다. 그 영향으로 낭만적인 주제와 운율의 노랫말을 탱고에서 변주된 신퀴요 리듬의 코코예에 얹은 페페는 산티아고 스타일의 로맨틱하고 우아하며 여성적인 멜로디의 노래 스타일을 정립했다. 쿠바 음악인들은 그것을 쿠바 볼레로라고 했다. 이런 특징 때문에 18세기에 캐스터네츠를 반주로 한 민속 춤곡인 스페인 볼레로와는 음악적으로 연관성이 없고 단지 명칭만 같았을 뿐이라고 음악학자들은 보았다. 페페가 작곡한 첫 볼레로 곡이 <슬픔Tristezas>(1883)이다. “여인이여. 당신의 한마디로 내 슬픔이 깊어져요. 당신이 내 사랑을 의심하시니 내 고통은 깊어져요. 내 사랑을 보여줄 길 없네요. 당신을 바라는 내 상심만 깊어져요. 나는 운이 없네요. 내 뜨거운 마음을….” 서정적이고 로맨틱한 볼레로 가사는 사랑으로 상처받은 모든 연인을 위로했다. 그가 바느질을 일을 마치고 산티아고의 무도회장으로 가는 길을 걷다 작곡한 이 낭만적인 볼레로에는 느릿한 단존이 들어있기도 하고 맘보도 들어있었다. 페페의 볼레로가 아바나 항을 떠나 유카탄의 베라크루즈 항에 도착했고 멕시코 사람들의 가슴 속으로 파고든 볼레로는 멕시코 음악에서 중요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멕시코인들은 오직 음악적인 이유만으로도 멕시코와 쿠바는 한 형제라고 말한다. 쿠바의 단존과 볼레로에 비해 멕시코 단존과 볼레로는 보컬 파트는 좀 더 자유롭고 유연하며, 기타의 역할이 더 강조되었다. 마르티가 <조국>을 발간한 해 쿠바에서 발표된 우아하고 로맨틱한 페페의 하바네라 <당신에게Tú(1892)>가 아바나를 떠나 독일, 프랑스, 스페인, 미국, 남미 등에서 크게 인기를 끌어 쿠바 음악의 첫 번째 세계적 히트곡이 되었다. 18세 소년 작곡자는 “모든 꽃 중에서 여왕은 당신입니다”라고 노래하는 이 곡에서 ‘당신’은 아름다운 조국 쿠바라고 했다.

1880년대에 미국식 광고가 쿠바에서 전개되었다. 쿠바는 물론이고 멕시코와 미국에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페페 산체스가 상업 광고 노래를 공연 중간중간에 라이브로 불렀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있었다면 이 노래는 스튜디오에서 정교하게 녹음되어 CM Song으로 반복해 틀었을 것이고 많은 이들이 따라 불렀을 것이다. 광고 기법적으로는 징글jingl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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